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네 병째의 소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요것까지만 마시고 가자. 여자가 말했다. 내가 혀가 꼬부라져서 그러는 거지. 남자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네 얼굴에 저녁놀처럼 번져있는 붉은 기운이 점점 진해지고 있는 것도 고려했어.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어. 혀가 꼬부라져도 너를 물어뜯지는 않어. 나는 또 말했다. 물어뜯기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나중에 업고 가야할까봐 그게 걱정이 되서 그래. 내 체력으로는 업고 가는 건 무리거든.
사실 그건 둘러댄 말이었다. 남자가 술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한 것은 아이폰의 화면을 터치하며 확인한 시간이었다. 아이폰이 나오면서 시간은 손으로 건드리면 나타나는 시대가 되었다. 시간은 밤 11시가 몇 분 남지 않았음을 남자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그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려면 이제 일어서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지하철의 마지막 열차가 오는 시간은 가끔 술자리의 마지노선 같이 느껴지곤 했다.
결국 둘은 네 병째 소주병을 비운 뒤에 자리를 일어섰다. 마치 어떤 자장에 이끌리듯 지하철 입구역까지 걸어간 남자가 이곳에 버스가 있다는 여자의 말을 기억해내고 여자에게 너는 어디서 버스를 타냐고 물었다.
여자가 핸드폰을 꺼내 몇 번의 터치로 능숙하게 화면을 넘겨보더니 저기 위쪽인데 하면서 손끝으로 거리의 한쪽을 가리켰다. 지하철역의 입구와 거리를 둔 곳이었다. 남자는 그럼 너를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고 갈께 라고 했다. 그 말은 조금 더 너와 같이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의 다른 표현이었다.
걸어 올라간 곳에서 정류장 안내판의 버스 번호를 확인했지만 여자가 말한 버스 번호는 없었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살펴보기를 반복한 끝에 여자가 가리킨 손끝은 길은 한 중간에 자리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둘은 길을 건넜다. 여자는 길의 중간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고 남자는 계속 길을 건너가며 헤어졌다. 서로 손을 흔들어 마지막 이별의 의례로 삼았다. 안녕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늦은 시간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비운다. 지하철역의 상가가 모두 문을 닫은 것도 사람들을 비우게 되는 큰 이유였다. 남자는 텅빈 지하철역을 걸어가 열차를 탔다. 잠실에서 열차가 끝겼던 경험이 있었던 남자는 잠실에서 함께 내린 그 많은 사람들의 숫자에 크게 안도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아직 열차가 끊기진 않은 것이다. 별내행의 열차를 19분 뒤에 한 대 더 남겨두고 2분 뒤에 도착할 열차가 오고 있었다. 시간은 내일로 넘어와 있었다.
동네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 반달을 살짝 지나 살이 오르기 시작한 달이 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침에 읽었던 새러 티즈데일의 「봄비」란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천둥은 지구를 움켜쥐고 번개는 하늘에 낙서를 휘갈기네”라는 구절이었다. 그 구절은 지구를 움켜쥐고 천둥이 울리고 하늘에 낙서를 휘갈기며 번개가 치네로 바뀌어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놓고 있었다. 비도 없는 밤에 천둥과 번개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때로 혀가 꼬부라지며 술을 마시는 여자가 남자의 마음 속에서 말의 질서를 바꾼다.
(2024년 10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