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에 나의 봄은 매해 진달래가 가져다 주었다.
이른 봄에 산을 오르다 만나는 진달래는
그 여린 분홍빛 꽃으로 종종 내 시선을 앗아가곤 했다.
그러나 꽃은 항상 그렇듯이 내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올해 진달래가 질 때쯤
지는 꽃이 아쉬운 그 자리에서
나는 진달래의 푸른 잎을 만났다.
남한산성 산자락을 오르다 진달래를 만난다.
길의 좌우로 늘어서서 나무 사이로 몸을 감춘 듯 만 듯 내놓고는
분홍빛 눈빛을 흘리며 슬쩍슬쩍 나를 엿본다.
꽃의 유혹이다.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
저녁빛을 머금은 진달래꽃이 반짝거렸다.
저 꽃들을 며칠 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꽃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눈을 돌려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초록빛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진달래 꽃의 뒷편으로도 초록빛 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사실은 가지에서도 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맨 위로만 꽃을 남겨둔 진달래는
이제 그 아래쪽을 모두 푸른 잎사귀로 채워놓고 있었다.
살펴보면 잎사귀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푸른 지저귐이다.
아직 꽃을 보내지 않은 진달래는
위로는 분홍빛 노래를, 아래로는 푸른 지저귐을 두고
혼성 이중창으로 화음을 맞춘다.
꽃이 가는 것을 아쉬워했는데
그 자리에서 잎사귀가 푸른 노래를 일으키고 있었다.
꽃을 모두 보낸 진달래는
이제 잎사귀의 푸른 화음 만으로 소리를 가다듬는다.
푸른 화음이 길에 낮게 깔린다.
노래가 발아래로 흐르는 경험은 난생 처음이다.
하지만 혼성으로 함께 부르던 노래를 잊을 수가 없었나 보다.
하나 남은 분홍빛 꽃의 노래를 맨앞에 내세우고
푸른 빛의 잎들이 작은 소리로 코러스를 넣는다.
잎들이 항상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노래를 잠시 쉬고 그냥 한데 모여 왁자지껄 떠들기도 한다.
내가 시끄럽다고 손가락을 입에 모아 쉬~이 했으나
그 수다는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두빛 수다는 참을만했다.
진달래 잎들이 노래부르자
어느 나무에서 잎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며 춤을 추었다.
잎들이 노래하고 춤추자 새가 갑자기 무색해졌다.
아니, 지들이 무슨 새인 줄 아나.
새는 진짜 노래 실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목청을 뽑았다.
진달래 잎도 지질 않는다.
3옥타브 넘도록 목소리를 높게 뽑아올린다.
저렇듯 소리없이 조용하게 3옥타브를 넘는 노래는
진달래 잎이 아니면 불가능하리라.
진달래의 잎사귀는 그렇게 푸른 노래였다.
달걀 대신 햇볕 알갱이를 목안으로 털어놓고
경쾌하고 발랄하게 노래를 불렀다.
때로 노래는 그렇게 귀가 아니라 눈으로 온다.
진달래 잎사귀가 노래를 부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 푸른 노래는 봄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노래는 봄이 무르익고 있다고 노래한다.
진달래 잎들이 부르는 노래와 함께 올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8 thoughts on “푸른 지저귐”
트랙백 따라와서 이 글을 다시 읽어요.
역시 시인들 끼리는 통하는 게 있으시군요.
3년 전에 이미 꽃이 지고 난 자리에서 피어나 노래하는 푸른 지저귐이
이 우울한 날씨조차 싱그럽게 만들어 버리네요.
아, 그리고 밑에서 다섯 번째 사진은 제가 이 블로그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고, 한 번 빌려다 쓰고보니 저 사진이 때때로 제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요. 털보님은 마음을 찍는 사진기를 가지고 계신 게 틀림없어요.^^
꽃들을 보낸 뒤 끝에서 푸른 잎을 일으켜 세상을 다시 열고 계신 라리님.. 힘 내길요.
제가 남자라면 진달래꽃같은 여자를 사랑했을거에요.^^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하고 순박해보이는 웃음을 띄는 여자.
정말 진달래 잎들이 아기새들의 부리같아요.^^
오늘 산을 가다 보니
꽃뿐만이 아니라 잎의 노래도 즐길 수 있는 기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이제는 완연한 잎이더군요.
생활은 길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간은 짧은 듯…
진달래가 꽃으로 필 때에만 진달래인 줄 알았어요
이제는 진달래 잎을 알아 볼 수 있을 듯 해요
진달래 위의 새의 모습과 노래 불러 주는 그 마음
이렇게 숲 속의 보듬어 주는 마음으로 진달래는
내년에도 찬란하게 봄을 수놓을 거에요
사진과 글이 푸른 오월을 장식하는 선물 같이 좋네요…^^*
잎이 꽃못지 않은 듯 합니다.
매년 꽃에만 눈을 주다가 올해는 잎을 발견했네요.
진달래는 푸른 노래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군요.
눈이 부시도록 푸른 잎들의 향연…
오늘은 마음이 초록 물결로 가득차오릅니다.
노래가 눈으로 들려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아침에…
어제도 남한산성에 갔었는데
이젠 잎으로 꽃을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더군요.
남한산성에 의외로 진달래가 많았어요.
마치 진달래의 추억 속을 걷는 기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