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바다 – 남한산성에서

4월 14일 월요일을 시작으로 남한산성을 쏘다녔다.
시내버스비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
매번 남한산성에 올랐지만
그 중의 하루는 아래쪽 언저리를 돌아보는 걸음을 너무 길게 잡아
결국 남한산성은 그냥 올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와야 했다.
나흘 동안 내 시선은 대부분 봄꽃을 찾아 땅을 낮게 훑고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난 빈번하게 가지 사이로 시선을 들이밀거나
아니면 고개를 위로 젖혀 나무들을 살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서문에서 마천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봄은 잎보다 꽃으로 더 먼저 우리에게 온다.
그래서 난 처음엔 진달래꽃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갈색빛이 그대로 쌓여있던 진달래꽃의 등뒤로
단 며칠 만에 초록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진달래꽃이 막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쯤
꽃의 자리에서도 이제 우리는 푸른 잎을 만난다.
알고보니 꽃은 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푸른 잎을 데리고 우리에게 왔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하남의 객산에서

사실 난 가지 사이가 빈 겨울 나무를 좋아했다.
빈 가지 사이로 시선이 쑤욱 빠져나가는 그 느낌 때문이었다.
겨울 나무의 빈 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면
우리의 시선을 반기는 것은
그 뒤로 어지럽게 얽혀 있는 또 다른 빈 가지들이다.
그러나 봄엔 좀 다르다.
아직 가지 사이를 채우지 못해 여전히 핏줄처럼 선명한 빈 가지 앞에 서면
그 가지 사이를 빠져나간 우리의 시선을 이젠 푸른 빛이 반겨준다.
더 녹음이 짙어지기 전에 숲에 가보시라.
가지 사이를 빠져나온 우리의 시선을 반갑게 맞아주는 푸른 빛의 봄이 그 곳에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6일 하남의 고골에서 남한산성 북문으로 오르는 길에

물론 그 반대도 있다.
그때는 시선이 푸른 잎을 타고 그 너머로 너머간다.
그러면 지난 겨울에 비워놓은 빈 가지들이 까만 빛깔로 그 자리에 서 있다.
타고 넘어가는 푸른 빛이 더욱 푸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6일 남한산성 산성로터리에서 남쪽 옹성으로 가던 길에

이제 막 새순을 내민 나무는
아직 초록빛으로 촘촘히 채우지 못한 가지 사이를
여전히 지난 가을빛으로 채우고 있다.
그때면 뒤를 다 가리지도 못하면서 앞을 어른거리는 나무의 새순에서
마치 엷은 초록 안개의 느낌이 난다.
난 너무 짙어 뒤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한여름의 짙푸른 안개보다
뒤가 어른대는 초봄의 그 옅은 초록 안개를 더 좋아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서문에서 마천동으로 내려가던 길에

나는 나무가 땅밑에서 물을 길어올려 목을 축이고
그 시원함으로 푸르게 자란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위로 올려다보면 나무는 분명 하늘을 물처럼 시원하게 들이쉬고
그렇게 푸른 하늘을 한모금 마실 때마다 푸르러지고 있다.
그 나무 사이로 하늘이 강처럼 흘러간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7일 남한산성의 마천동 자락에서

하지만 땅밑이건 하늘이건 어찌 물만 퍼마시고 살 수 있으랴.
가끔 지나가던 구름이 가지에 걸려 달콤한 솜사탕을 선물한다.
아, 역시 솜사탕은 달콤해.
기분 전환을 위해 가끔 달콤한 걸 먹어주어야 한다니까.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7일 남한산성의 마천동 자락에서

또 먹기만 하고 어이 살랴.
삶에선 치장도 필수이다.
나뭇잎도 예쁘기만 하건만 사람들은 그 맨얼굴엔 별로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지나는 구름을 붙잡아 예쁘게 치장해야 한다.
분칠을 하자 푸른 잎을 내민 가지 끝에서 구름꽃이 하얗게 핀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7일 남한산성의 마천동 자락에서

달콤한 인생에 예쁜 치장을 더하면
삶이 저절로 즐거워진다.
이럴 때는 몸 한 번 비틀어 살짝 요염한 포즈 한번 취해보아야 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6일 남한산성 산성로터리에서 남쪽 옹성으로 가던 길에

봄숲의 잎들을 잎으로 보지 마시라.
사람들은 그 초록빛에 눈이 가려 그것이 꽃이라는 사실을 지나친다.
그러나 자세히 보시라.
잎들은 모두 초록빛 꽃이다.
모든 꽃은 피었다 지지만
잎으로 위장한 초록빛 꽃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는 여름내내 하늘을 푸른 빛으로 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6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의 바깥에서

나뭇잎은 꽃이기도 하지만 또 파도이기도 하다.
뭉쳐서 푸른 파도가 된다.
성을 향하여 푸르게 넘실댄다.
성은 그 푸른 파도를 방어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푸른 파도에 목을 축인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서문에서 마천동으로 내려가던 길에

