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과 기포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2월 5일 두물머리에서


오래간만에 나간 두물머리 강변.
날씨가 영하로 내려앉으면서
논에 가두어둔 물에 살짝 살얼음이 잡혔습니다.
발디디면 꺼지는 얇은 얼음, 살얼음입니다.
살얼음의 여기저기 말갛게 기포가 잡혀있습니다.
어릴 땐 그 기포가 있는 곳을 골라
꼭 구멍을 내곤 했었습니다.
그러면 얼음 아래 갇혔던 공기가 모두 바깥으로 풀려났습니다.
오늘은 그런 짓 안하고
그냥 얼음 속의 기포를 한참 동안 들여다 보기만 했습니다.

물은 항상 바람과 살을 맞대고 살았습니다.
때로 바람은 물의 품에 머리를 묻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때면 물은 잔잔했습니다.
바람이 물의 품을 뛰어다니며 놀 때도 있었죠.
그때면 물의 표면엔 결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곁에 두고 살면서도
물은 바람을 갖고 싶었습니다.
바람은 곁에 둘 순 있어도 가질 순 없었죠.
그렇지만 물이 바람을 가질 수 있는 계절이 있습니다.
계절이 겨울로 들어서고 살얼음이 잡히면
얼음 속 여기저기에
바람이 말갛게 몸을 뭉크리거나 그 몸을 길게 뻗고
물의 품에 고스란히 안기곤 합니다.
그때면 바람은 분명한 물의 것이었죠.
하지만 물은 바람을 내내 가지려 하진 않습니다.
바람은 역시 물의 품에 깃들어 마치 없는듯 잔잔하게 잠들거나
그 품을 마음대로 뛰어놀 때 살아 있거든요.
겨울 한철 물이 그 품에 갖고 있는 바람은
그 시간이 길어지면 물의 품을 답답해 합니다.
물은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봄이 오면 다시 바람을 그 품에서 풀어놓습니다.
다만 살얼음이 잡히는 어느 겨울날,
물은 잠시 바람을 그 가슴에 품어 분명하게 제 것으로 해둡니다.
겨울은 춥고, 추워서 몸이 굳고 마음이 굳습니다.
몸과 마음이 굳는 쓸쓸한 계절, 추운 겨울엔
곁에 두었던 바람을 속에 품어 제 것으로 해야
그 온기로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겨울 한철, 물은 바람을 잠시 제 것으로 해둡니다.
물은 그렇게 바람과 살고 있습니다.

어릴 때, 구멍을 뚫어 바람을 빼주며 놀던
살얼음 잡힌 논옆에서
오늘은 생각에 잠겨
얼음 속의 기포들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았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2월 5일 두물머리에서

6 thoughts on “살얼음과 기포

    1. 어제 많이 추웠죠.
      우리만 든든하게 입고,
      젊은 사람들 너무 덜덜 떨게 한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난 내 생각을 잡아끄는 우리 주변의 익숙하지만 평범한 작은 것들이 좋더라구요.

  1. 그저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한 공기려니 했는데…
    저건 그러니까 물이 그렇게도 함께 하고 싶어했던 바람이었군요.

    과학적 사고와 예술적 감각이 모두 동원된 멋진 글이세요.^^

    1. 신기한 건 지난 해도 보고, 그 전 해도 보고 수없이 보았던 살얼음 밑의 기포에서 왜 어제서야 어떤 생각이 난 것일까 하는 것이었어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덕분이었나봐요.
      어제 간만에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 사진찍으며 돌아다녔거든요.
      저의 발견에 신이나서 미리 사람들에게 떠들기까지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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