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 그녀(물론 여기서의 대상은 그일 수도 있지만 그저 호칭이 그녀로 시작된 것은 단지 내가 만남의 대상으로 여자를 더 밝힌다는, 그리고 그 노골적 태도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을 뿐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 였다)와의 만남은 내게 있어 다른 만남과 마찬가지로 그녀 자체와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녀의 다른 것들에 대해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궁금해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아버지나 오라버니 중에 혹시 지금 권력의 핵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내 앞길의 출세에 큰힘이 되어줄 양반은 없을까 살펴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가 지금까지 돈은 많이 벌어 놓았을까 재지 않았으며 그녀의 얼굴이 예쁘거나 못난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결혼을 했는가도 관심밖이었다. 그녀가 유부녀라 했다해도 나의 마음엔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그녀가 좋아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의 만남 속에서 내게 그녀는 곧 그녀의 말이었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거의 모든 경우 얘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지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특히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녀가 말하는 대상들이 속속 속을 드러내며 투명하게 열린다는 환시에 접하곤 했다.
그것은 마치 이중섭의 황소란 그림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오래 전 나는 특별히 기획된 그의 전람회에서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림의 감상을 돕기 위해 마련된 설명에 의하면 중섭은 황소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아마 설명이 없었더라도 누구나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중섭의 그림에서 본 것은 황소가 아니라 황소의 힘이었다. 소들은 하얗게 드러나는 선들로 속을 그대로 보여주며 역동적인 힘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골에서 성장하고 자랐던 내가 어렸을 적 경험했던 황소의 힘 그 자체였다. 그림은 선명한 색조를 버리고 한없이 많은 색깔들이 섞여든 둔탁한 색조를 보여주고 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 둔탁함 속에서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취가 배어나고 있었다. 저 짐승이 살았던 인고의 세월을 겹치고 겹치면 바로 저런 색깔이 되리라. 한해 두해 그 세월의 기나긴 시간이 섞여들어 황소의 색조는 저렇게 부드럽게 무마되었으리라. 중섭의 황소는 그래서 더더욱 경이로왔다. 어떻게 저런 부드러움으로 무마된 색조 속에서 금방이라도 대지가 소의 뒷굽에 밀려 겹겹의 흙덩이로 두텁게 벗겨질 것 같은 힘의 생동감을 표출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날 그렇게 중섭의 그림에서 황소의 힘과 그 짐승이 살아온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 그림을 보며 그렇게 투명하게 보여줄 내 사랑을 꿈꾼 기억이 있다. 나도 내 사랑을 그렇게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황소의 힘처럼. 그러나 그 꿈은 논리와 분석의 힘을 크게 믿었던 내게 있어 걸어갈 미래가 너무 애매하고 불투명하여 길을 열기 힘들어 보였고 그리하여 그 꿈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역시 내게 있어 그것은 인연이 아닌가 보다는 방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만나기 시작한 그녀의 말이 바로 내가 꿈꾸던 것이었다.
그녀의 말은 그냥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속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홍대 앞’을 지나며 그녀가 ‘장미꽃’을 가리켰을 때 나는 그 꽃이 “열매도 없는 게 한량없이 붉”은 색을 지닌 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울러 그 빛깔이 “시퍼런 가시들을 들고/얼마나 멀리까지 가서/구걸해온 빛깔”(장석남, 「風笛 5」)인지 아느냐는 얘기를 들었으며, 그리하여 그 빛깔의 속내력을 처음으로 듣고 볼 수 있었다.
어느날 상점 앞에서 잠시 머물던 순간도 그런 기억의 한때를 점하고 있다. 그날 나의 눈엔 그냥 상인이 하늘의 검은 구름을 올려다보던 것밖에 달리 시선에 들어온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는 아무렇지 않았지만/상인은 눈빛을 거둬가는 구름떼를 고려해야/했다”(성윤석, 「아무 일도 하지 않기 위한 산책」)고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상인들의 장사는 날씨에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 그의 입장에서 그는 그냥 구름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구름떼는 그의 눈빛을 거둬갈 정도로 큰자력을 갖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날 나는 그렇게 하여 구름의 자력을 볼 수 있었다.
