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엔 역이 세 개 있다

왕십리엔 역이 세 개나 있다.
둘은 땅밑에 있고, 하나는 땅 위에 있다.
금호동의 응봉산을 온통 개나리가 뒤덮을 때쯤
나는 그 세 역을 차례로 거쳐 개나리 사진을 찍으러 간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5일 지하철 5호선 왕십리역에서


나는 먼저 지하철 5호선을 타고 나가 왕십리역에 내린다.
5호선의 왕십리역은 땅밑에 있다.
그 역은 열차가 들어오는 길을
또 한겹의 문으로 막아 꽁꽁 밀봉해 두었다.
사람들은 그저 열차가 들어온다는 방송이나
기차 바퀴의 소음에 기대어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짐작한다.
사람들은 밀봉된 스크린 도어의 바깥에서 우두커니 서거나 앉아서
그저 문이 열리기만 기다린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5일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에서


나는 5호선의 왕십리역에서 내려
2호선의 왕십리역으로 간다.
2호선의 왕십리역도 땅밑에 있다.
하지만 아직 기차가 다니는 길은 밀봉해 두지 않았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저만치 들어오는 기차를 눈으로 마중할 수 있다.
기차가 어둠 속을 더듬거려 길을 찾으며 역으로 들어온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3월 30일 국철 왕십리역에서


2호선의 왕십리역을 거친 나는
국철의 왕십리역으로 올라간다.
그 역은 땅위에 있다.
원래 이 역의 철로는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번에 들러보니 위쪽으로 도로가 났는지
어두컴컴하게 지붕으로 덮여있다.
그렇지만 바깥은 온통 햇볕이 지천인 땅위의 세상이다.
눈에 불을 켜고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들어오는 땅밑의 지하철과 달리
이곳의 열차는 마치 하얀 빛의 물결을 타고 항구로 들어오는 배처럼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왕십리엔 역이 3개 있다.
하나는 땅 위에 있어 빛들이 하루 종일 역을 기웃거리고
둘은 땅밑에 있어 빛들로부터 밀봉되어 있다.
또 땅밑의 그 둘 중 하나는 또 한겹의 문으로 다니는 길마저 밀봉해 놓았다.
우리는 자꾸자꾸 막고 밀봉해 놓아야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으로 가고 있다.
난 밀봉된 5호선의 왕십리역에 내려 2호선의 왕십리역으로 가고,
그곳에서 국철의 왕십리역으로 가 열차를 바꾸어타고 금호동의 응봉산으로 간다.
개나리를 만나러.

4 thoughts on “왕십리엔 역이 세 개 있다

    1. 개나리 찍으러 갈 때는 항상 국철 왕십리역을 선택하게 되더군요.
      다음엔 자전거 타고 가볼까 생각 중이예요.
      한강의 바로 곁이라 얼마든지 가능하더라구요.

  1. 개나리양을 만나기 위해서, 지극정성이셨군요^^

    지난 주말에는 왜 그렇게도 지하철이 타기 싫던지,
    상봉에서 종로 나가서 집에까지 돌아오는데
    꼭 한시간 반 걸렸어요. ㅋㅋ

    신데렐라 블로그, 요즘 예약의 재미에 쏙 빠졌어요.
    요런 즐거움이 있는 거였어요*^_^*

    1. 역은 다 거쳐가는 거지만
      그게 눈에 들어오는 날이 있는거 같아요.
      말하자면 눈에 훤히 드러나 있어 더 못찾는 비밀 같은 걸 찾아내는 날이랄까.
      글이 자주 올라오니 아주 좋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