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이민하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을 읽고 있었다.
시집을 읽다 창으로 마당을 내다본다.
담벼락의 담쟁이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해 나의 그녀가 심어놓은 것이다.
가파른 담벼락을 조금씩 조금씩 기어오르던 담쟁이가
근래에 드디어 담벼락 끝에 이르렀다.
훌쩍 담장을 넘어
궁금하던 바깥을 여기저기 흘낏거릴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담장을 넘어가지 않고
요 며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걷던 그녀는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이민하, 「시간의 골목 ─담장엔 눌어붙은 나비들 」 첫 구절
읽고 있던 긴 시 속에서
첫 구절이 시를 슬쩍 빠져나가더니
담벼락을 타고 오른 담쟁이 옆으로 가서
그곳이 자기 자리라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구나.
시가 시를 빠져나가 세상의 풍경 속으로 가기도 하는 구나.
담쟁이 옆으로 도망나간 시의 첫 구절을 그대로 방치한채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가파른 오르막 길 끝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어간 담벼락의 가파른 길에
푸른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녀의 푸른 발자국,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4 thoughts on “담쟁이 옆으로 간 시 구절 – 이민하의 시를 읽다가”
담장을 선뜻 넘어가지 못하네요.
잡아주길 기다리며 엉거주춤 서 있나 봅니다.
저랑 눈맞아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요? ㅋㅋ
멋집니다.
푸른 발자국.
담벼락을 넘지 않는 담쟁이의 끝에서
그녀의 푸른 발자국을 보는 시선.
귀여운 여인일 듯… 저렇게 약간 삐뚤삐뚤 걸어간 것을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