기억을 뒤지면 그녀와 함께 강변에 섰던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길이 끊겼다고 느꼈다. 처음엔 그녀도 나의 느낌에 동감하는 눈치였다. “걷고 걸어와/강변에 이르렀을 때/모래들판은 흐지부지/강물에 잠겨 들어가고/무언가 좀더 확실한 것/그럴듯한 구조물 하나 서 있지 않고/흐지부지 모랫벌처럼 없어지는 것”이 강변에 선 우리들의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그렇게 길은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한 어른이” 저어가는 “나무배” 한 척을 보았다. 길이 없으니까 배를 타고 가야겠지. 나무배가 촉발시킨 내 생각은 그렇게 단순하고 짧은 문장으로 요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았는지
수초 사이 애들이 버렸을 상자곽을 떠내며
편안한 모습의 한 어른이 와서
흐지부지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모래들판의 길을
삐걱이며 나무배에 싣고 간다
─이진명, 「강변에 이르렀을 때」 부분
그 순간 나의 눈엔 길을 싣고 강을 가고 있는 배가 보였다. 그것은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을 어느 한쪽으로 구속하다 강변에서 끊겨버린 지상의 길이 아니라 스스로가 여는 새롭고 자유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대상의 속을 보여주는 그녀의 말은 환시적 측면이 매우 강하여 나의 시선을 앗아가는 한편으로 나로 하여금 의심의 촉각을 예민하게 세워두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의 말이 펼쳐보이는 투명한 삽화 속으로 빠져들다가 매번 이것이 무슨 사람을 현혹하여 속이는 요상한 환상이 아닌가 몸을 화들짝 떨곤 했다.
물론 그녀의 말이 항상 곧바로 투명함을 드러냈던 것은 아니다. 때로 그녀의 말은 거의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였으며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가 흘리는 말의 매력과 그 깊이에 빠져들어 갔으며 때문에 그녀를 만날 때면 곧장 우리들의 주변으로 대양의 푸른 물결이 펼쳐졌고 나는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마치 고기를 좇는 어부와 같은 처지가 되어야 했다. 그녀의 말은 입을 나서는 순간 곧장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대양─그 대양은 은유의 바다라 불리었다─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되었으며 빛나는 꼬리 지느러미를 흔들며 바다를 헤엄쳤다. 나는 그 고기를 낚아올리려 낚시줄을 드리웠으며 때로 고기들은 내가 드린 낚시줄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몇시간의 밀고당기는 싸움 끝에 뱃전으로 그 몸을 드러냈고 그런 날이면 나는 며칠간의 허기를 그 맛난 고기로 배부르게 채울 수 있었다.
더더욱 신비로운 것은 그렇게 잡아올린 고기의 살을 발라 배를 채우고 난 뒤끝이었다. 나는 이제 생명이 다한 그 앙상한 뼈다귀를 아무 미련없이 바다속으로 던져버리며 천천히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침몰의 순간을 여유롭게 즐기려 했지만 나의 눈을 채운 것은 부정형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서서히 내려앉는 아주 느린 추락의 움직임이 아니라 동공의 크기를 서너 배쯤 확대시키는 큰 놀라움이었다. 다시 물 속으로 놓여난 그 뼈다귀에 금방 다시 살이 올라 대양을 헤엄쳐가는 놀라운 장면이 바로 그 확대된 동공 속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 나의 그 환상 낚시는 아무런 소득없이 배만 뒤집어 놓기 일쑤였으며 그런 날 짠 바닷물을 서너 말 쯤 들이키고 간신히 뭍을 올라온 뒤끝에서 나는 분명히 눈에 보이는데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대양의 물고기들로 인하여 더욱 심한 갈증을 앓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은 강하고 깊어서 한번 그 만남의 연을 맺은 이후로 나는 발을 빼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세계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며 특히 그녀의 말에 내 눈은, 마치 말이 곧장 둔갑을 부려 시선에 어떤 풍경을 보여주기라도 하는양, 온통 초점을 모으고는 넋 나간듯 매료되어 그녀를 쳐다보다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를 만나 나는 좀 특이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집’과 ‘사랑’ 얘기였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른다. 그것이 무슨 특이한 얘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연유는 그녀의 얘기를 다 전한 후에 덧붙여질 것이다.
