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바다와는 먼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영월의 북면은 오래 전에는 바다였다. 그 바다의 흔적이 스트로마톨라이트라 불리는 퇴적암 지층으로 남아 있다. 바다와는 먼 곳이었지만 나는 5억년 전 바다의 기억 속에서 자랐다. 그 때문인지 이상하게 바다가 좋았다.
타이베이 여행 계획을 들었을 때 나는 이번 여행을 이 도시의 근교 바다를 찾아가는 여행으로 삼고 싶었다. 타이베이는 도심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많은 바다가 있었다. 타이베이 여행 나흘째 날, 나는 혼자 그 중 지룽의 바다를 가보기로 결심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숙소를 나서 타이베이 메인역으로 간다. 메인이란 이름의 역은 없다. 그냥 타이베이역이 영어로는 Taipei main station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역으로 가다보면 항상 우정박물관(郵政博物館臺北館 타이베이 요우증보우관 Postal Museum Taipei Beimen Branch) 앞을 지나가게 된다. 대만에서 신식 우편 서비스가 시작된 우체국 중 가장 오래된 곳이 이 베이먼점(北門店)이라고 한다. 건물 앞의 화단이 좋았다. 화단이 초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거리의 오토바이들은 신호를 기다릴 때면 뭉쳐 있다. 거리에 오토바이존이 따로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토바이의 도열을 받으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눈에 익은 돔형의 건물이 멀리 보인다. 대만박물관이다. 타이베이역으로 갈 때마다 봤지만 들어가보지 못한 곳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눈에 익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타이베이역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역의 간판을 보질 못해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이 어디냐고 물어야 했다. 내 물음에 귀를 기울여준 사람이 바로 앞의 건물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아, 자주 보고 지나갔던 이 거대한 건물이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이구나 했다. 그리고 역으로 들어갔다. 한자는 눈에 잘 안들어오고 그 아래쪽의 영어는 눈에 잘 들어왔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타이베이역이 워낙 거대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역의 안내소에서 물었다. 내가 건넨 말은 아주 짧았다. 나는 지룽이라는 지명만을 입에 올렸고 역직원은 어색한 나의 발음으로 내가 외국인 여행객임을 눈치채고는 영어로 TR을 따라가라고 했다. 앞의 표지판을 살펴보니 TR이 있었다. TR은 Taipei Railroad였다. TR을 따라가자 매표소가 나왔고 나는 다시 창구에서 티켓 포 지룽을 짧게 말했다. 직원이 업스테어라고 말해서 한 층을 올라가 다시 창구를 찾았다. 같은 영어를 다시 짧게 반복했고 직원은 표를 주며 4번 승강장으로 가라고 했다. 타이베이는 어딜가나 영어가 통했다. 서로 거의 단어만 언급하는 짧은 영어를 썼지만 잘 소통이 되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승강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승강장은 양쪽으로 열차를 탈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이미 들어와 있는 열차가 있었다. 나는 열차에 올라 아무에게나 디스 트레인 포 지룽이라고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노였다. 다른 객차의 두 명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역시나 내가 들은 대답은 노였다. 나는 재빨리 열차를 내렸다. 내려서 보니 안내 전광판이 있었다. 전광판이 정확하게 지룽으로 가는 열차를 안내하고 있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열차를 탔다. 어딘가를 거쳐서 오는 열차인지 이미 사람이 많았다. 안전하게 확인을 하자는 생각에 아무에게나 이게 지룽가는 열차냐고 다시 물었고 예스라는 답을 얻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차는 상당히 긴 구간을 지하로 달렸다. 도시는 지상의 길만으로는 길이 부족하여 땅속으로 길을 낸다. 열차는 도시의 삶은 어둠이며 그 삶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교외로 간다는 것은 그 어둠의 삶을 잠시 벗어나는 일이다. 도시는 한낮에도 어둡다. 지하로 가는 열차만큼 그 사실을 확연하게 알려주는 것도 없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사람들이 서서히 비고 드디어 빈자리가 나서 앉을 수 있었다. 앉아선 내가 끊어서 탄 열차표를 들여다 본다. 지룽의 지명이 한자와 영어로 기륭(基隆)과 키룽(Keelung)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같은 지명을 두고 세 가지 말이 따로 놀았다. 기념 삼아 표를 간직하고 싶었으나 내릴 때 냈더니 그대로 수거해 갔다. 갖고 싶으면 갖고 싶다고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도장을 찍어서 돌려준다고 한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차가 지상으로 나가자 역에 설 때마다 역의 풍경이 좋았다. 3월인데도 초록이 많다. 출입문은 풍경을 펼쳐들고 접고를 반복한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차 안의 사람들이 점점 드물어 지면서 열차의 차창을 사람들의 방해 없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차창은 밖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밖을 풍경으로 담는 액자가 된다. 누군가 앞에 앉으면 자리를 옮겨 다시 새로운 액자를 가질 수 있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역의 바로 앞이 집이다. 집과 역이 서로를 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열차 소리가 시끄럽기도 하겠지만 오가는 열차가 만들어내는 풍경이면 소리를 감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버스 소리는 소음이지만 열차 소리는 낭만이 될 수 있다.

2026년 3월 2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1시간 넘게 갈려 지룽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빠짐없이 내렸다. 지룽이 종착역이다. 오는 동안 열차 차창의 건물들이 높이를 낮추거나 건물들을 지우다가 역 가까이에선 다시 높이를 높이거나 건물들로 채워넣는 일을 반복했다. 지룽은 항구도시였으며 도시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