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예전에는,
그것도 몇 백 여년 동안
궁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틀림없이 사람들이 그곳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람들의 생활이 제거된 지금,
궁에 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제는 궁의 주인이 그곳의 건물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4월 12일 수요일, 창덕궁을 찾았을 때도 그런 느낌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곳의 안내도 인정전과 대조전, 연경당 등의 건물을 따라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걸음도 건물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나 이 봄의 창덕궁에서
내 눈에 그 궁의 주인은 꽃이었다.
꽃들은 궁의 주인인 건물들을 슬쩍 밀어내고는
내 시선을 내내 그들에게 고정시켰다.
창덕궁을 돌아보는 동안
내가 가졌던 생각은
과연 꽃은 심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황매화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창덕궁의 황매화는
누군가 그곳에 심었다기 보다
그곳에 그려놓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마도 창덕궁에서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집중시켰을
이 능수벚꽃의 앞에 이르면
이 나무를 누군가 심어놓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려놓은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더더욱 강화된다.
나무나 꽃을 심는다는 것이
그저 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번에 능수벚꽃을 처음 보았다.
다른 벚꽃과 달리 그것은 아름답게 피었을 때
하늘로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벚꽃은 가장 아름다울 때
위가 아니라 낮은 저 아래로 가고 싶어 한다.
능수벚꽃은 발처럼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발은 원래 바깥 풍경을 적당히 거르고
바람과 빛은 맞아들이기 위한 것이지만
이 능수벚꽃의 발은
그냥 그 발을 바라보기 위해 쳐두는 발이다.
때문에 능수벚꽃이 발을 치면
우리의 시선은 바로 그 발로 향한다.
담벼락은
오늘 산수유의 화폭이 되었다.
산수유는 화폭의 독특한 문양을 제대로 살려
노란 그림을 그렸다.
벚꽃만 다른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선 목련도 남달랐다.
원래 흰빛은 저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향기도 매우 진하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하얀 목련이 질 때 가슴이 아프다면
아마도 그 목련의 하얀색이란 바로 이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련이 진다면
헤어진 사람이 없어도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슴이 아련해질 것이다.
꽃은 한두 송이만 있어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꾸민다.
우리는 모여있으면 소란스러운데
꽃은 모여있으면 아름다움을 엮어낸다.
앵두나무는 작고 붉은 과실을 꿈꾸는 나무지만
그 붉은 꿈을 꾸는 봄날의 꽃은 희디 희기만 하다.
그 흰빛이 아우성처럼 피어나는 자리는
한자리에 모여있는 왁자지껄함으로 더욱 아름답다.
개나리는 흔히 보는 꽃이다.
지나가는 관람객들 중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개나리도 이렇게 예쁘냐.”
나는 또 누군가
여기에 개나리를 심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려놓은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진달래이다.
정말 곱게도 차려입었다.
봄철에 여자들이
옷 한 벌 해입고 싶어하는 심정이 이해가 간다.
또 봄에는 옷 한 벌 해주지 못하는 심정이
더욱 안타깝다.
사실 거의 모든 꽃들이
꽃보다 이파리가 먼저이다.
그리고 이파리는 대게 초록색이다.
그러나 봄에 꽃이 갖가지 색깔로 단장을 하는 순간
초록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더 이상 색이 아니다.
나는 이파리가 예쁘다고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창덕궁에서 철쭉의 이파리를 들여다보던 나는
철쭉의 그 진한 분홍빛이
초록 이파리 속에서 잉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록꽃이 진한 분홍꽃을 낳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이파리는 사실은 꽃이다.
사람들은 그 색이 초록 일색이어서
그 꽃을 놓치고 있다.
제비꽃도 흔한 꽃이다.
특히 창덕궁에서 제비꽃은 더욱 흔하다.
하지만 창덕궁의 제비꽃은 그곳에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곳에 그려놓은 꽃이었다.
봄의 창덕궁은 꽃과 눈을 맞추는 순간,
그 주변이 곧장 화폭으로 뒤바뀌고
꽃은 그림이 된다.
9 thoughts on “봄의 창덕궁은 꽃의 궁전이다”
제가 좋아하는 진달래부터 이쁜 꽃들이 모두 모여있네요.
엷으면 엷은대로, 진하면 진한대로 모든 꽃은 다 이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동원님의 마음도 꽃 못지않게 아름답구요.
며칠 전, 부인의 맑은 모습과 동원님의 글을보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사랑은 표현할 때 더욱 빛을 발하는건데,
워찌 갱상도 남자들은 그토록 무뚝뚝하고 살가운 말 한마디 못하는지 속상해서요.ㅎ
제 남편뿐만아니라, 이웃의 아자씨들 참말로 무뚝뚝합니데이.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인 줄알았으면 결혼할 때 눈 똑바로뜨고 서울사람 골라볼걸~ㅋ
하여튼 제가 좋아하는 꽃과 이쁜 글들이 많아서 며칠 전에 동원님 블로그 즐찾했어유.
그녀님과 동원님 늘 건강,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창원의 그녀님도 이쁜 그녀이구요.^^
마음과 사랑의 깊이야 어찌 제가 평등공주님 남편을 따르겠어요.
마음의 응원밖에 보내지 못하는 제가 송구스럽네요.
동원님의 그녀예요^^
저두 마음으로 응원 듬뿍 보냅니다.
저희두 엄청 싸운답니다.
그리고 또 닭살스럽게 살기도 합니다.
요즘 생각해보면 너무 닭살스럽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 18년이나 살면서요…
둘 다 닭띠도 아니면서…ㅎㅎㅎ
저두 놀러가겠습니다.^^
저 이 제비꽃좀 가져도돼요? 벌써 가져갔지만요.^^
전에 가을소리님께 이 블로그의 사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드렸잖아요.
그래도 너무 맘대로 자기껏처럼 쓰면 기분 상하잖아요.^^
메인에 제 사진을 놓았었는데 보는사람 지겨울것같아 이쁜 제비꽃을.^^
제가 다 기분 좋아지네요.
근데 제비꽃이 왠지 슬퍼보이는거같아요.
작은 꽃이라서 그런지..
고맙게 가져다 쓸게요.^^
그냥 개의치 말고 가져다쓰세요.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제 블로그는 가을소리님 덕분에 운영이 되다 시피 하고 있어요.
요건 모르시겠지만 가을소리님은 제 블로그의 무플방지위원회 위원장이시거든요. 항상 위원장님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제 블로그가 댓글이 너무 없어 썰렁한데 그걸 가을소리님께서 따뜻한 온기의 댓글로 덥혀주고 계십니다.
글만 있는 블로그는 글로 채워져 있는게 아니라 그냥 텅빈듯이 느껴져요.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릴께요. 가을소리님은 제 블로그의 사진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실 수 있습니다!!!
어젯밤 이 꽃사진들을 보면서 역시..김동원님이시네..생각했어요. 너무 이쁘게 찍으셔서.^^
근데 진짜로 이쁘더라구요.
3시에 바로 곁의 창경궁으로 넘어갔는데
거기선 아무리 돌아다녀도 이런 예쁜 꽃들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창덕궁은 좀 특별한 곳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