2
그녀의 얘기는 “글자”가 자기의 “집”이란 것이었다. 지금에야 밝히지만 그녀는 시인이었다. 그러니 어찌보면 글자가 그녀의 집이란 얘기는 당연한 것이다. 그녀의 집 얘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종이 위에 나를 한 자 한 자 새겨넣는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부분(p.11)
나: ‘쓴다’가 아니라 ‘새겨넣는다’고?
내가 이렇게 묻자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이렇게 답하고 있었다.
그녀: 그렇다. ‘쓴다’는 말은 시인에겐 부적절한 말이다. 그 말은 시인이 시를 쓸 때 시에 싣게 되는 시인의 무게를 드러내지 못한다.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새겨 넣는 것이다. 마치 조각가처럼. 조각가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쇳덩이에, 돌에, 나무에 어떤 형상으로 새겨 넣음으로써 작품을 만든다. 무게를 싣지 않으면 그들은 어떤 형상도 새겨넣을 수 없다. 그들의 무게가 실리면서 그 밋밋하던 2차원의 표면이 3차원의 형상으로 뒤바뀌고 작품으로 구체화된다. 아니, 그 무게가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형상의 변화가 아니라 그 형상의 변화에 필연적으로 뒤따라가는 어떤 의미일 것이다.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엮어낸 시들은 하얀 백지 위에 까만 글자들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그 2차원의 공간이 갖는 전달력의 한계에 막혀 형상의 변화와 그에 따라 생성되는 어떤 의미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시를 만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2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형상을 갖춘 3차원의 세계이며,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미래로 마음대로 이동하고, 또 이미 구축된 형상마저 끊임없이 새롭게 뒤바꾼다는 측면에서 무한한 다차원의 세계이다.
그녀의 얘기는 계속된다.
나는 이리저리 흐트러진 나의 육체를 끌어모아 글자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꽉 닫는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부분(p.11)
나: ‘흐트러진’ 육체? 아주 야한 상상을 촉발시킨다. 아메바처럼 자기 분열을 하는 것도 아닐테고, 그렇다면 당신은 혹시 자유주의자인가. 그 자유를 유독히 성적 즐거움을 탐닉할 때, 세상의 곱지않은 시선을 막아내는, 유용한 방패로 사용함으로써, 옛부터 이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가부장적 도덕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행실이 바르지 못한 그런 여자의 낙인을 받아둔 것은 아닌가? 그런 자신의 행위를 시의 이름 아래 하나의 예술로 포장해보려는 것이 혹시 당신의 숨은 욕망은 아닌가? 그것이 혹 당신에게 있어 시의 효용이 아닌가?
그녀가 피식 웃는다. 아마도 약간의 기분나쁜 질문으로 성깔을 돋구어 놓아야 그녀가 더욱 적나나하게 자기를 보여줄 것이란 나의 뻔한 의도를 눈치 챈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웃음, 그리고 그 앞에서 제풀에 스스로를 꺾은 나는 나의 불순한 의도를 포기하고 다시 그녀의 눈으로부터 대답을 듣는다.
