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이 쌓인 풍경을 만나거든

Photo by Kim Dong Won
2002년 10월 28일 가평 남이섬에서


가을엔 은행나무 밑에 한번 가보세요.
특히 잎을 다 떨구고 난 뒤에 은행나무 밑에 한번 가보세요.
그 자리에 가면
여름내 초록을 머리에 이고
그 그림자로 우리를 품었던 은행나무가
이젠 우리의 발밑으로 노란 길을 펼쳐듭니다.
그곳이 한적한 교외의 찻집이라면
아마도 은행나무는 노란 앞뜰을 우리 앞에 펼쳐놓겠지요.
그런 곳에서 나보기가 역겹다는 연인이 잎을 즈려밟고 떠나는
무시무시한 악몽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곳엔 갈 땐,
부디 혼자가지 말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가세요.
그냥 그 잎을 밟고 걸으며
은행나무가 한여름 푸른 잎사귀를 펼쳐 그 그림자 속에 우리를 품었듯이
당신도 한여름엔 당신의 당신을 당신의 그림자 속에 품고 싶다고 말하세요.
(내가 너무 당신 당신 하는 것 같긴 하군요.)
그리고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가 그 잎을 우리의 발밑에 깔아
노란색이 고운 길을 펼쳐주었듯이
당신도 가을이 되면
당신의 삶이 당신의 당신 발앞에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 노란 길로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말하세요.
그곳이 찻집의 앞뜰이라면
그냥 앉아 하염없이 노란색에 물드는 것만으로도 좋은
은행잎 수북히 쌓인 앞뜰로 펼쳐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야 겠지요.
아니, 아니 반대로 말해도 좋아요.
당신의 당신과 함께 있을 때면
여름엔 은행나무가 펼쳐든 초록빛 그림자 속에 든 느낌이었고,
가을엔 당신과 함께 걸으면
어느 길이나 은행잎으로 장식해준 노란 길처럼 아름다웠노라고…
물론 이번에도 그곳이 찻집의 앞뜰이라면
그냥 앉아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아름다웠노라고
말을 조금 바꾸어야 겠지요.
가을엔 꼭 둘이
잎을 다 떨군 은행나무 밑에 가서
둘이 함께 걷거나 찻집의 앞뜰에 앉아 노란색에 물들어 보세요.
아마 가을빛에 물드는 듯해도
사실은 서로의 사랑에 물들 수 있을 거예요.
가을도 사랑의 계절이예요.
그리고 잎을 다 떨군 은행나무는
사랑을 속삭이기에 아주 좋은 자리죠.
부디 그 자리를 놓치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길 바래요.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1월 16일 팔당 두물머리의 찻집 수밀원에서

8 thoughts on “은행잎이 쌓인 풍경을 만나거든

  1. 지난 11월 초, 천마산을 다녀왔는데 은행잎은 아니지만 가을 낙엽이 보기 좋게 쌓여 있더군요. 관리사무소 쪽으로 하산을 하였는데 낙엽과 벤치와 군데군데 앉아있는 사람들 모습이 너무 멋있는 게 영화의 한 장면 같더군요. 당신의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곳이더군요.
    아주 예전 고향에 있던 찻집에선 이맘때쯤 은행잎을 깔아 놓곤 했는데 정말 속삭이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답니다. 정말 노란색에 물들고 싶네요. ^^

    1. 확실하진 않은데 저도 아마 천마산 자락이지 않을까 짐작이 되는 곳을 얼떨결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계곡의 사진을 찍어갖고 왔는데 아주 경치가 좋았던 기억입니다.
      요즘은 한강만 나가도 우리 때도 한강이 이렇게 데이트하기에 좋았었나 싶기는 해요. 앉아서 속삭이듯 얘기하기 좋은 곳이 정말 많더군요. 실제로 한강에 나와서 텐트치고 노는 연인들도 많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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