내가 녀석을 압니다.
녀석은 원래 우리 집 2층의 화분에 살던
빛깔 고운 봉숭아가 잉태한 아이였습니다.
2층 화분의 봉숭아는 꽃만 피우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매년 씨앗을 잉태합니다.
그것도 무수히 많은 씨앗을 주렁주렁 매달곤 합니다.
그렇지만 씨앗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고작해야 2층의 베란다 한켠을 지키고 있는
화분들이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주변으론 온통 시멘트 세상입니다.
그 자리가 많이 좁아보였나 봅니다.
게다가 화분은 아주 안전한 자리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항상 우리 어머님께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죠.
어머님이 아침저녁으로 화분에 물을 줍니다.
어느 하루 잊고 그냥 지나가면 그 갈증에 못이겨
봉숭아는 곧바로 허리가 휘어져 버립니다.
그럼 어머님이 서둘러 물을 한바가지 줍니다.
물 한바가지면 혼미하던 정신이 금방 돌아옵니다.
그렇긴 해도 그런 날은 완전히 죽다가 살아나는 날입니다.
올해도 화분의 봉숭아들은 그런 경험들을 한두번씩 거쳐야 했습니다.
항상 어머님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야 하는 그 삶도
그다지 편한 삶은 아닌 듯 보입니다.
봉숭아가 잉태한 씨앗들 가운데는
아주 모험심이 강한 녀석들이 많습니다.
조용히 씨방을 열고 바로 아래쪽의 화분으로 가만히 내려앉으면
그래도 화분에서 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꼭 봉숭아 씨앗들은 씨방을 발로 박차면서 멀리멀리 튀어나갑니다.
그중의 몇 녀석은 2층에서 담바깥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아예 집바깥으로 튀어나간 거지요.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현관문의 기둥 바로 옆에서 땅속으로 파고들 작은 틈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눈엔 있는지 마는지 알 수도 없는 구멍이지만
그 녀석에겐 아마도 눈에 번쩍 띄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자기 삶의 자리를 마련하고 꽃까지 피웠습니다.
그곳은 매일 차를 대는 자리입니다.
차가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 자리를 잡곤 합니다.
나는 지나칠 때마다 한마디합니다.
“그래, 집나와서 여기서 사니까 좋냐.”
봉숭아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물걱정 안하고 그곳에서 한계절을 잘 살았습니다.
그 꼿꼿한 허리는 삶을 자연스럽게 거둘 때까지
한번도 휘어지지 않았습니다.
녀석은 집나가서
제 삶을 제 뿌리로 현관의 기둥보다 더 우뚝 세웠습니다.
6 thoughts on “집나간 봉숭아”
길가 구석에 핀 봉숭아 입장까지 헤아려주시고,
입장 바꿔 생각해보란 말은 전혀 듣지 않을 것 같은
동원님의 글이에요. ㅋ
아스팔트 사이에서 돋아난 생명의 힘이란!
살지어다, 모든 생명체는 생활력이 참 강한 것 같아요.
상황에 부닥치면 다 적응하게 되어있는 듯.
하하, 어쩜 저를 그리 잘아시는지…
딱 두번의 만남에 저를 파악하시다니…
도루피님은 젊은 사람 답지 않게 눈이 밝으시다니까요.
시멘트에 둘러싸인 봉숭아가 너무 안돼보이네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쁜 꽃을 틔운 봉숭아가 정말 대견해요.
추운데 봉숭아 한 번 꼭 안아주세요. 으메 징하게 안타깝네…
어째요.
오늘 아침 너무 추워서 생을 마감했어요.
그래도 굳세게 살았으니 그것으로 위로를 해주어야죠, 뭐.
그래도 김동원님 집에 미련이 많은 모양이네요.
집 떠난게 겨우 담장 밑인걸 보니..
어려서 엄마한테 혼나고 쫒겨나와 담장에 기대서서
언제나 데릴러 나오나 기다렸던 생각도 나구요.^^;;
오늘같이 추운 날엔 쫓겨나면 절대로 안되는데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