그녀: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남들에게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당신이 그렇게 잘났다고 생각하는 문학평론가로? 아니면 당신이 운영하는 그 숲과 나무란 출판사겸 편집 회사의 사장으로? 또는 당신의 아내인 조기옥의 남편으로? 당신은 왜 그렇게 흩어져 있는가? 그렇지만 당신의 이름 석자는 어떤가? 이름 석자로 당신을 모두 전할 수는 없지만 그 이름 석자는 당신이 내세웠던 다른 것들에 비하여 흩어져 있던 당신을 모아준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내가 시를 쓸 때 목표로 하는 것도 그와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나는 흩어져 있는 나를 모아 나를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나를 말하려 할 때 내가 종이에 새겨넣을 수 있는 나, 곧 글자들은 수없이 많다. 여자, 아내, 딸, 어머니 등등. 나의 육체를 어느 한 글자에 담는 순간 나의 육체는 다른 글자들로 넘쳐나려고 자꾸 뚜껑을 밀어올린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정하고 한 글자에 나를 담는 순간 급하게 서둘러 뚜껑을 닫아버린다.
한 글자 한 글자 씌어질 때마다 한 치 한 치 오그라드는 내 육체는 수천 수만 가지 글자들로 다시 태어나고
새로 만들어지는 글자들마다에 나의 육체는 자신의 새로운 집을 짓는다
나는 수만 채의 집을 거느리고 산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부분(p.11)
나: 시도 자기 표현의 일종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를 표현할수록 오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더욱 풍요롭게 드러낼 수 있는 확대된 지평 위에 설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만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닌가? 알라딘의 마술램프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를 너무 좋아해서 스스로를 그와 착각한 것은 아닌가?
그녀: 당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 스스로를 표현한 말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아니겠는가? 사람들도 흔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아마 나를 모두 알게 된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알게될 것이라고. 말은 그렇게 이중의 얼굴을 가진다. 그것은 무엇을 표현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말이 지닌 표현의 한계 때문에 사실은 대상을 삭제하고 왜곡시킨다. 무한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알라딘의 마술 램프를 빠져나갈 수 없었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시인은 글자를 자신의 거처로 가지고 있지만 그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을 오그리고 줄여야 한다. 시인들은 바로 지니의 요술 램프처럼 작은 글자의 공간을 집으로 거느리고 그 속에 산다. 거대한 몸집의 지니가 몸을 오그리고 줄였듯이 글자 속으로 들어갈 때 시인의 육체도 삭제되고 축소되고 또 분열된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우수의 슬픈 그늘이 쓸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즈음 내 육체는 “이 안은 왜 이리 어둡고 갑갑한가?”라고 말한다
나는 공들여 지은 내 집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부분(p.11)
그녀의 슬픈 표정에 휩쓸려 나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만다.
그녀: 오호, 당신마저 슬픈 표정인가? 당신도 슬픔을 아는가? 하지만 상관없다. 이건 나의 운명과도 같은 슬픔이다. 세상 사람들이 범죄와의 전쟁이니 뭐니 떠들지만 시인들은 육체와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것을 살을 빼기 위한 전쟁이 아니다. 바로 글자를 통한 표현의 세계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그리하여 자신이 거처하던 글자의 집이 좁다고 느껴졌을 때 그냥 나의 육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는 욕구와의 싸움이 그것이다. 그것은 시의 욕망이 아니라 사실은 시의 한계를 육체로 극복해보고자 하는 몸의 욕망이다. 몸의 욕망이 일어나는 곳에 시는 없다. 글자는 시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필요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늙어 눈이 어두워진 도장공처럼
나는 지금 끙끙대며 나를 글자 속에 구겨넣으려 안간힘 쓴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부분(p.11)