나무가 푸른 잎을 이끌고 푸른 파도를 일으키면
나무 아래쪽 소로에 드는 것만으로
그 파도 바로 아래로 몸을 묻을 수 있다.
바람이 지나갈 때면 푸른 파도 소리가 몸을 엄습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7일 남한산성의 마천동 자락에서

그 나무 밑에 드는 길이 있다면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들과 함께 하늘 한번 올려다 보시라.
그것만으로 함께 나무가 된 느낌일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7일 남한산성 서문쪽 성곽 위에서 내려다 본 마천동 계곡

봄숲은 초록의 바다이다.
우리가 올라온 계곡을 따라 그 초록빛 바다가 일렁인다.
우리가 초록빛을 마음껏 호흡하며 그 속을 갈 수 있는 것은
숲의 바다밖에 없을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7일 남한산성의 마천동 자락에서

저녁 때가 되어 햇볕이 약간 기울어지면
나무 밑에서 올려다본 나무는 이제 푸른 등처럼 빛난다.
나는 나무들이 푸른 등으로 어렴풋이 밝혀주는 길을 따라 집으로 간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7일 남한산성의 마천동 자락에서

겨울나무의 빈 가지 사이로 초록빛 물이 차올랐다.
숲은 이제 초록 바다가 되었다.
새순이 초록 안개가 되기도 하고,
잎들이 꽃처럼 피면서 날아오르는 바다,
또 파도처럼 거대한 몸짓으로 일어나기도 하는 바다.
봄숲에 간 나는 그 바다 속을 거닐었다.
걷는 것이 헤엄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헤엄을 치는데 발바닥이 이렇게 아프냐고 투덜거렸다.
발바닥이 아플 때마다 바위에 앉아 쉬었다.
바위에 앉아 그 푸른 바다를 두 발로 텀벙거리며 헤엄친 시간이
꿈처럼 흘러갔다.

16 thoughts on “초록 바다 – 남한산성에서

    1. 아직 한코스를 못갔어요.
      정림마을에서 올라가는 코스라는데… 버스를 엉뚱한 걸 타는 바람에 일자산 돌아다니다 왔지 뭐예요. ㅋ

  1. 초록이 지천이구려~^^
    초록 나무 위로 뛰어내리면 푹신할 것 같수.
    이런 건 책으로 디자인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어. 조~오타!

    1. 일주일 내내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니…
      생전 처음인 거 같어.
      오늘도 짧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얻었어.
      왜 매일 보던 꽃이었는데 오늘은 달리 보이는가 모르겠다.
      내가 봐도 사진 참 조오타. ㅋㅋ

    1. 아무 곳이나 다 이런 풍경이 나오는 것 같지는 않구요, 남한산성을 동서남북으로 쏘다녔는데 주로 연주봉옹성과 서문 사이, 그리고 이곳에서 마천동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좋은 사진을 얻었어요.

  2. 아낌 없이 주는 나무 같으시네요
    사진과 글이 주는 풍요로움에 이번 봄이 황홀해요…
    똑같은 산에 가도 저는 보이지 않는데
    이런 풍경 담아 오시는 그 향기에
    감사하다는 말로는 모자라네요…
    푸르러 가는 숲을 가슴에 담으신 분이 진정 행복한 분이시겠죠…

    저도 나무들 가져 가도 되겠죠?

    1. 그럼요, 가져가셔도 됩니다.

      무거운 삼각대 메고 남한산성 오르며 찍은 덕분에 좋은 사진들을 건졌어요. 날씨가 협조를 해줘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데 딱 하루 협조를 하더군요. 날씨 때문에 마지막날 졸지에 걸음이 서문쪽 성곽 위에서 딱 멈춰 버렸어요. 기분 좋더라구요.

  3. 저두요..
    봄의 숲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게 담으셨네요.
    연두와 하늘색, 빛을 담은 잎색이 정말…
    산에 간들 이런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1. 열 걸음 오르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그러면 이런 모습을 즐길 수 있어요. 산에 오르는 시간이 다른 사람의 세 배는 걸리는 거 같아요.

  4. 음~^^ 너무 좋아요. 숲으로 달려가고 싶네요^^
    옹성가던길에 나무 사진같은 느낌 너무 좋아요.
    마천동 자락에서 같은 사진은 김동원님이 혹시 누워서 찍으신건 아닌가
    생각했네요.^^

  5. 아, 나무, 나무들, 초록빛 바다…
    넘실거리는 연한 잎들의 함성이 가슴으로 차오릅니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에 표현이 너무 빈약한… 빛처럼 부서지는 잎들의 향연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축복처럼 피어난 저들의 모습 앞에 왜 이리 부끄러운지요…
    나무 몇 그루 가져가도 되는지요.
    한참을 머무르다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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