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들의 시적 구성 – 오규원의 시 「칸나」

Photo by Kim Dong Won
칸나

칸나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 시가 있다면 우리는 그 시가 칸나를 말할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오규원의 시 「칸나」는 그 짐작을 빗나간다.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올리고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동안 퍼부었다
—오규원, 「칸나」 전문

어떤 시는 읽고 나면 어려운 구석은 하나도 없는데도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시도 그렇다. 칸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도 않고 칸나가 꽃을 피운 날과 다시 또 꽃을 피운 날이나 그 다음 날의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시는 대체로 그 내용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말을 담지만 구성을 내용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 시가 그렇다. 내용에 집착하면 구성을 중심으로 이룩된 시는 그 내용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읽히질 않는다.
칸나를 제목으로 삼고 내용 또한 칸나로 채운 시가 있다면 대개 그런 시는 칸나의 세상을 새롭게 펼쳐보일 것이다. 칸나를 구성의 한 요소로 삼고 있는 시는 그와는 다르다. 우리는 대개 날짜로 어떤 날의 하루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 시에선 날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과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뽑아올리고 다시/꽃이 핀 날”을 중심으로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말한다. 때문에 이 시에선 칸나가 날의 중심이 된다.
나는 이를 어느 하루를 말하는 오규원식의 시적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방식의 좋은 점은 우리 모두가 이를 활용하여 우리들만의 시적 하루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나는 며칠 전 동네를 걷다 꽃이 핀 칸나를 보았다. 그 날은 8월 11일이었지만 나는 그 날을 지워버리고 칸나를 중심으로 그 날을 구성할 수 있다.

동네를 걷다 아파트 담벼락에서
꽃이 핀 칸나를 본 날은
8호선 지하철이 별내까지 연장 개통한 다음 날이었다.
칸나를 지나쳐 암사역사공원역까지 걷고
한 정거장을 타고 가 장자호수공원을 걷다 왔다.

8월 10일에 암사역을 종점으로 했던 8호선 지하철이 별내까지 연장 개통되었다. 그 다음 날 걸어서 암사역사공원역까지 간 뒤 한 정거장을 타고 가 장자호수공원을 둘러보고 왔다. 새로 생긴 암사역사공원역까지 가다가 동네 아파트의 담에서 칸나의 꽃을 보았다. 이것이 날짜를 중심으로 구성한 같은 내용의 동일한 하루이다. 시는 날짜를 중심으로 한 하루의 구성을 꽃을 중심으로 한 구성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구성이 그 날의 느낌을 새롭게 한다.
물론 나는 오규원의 시 「칸나」를 미리 알고 있었다. 칸나의 꽃을 보는 순간, 오늘은 집에 돌아가면 그 시를 다시 꺼내서 읽어보리라 생각했었다. 시를 읽어 미리 알아두는 일은 칸나를 만났을 때 그 칸나를 나의 삶으로 끌어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칸나가 아니면 어떠랴. 또 꽃이 아니라도 좋다. 우리는 날짜를 버리고 우리의 하루를 얼마든지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바로 오규원의 시 「칸나」가 알려주는 미덕이다. 올라온 태풍 종다리가 소멸한 날도 하루를 달리 구성하는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듯 좋은 구성의 시를 변주하여 우리의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시로 삶을 엮어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 읽고 눈여겨 봐두면 시가 우리의 삶 또한 시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2024년 8월 22일)
(인용한 시는 오규원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문학과지성사, 1999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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