그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시란 자연스럽게 씌여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들이 호소하게 되는 것이 바로 강제력이다. 그 순간 새겨넣는 작업이었던 시 만들기는 구겨넣는 작업이 되고 만다. 다같은 인공물이지만 새겨넣어 만들어놓은 작품의 세계는 자연스럽고, 구겨넣어 만들어놓은 작품의 세계는 부자연스럽다. 발레리너의 동작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발끝을 세워 자신들의 걸음걸이를 만든다. 그것은 사실 아주 불안하고 또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런 걸음걸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그것을 자연스런 시선으로 감상한다. 그렇지만 지금 당신이 한번 발끝을 세우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보라. 아하, 그만 둬라, 그만둬. 지켜보는 내가 더 불안하고 위태하다. 당신이 발끝을 세웠을 때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던 것은 바로 당신이 그런 걸음걸이를 발끝으로 구겨넣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발레리너는 발끝을 세울 때 발끝으로 그들의 걸음걸이를 새겨넣는다.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접할 수 있는 올림픽의 체조 선수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발레리너의 동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세월 연습하여 다듬어낸 그 인공의 동작에서 어떤 자연스러움을 느끼고 그에 경탄한다. 그들의 동작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인공미의 걸끄러움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번에도 다시 한번 당신이 철봉에 매달려 그들의 동작을 흉내내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공중 회전을 한바퀴도 돌기 전에 벌써 우스꽝스럽고 그러면서도 위태하고 또 너무 걸끄러운 자세로 바닥에 코를 박으며 떨어졌을 것이다. 물론 경탄은 아닐지라도 한순간 사람들에게 웃음은 선사할 수 있었겠지. 무엇인가를 구겨넣어 만들었을 때의 결과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은 이제 눈치채었을 것이다. 시인이 욕망하는 시의 세계를.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연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자연으로 혼동할만한, 그러면서도 그가 자신의 손으로 깎고 다듬어 만들어낸 인공의 세계이다. 그 세계가 좌절될 때 시인은 구겨넣어서라도 그런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 앞에 놓인다. 내가 지금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처음 그녀의 집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집에 대한 그녀의 내면적 갈등이나 고민의 토로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관련하여 아주 긴 방황의 여정을 갖고 있었다. 얘기는 자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3
그녀에게 있어 글자는 단순한 시의 질료가 아니라 그녀가 거주하고 살며 안식을 구하는 그녀의 ‘집’이었다. 이미 들었던대로 그 집은 “비좁은 집”이었다. 그것은 작고 한계가 있는 집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속의 방에 담을 수 있었다.
작지만 나를 다 받아주었던 방
─「글자 밖에서」 부분(p.18)
“글자들로 내 살갗을 삼고 옷을 삼”(p.12)을 정도로 그녀의 삶은 곧 글자와 함께였다.
……내 청춘의 전반에 걸쳐 나는 글자의 길고 긴 협곡을 지나왔으며 그곳의 공기를 숨쉬며 살아왔다……
─「글자 밖에서」 부분(p.56)
글자들도 그녀의 믿음에 값했다.
글자들은 한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었지만 또한 그 어떤 것도 내게서 글자들이 차지한 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글자 밖에서」 부분(p.20)
하지만 어느날 그녀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 외출을 결심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글자들의 세계가 자꾸 무서워진다
이 무서워지는 세계에서 또다시 글자를 배태해야 한다는 것, 더 많은 글자의 식구 글자의 세간을 끌어모은다는 일, 그만둘 수도 없지만 그만두어야 할 것 같은
종이 안을 빙 둘러본다
내가 들고나는 집 내가 아끼는 세간들 이것들에서 눈을 떼지 못해 나는 얼른 밖을 나서지 못한다 이 애착은 위태롭다
─「많은 글자들이 지워졌다」 부분(p.38)
그녀의 걸음은 그 ‘애착’을 뿌리치고 “글자 밖 출입”으로 이어지며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끊어버리기에 이른다.
나는 글자라는 비좁은 집을 나왔다 아니, 글자 밖 출입이 잦아지더니 어느 날인가부터 들어가지 않았다
─「글자 밖에서」 부분(p.18)
그녀가 바깥 세상을 탐닉하게 된 것은 “글자 밖의 풍요” 때문이었다. 그 풍요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공간이 “작지만 나를 다 받아”(p.18)준다면 그것은 곧 크다와 다를바 없는 같은 뜻을 이루며 풍요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의 집, 곧 글자의 세계에 그녀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데 힘겨움을 느낀다. 시가 그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아닐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잘 들어가지 않는 그녀의 몸을 글자의 집 속으로 구겨넣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렸다. 그녀의 모든 것을 다 받아줄 때 풍요로움은 집의 몫이었으나 이제 풍요는 집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커진 몸집’에 어울린다. 그리하여 그녀가 집을 나간 것은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내 커진 몸집의 풍요를 맛본 내 육체가 더 이상 좁은 집에 살려 하지 않”(p.11)았기 때문이다.
