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옆으로 간 시 구절 – 이민하의 시를 읽다가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6월 27일 집의 담벼락에서


새로 나온 이민하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을 읽고 있었다.
시집을 읽다 창으로 마당을 내다본다.
담벼락의 담쟁이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해 나의 그녀가 심어놓은 것이다.
가파른 담벼락을 조금씩 조금씩 기어오르던 담쟁이가
근래에 드디어 담벼락 끝에 이르렀다.
훌쩍 담장을 넘어
궁금하던 바깥을 여기저기 흘낏거릴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담장을 넘어가지 않고
요 며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걷던 그녀는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이민하, 「시간의 골목 ─담장엔 눌어붙은 나비들 」 첫 구절

읽고 있던 긴 시 속에서
첫 구절이 시를 슬쩍 빠져나가더니
담벼락을 타고 오른 담쟁이 옆으로 가서
그곳이 자기 자리라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구나.
시가 시를 빠져나가 세상의 풍경 속으로 가기도 하는 구나.
담쟁이 옆으로 도망나간 시의 첫 구절을 그대로 방치한채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가파른 오르막 길 끝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어간 담벼락의 가파른 길에
푸른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녀의 푸른 발자국,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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