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판단

Illustrated by Kim Dong Won

항상 섣부른 판단이 문제이다.
밥을 먹고 있는 데
그녀가 찌게 그릇을 갖고 간다.
그녀는 내가 밥숫가락을 놓기도 전에
몇 번 반찬 그릇을 미리 치운 적이 있었다.
-어, 아직 다 안먹었네.
반찬 그릇을 가져가거나 뚜껑을 덮으며 그런 말을 한마디 건네곤 했었다.
-다 먹었는데, 뭐. 이거하고 해서 먹지 뭐.
반찬을 다 치우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그냥 있는 반찬으로 나머지 밥을 먹곤 했다.
찌게를 가져간 날도 마찬가지여서 반찬은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무 말도 없이 그릇을 집어들었다.
그래서 또 먼저 치우는가 보다 했다.
그렇지만 아직 다 먹지도 않은 밥에 시선이 가면서
속에서 약간의 신경질이 울컥 치솟아 오른다.
그렇지만 지긋이 눌러 참았다.
그 다음 순간 사람이 민망해졌다.
국물만 남은 찌게 그릇에 찌게를 새로 담아 내놓는다.
서로를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방이 갖고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단 30초 뒤도 내다보질 못한다.
연애할 땐, 둘에게 과거가 없었으나
살다보니 둘 사이에 과거가 쌓이고
(이 경우엔 몇 번 밥먹고 있을 때
반찬을 치워버린 게 과거이다)
그 과거가 둘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을 더욱 모르게 만든다.
(이 경우엔 국물만 남은 찌게 그릇에
새롭게 찌게 퍼주려고 한 마음을 모른다.)
과거가 없었다면 섣부른 판단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를 쌓지 말고,
과거를 깨끗이 지우면서 살아야 한다.
연애할 때가 좋은 것은 지울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오랜 결혼이 좋지 않은 것은 지워야할 과거가 너무 많이 쌓이기 때문이다.

24 thoughts on “섣부른 판단

  1. 그럴 땐 서버를 교체하면 좋은데 쉽지가 않죠.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존속중이오니 문의하시거나 그냥 자가포맷하는 게 상책.
    세종로 1번지에 국가위기관리센터가 생기면 콘트롤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ㅋㅋ

  2. 전 언니랑 나랑 과거가 너무 많아요. ㅋㅋㅋ
    쌓인게 많아 순간 버러럭 편히 대하는게,
    너무도 부부만 같아서 종종 우스워요.

    동원님의 그녀님이 오늘은 그림을 나타났네요.
    보랏빛 배경과 입술이 매력적이십니다^^

    1. 그 유명한 팝아트 스타일이예요.
      행복한 눈물인가 뭔가하는 그 그림 스타일이죠.
      요거보다 정밀한 방법이 있는데 하루 종일 그려야 해서 그냥 약식으로 후다닥 만들었다는…
      컴퓨터 아니면 어림도 없는데 컴퓨터 세상이다 보니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ㅋㅋ

  3. 아는 건, 정지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쌓여가는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마치 땅을 파며 찾게 되는 지층과도 같은 거… 라 생각합니다.
    겸손함이라는게 결국 ‘난 당신을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두분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오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그나저나 사진보다 이런 이야기에 코멘트가 많이 달리는 걸 보면… 동원님은 사진쟁이보단 글쟁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요… ^^;; (물론… 사진도 잘 찍으십니다.) 내일… 뵙나요? ^^;;

    1. 예, forest님하고 같이 가려구요.
      처음엔 다들 모일 것 같더니 영 공식 공지가 안나네요.
      미르님이 바쁘신지…
      그냥 비공식으로 모이는게 되는 거 같어요.
      내일 봐요.
      저는 8시까지는 그곳에서 사진찍으면서 어슬렁거릴 생각이예요.

  4. 내가 주섬주섬 반찬그릇을 치우는 이유.
    1. 항상 내가 먼저 밥을 먹어치운다.
    2. 먼저 설겆이를 하게 된다.
    3. 그때까지 먹고 있는 울 털보, 먹고 나면 반찬그릇 뚜껑을 안덮어 놓는다. 때문에 반찬 먹을 거 몇개 남기고는 싹~ 치우고 뚜꼉을 덮어 냉장고에 넣는다. ㅋㅋ

    섭섭했구려.
    하긴 먹고 있는데 반찬그릇 싹~ 치우면 그만 먹으라는 소리랑 똑같으니 섭섭하기도 하겠네.
    나는 일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반찬 뚜껑 열려있는 거 보면 또 내 뚜껑 열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소.
    몇번의 말로도 고쳐지지 않으면 걍~ 행동으로 쓱~ 해버리는게 가장 나은 것 같더이다.

    이 글을 보니 나의 과거는 당신의 과거이기도 하구
    당신의 과거는 나의 과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오.

    에또, 과거, 과거 하다보니 무슨 과거셤보러 가는 것 같소. ㅋㅋㅋ
    난 셤을 가장 싫어하니 과거를 모두 없앱시다~

    1. 그게 보통은 서운하질 않소이다.
      왜냐하면 먹지 않는 반찬을 치우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 날은 먹고 있던 반찬을 들고 갔소.
      그래서 생각이 여기에 이른 거요.
      살면 살수록 훤히 상대를 알게 되는게 아니라
      살면 살수록 더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 부부가 아닌가 싶소.
      생각하고 대화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개의치 마오.