그 글자 밖, 그러니까 육체가 풍요로운 세상에서 이제 그녀는 “뜻밖의 당신과 만”(p.12)나 사랑을 나눈다. 글자 밖 세상에서 우리들 서로는 의미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친다. 가령 오늘 또다시 떠오른 아침의 태양에서 희망을 읽었다면 그것은 마음의 문을 통하여 대상을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몸으로 부딪쳤을 때 그곳엔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뜨고 지는 자전과 공전의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글자의 안과 밖으로 경계선을 그었을 때 의미가 안의 세계라면 바깥은 그렇듯 몸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몸으로 만난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맨살의 육체”이다. 때문에 그곳에서 “사랑은 해묵은 성기를 꺼내어 마주 부비”(p.14)는 일이다.
그 사랑은 벽에 부딪친다. 글자라는 그녀의 집 속에 그녀를 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육체를 그녀의 육체 속으로 담아두는 것은 아예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맨살의 육체를 당신이 고스란히 안아주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의 품에 안겼다 내 육체가 당신에게 안착함으로써 당신을 있게 한 이 세상에 내가 안착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다른 육체와 그 육체가 가져올 다른 인생을 내 육체와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를 안아준 당신의 육체도 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랑」 전문(p.53)
또 하나, 그녀가 오래 전에 살았던 글자의 집은 매일 새롭게 거듭날 수 있지만 글자 밖 세상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변화와는 거리를 멀리하고 있다.
보고 만지는 것들마다 낡아지게 하고야 마는 눈의 나쁜 버릇이여 손끝의 박덕함이여, 그침 없이 가 닿는 내 눈길과 손끝에서 군말없이 낡아가고 있는 당신
─「사랑」 전문(p.60)
이제 그녀의 사랑은 흔들린다. 균열이 간 그 사랑의 틈새를 들여다보면 그녀가 버리고 나왔던 그녀의 집, 바로 글자들에 대한 기억이 그 틈새의 간극을 벌리고 있다.
한때 집을 버렸던 그녀에게 이번엔 육체로 온 사랑이 같은 운명에 놓이고 만다.
그녀의 사랑은 이제 어찌 되는 것일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닥친 이 사랑의 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이 좁다고 느꼈던 글자의 집으로 돌아와 그 해답을 찾고 있었다. 예전과 똑같은 운명적 싸움을 벌이며 육체로 온 사랑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글자 속에 당신을 가둔다
글자 하나에 당신의 얼굴을
글자 하나에 당신의 목소리를
글자 하나에 당신의 손목을
글자 하나에 당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그 마음을 잡아둘 수 없는 당신을
글자 속에 꽁꽁 가둬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종이 위에 함께 살게 하려고
종이 위에 깨알 같은 글자들을 쓴다
써도 써도 글자 밖으로 비어져나오는 당신을 쓴다
─「글자 속에 당신을 가둔다」(p.26)
그렇게 한때 “세상에 새로이 눈뜨”며 글자 밖 세계를 ‘풍요’롭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그리하여 집을 버렸던 그녀가, 어느새, 다시, 글자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집을 떠날 때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녀가 “원할 때면 언제든 다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면서/빼꼼히 문을 열어두”(p.18)었기 때문이다. 그녀 “앞에 언제나 너그럽게 열어둔 문인양 있는” 그 글자의 집 앞에서 “지금은 왠지 다시 열고 들어가기가 두려운” 마음으로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그녀 “안의 상반된 갈망”(p.43)을 딛고 다시 글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한동안은 글자 밖을 나섰을 때 “풋풋한 공기에 숨이 트”였고 “풋풋한 당신이 마냥 싱그러워 내 글자 속에 살아온 날 전부가 쓸쓸”(p.21)할 정도였다. “글자 밖은 넓고” 그녀는 “좀더 평화롭게 좀더 가볍게” 그녀의 “생명에 베푸는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 “신선한 공기가 도리어” 그녀를 “병자로 만”(p.56)들었다. 글자 밖의 세계에 탐닉할 때 그녀는 “육체 안에 암매장된 글자들의 원혼”(p.51)에 시달리며 밤을 뒤척여야 했다.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글자의 산소 마스크”(p.56)였다. 결국 길을 잘못든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글자 밖의 세계는 길을 찾을 수 없는 어지러운 세계였다. 그녀가 그 어지러움 속에서 갈 곳을 잃었을 때 황망한 그녀의 발걸음 앞에서 그녀의 기다림에 답한 것은 바로 글자의 집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자신이 떠났던 글자의 집, 바로 그 앞에 서 있었다.
글자 밖엔 가면 갈수록 넓어지지만 미로 만들기를 잊지 않는 길의 횡포가 계속된다
나는 어디로도 성큼 가지 못하고 두려움만 안은 채 여기 서 있다
글자의 더 큰 문이 내 앞에 열리기를 기다리며
─「글자 밖에서」 부분(p.19)
그리고 이제 그녀의 집을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사랑을 함께 볼 수 있다.
종이 밖에서 당신을 사랑했지만 종이 안에 당신을 남긴다
─「종이 안에 내 생을」 부분(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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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집과 사랑 얘기가 가졌던 가장 큰 매력은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그녀의 얘기가 그녀의 시선, 즉 그녀의 시각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세계관을 완결된 모습으로 보여준데 비하여 오늘의 그녀는 그런 세계의 구축을 둘러쌓고 벌어지는 그녀의 삶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건축가의 완결된 작품과 건축가가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구별선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지금까지 들려준 얘기는 모두 완결된 작품이었던 반면 오늘 그녀의 집과 사랑 얘기는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그녀의 말이 다듬어져 하나의 완결체로 모양을 갖추어 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그녀의 삶이 어떤 길을 걸어갔는가를 함께 보여주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은 완결된 작품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한편으로 작품을 둘러싼 시인의 삶과 그곳에서 겪은 고뇌, 갈등에 대해서도 많은 흥미를 가진다. 그녀의 얘기는 바로 그런 관심에 답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아주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었다.
(『시와 사상』, 1996년 가을호)
*이 글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는 이선영의 시집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문학과지성사, 1996)에서 인용한 것이며 페이지를 덧붙여 놓았다. 하지만 앞부분에 나온 장석남, 성윤석, 이진명의 시는 다음 시집에서 인용되었다.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1991.
─성윤석,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문학과지성사, 1996.
─이진명,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
4 thoughts on “시인의 집과 사랑 ─ 이선영 시집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흠, 글 길다고 내리 이틀용인가요?
지각이려나요, 결석이려나요^^
오랜만에 12시 땡 맞춰 왔더니
유리구두가 안 떨어져 있어서
허탕 치고 그냥 갑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신데렐라가 왕자님한테 홀딱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나 봐요. ㅋㅋ
시인에게서의 글자는 ‘집’이라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새겨봅니다.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새겨 넣는’ 행위, 예리한 펜이 가장 얇은 종이 위에서 가느다란 선을 그으며 글자를 새기고 있는 느낌이 드는군요.
글자들이 편안하게 휴식하고 쉬는 공간, 집, 그곳에 초대되어 오래 머물다 갑니다.
집은 세상과 나의 고요한 휴식처라는 글이 문득 떠오르는군요.
비단 시인들 뿐만 아니라 글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처 구실을 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일기도 알고 보면 부대끼던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이 그때 숨을 다듬으며 휴식을 취하던 순간일 수 있으니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