    2. 글도 슥슥 쓰시는 분이 이제 그림까지 슥슥~
      앤디 워홀의 마리린먼로가 생각나네^^
      저두 아주 가끔 반찬그룻을 먼저 치우긴 하는데
      울남편 워낙 싹쓰리전문에 빨리 먹는 편이라 그럴 기회가 별루 없다는..
      근데 가끔 말이죠 반찬을 여러개 놓으면
      약간 짜증스런 말투로
      “뭘 이렇게 많이놔? 어뜨케 먹으라고, 이건 치워~”
      이럴 땐 이 마누라가 서운해지죠.
      그릇 치우고 돌아서며
      ‘우~씨, 많아도 탈이냐? 그냥 안먹으면 되지 왠짜증?’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저는 과거 좋아요. 아직도 셤이 좋은가봐요~~

  5. 아이고,,

    과거의 정보 때문에 현재를 섣부르게 판단하게되는 경우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애도 비슷한 것 같아요 ^^;
    (물론 연애와 결혼을 비교할 순 없지만 말입니다; )

    결혼한 후에 축척되는 자료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겠지요,
    그로 인해서 생기는 판단의 오류의 가장 큰 원인은 ‘상대방을 잘 알고있다’
    …라는 착각인 것 같습니다.

    정말 간만에 블로그 서핑 하는 중인데,
    참 매 번 와닿는 글을 포스팅 해 주시는군요. ㅠ_ㅠ

    1. 서로 서운한게 있으면 싸움으로 번지기는 쉬운데
      차분하게 그걸 분석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블로그는 좀 차분하게 서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좀 덜 힘들기도 하고…ㅋ

  6. 2천만 여성의 자유로운 성 생활을 꿈꾸는 자!! 흐흐흐

    ㅋㅋ 누군지 아시져? 로긴 하기 싫어서요.
    음…사진 정말 다들 이쁘게 올려놓으셨네요.
    결혼&삶

    인생 별거 있습니까!
    가장 쉽게 가장 편하게 있는그대로 인정해 주고
    어룰렁더울렁 살다 보면 됩디다.
    그러다 영 안되면 해체 모여할 수도 있는거고.

    한번 결혼으로 연애 종 쳤다라는 것은 더더욱 우스운 거고.

  7. 글을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도 가끔 남편이 아직 다 먹지 않았음에도 남아 있는 반찬을 염두에 두고
    주섬주섬 그릇들을 치우던 기억이… ㅎㅎ
    따뜻한 찌게를 더 푸기 위한 배려를 가끔은 오해를 가게 되지요.
    지나간 과거는 말끔히 지우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나쁜 기억들이라면…
    그러나 나이가들수록 가까운 기억은 지워지고 멀리 있는 기억들은
    점점 선명하게 되살아 나는 것을 것을 느낍니다.
    먼 과거는 향수와 함께 푸근하고 정답게 다가오네요.
    다행이지요……

    1. 저희도 다행히 낄낄대고 웃으면서 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글을 다 써놓은 다음에 제가 얘기를 했거든요.
      오해는 할 수 있는 듯 한데… 그거 줏어담기를 잘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8. 전혀 예상못하는 순간 확 달라지는 것들,
    그 새로움에 울렁하시진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삶은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____^;;

    동원님 말씀을 듣고보니,
    지루할 것같던 대륙횡단열차도 한번쯤 타봐도 될것같은데요.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는 열차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늘 같은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들 하고 있는 거니까요.

    사람과의 관계는 역시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군요.
    그리고 관념이란 무서운 거네요.
    인생의 교훈 하나, 또 잘 배우고 갑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덧말) 사진 감사합니다. 신경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넙죽~

    1.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항상 현재의 상태에서 과거로 미래까지 재단해 버리는게 문제인 듯.
      좋을 때야 문제가 없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걸 말하지 말고 일단 한번 눌러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화를 내가지고 맞았던 경우가 드물다는…
      결혼은 글쎄요… 그게 답을 찾기가 쉽지가 않아서… 제 얘기는 그저 제 얘기일 뿐이예요.

  9. 저도 내년부터 이스트맨님한테 배울게 딥따 많을듯…아니 포레스트님과 합숙을 해야할듯…1박 2일로..ㅋㅋ
    아~~~노처녀 시집가기 이래서 힘든가봅니다아~!
    주위에서 주워듣는게 여간해야말이죠~~
    그래두 가긴 가야겠죠?

    내년에 꼭 가자!!
    아자 아자!!

    1. 그 반대가 될 거 같은데요… 우리가 바둑이님 커플한테 배워야 할 거예요… 사랑은 요즘 사랑이 훨 낫거든요. 많이 많이 축하해 줄께요.

  10. 지워야 할 과거가 많은 만큼 떠올릴 무엇도 많아 지는 거겠죠?
    요즘은 지울것도 떠올릴 것도 생각 않고 싶은데 그럴때 우잘까요??
    오랜 경험의 혜안을 빌려주셈~ ㅡ,.ㅡ

    1. 이제 서로 편안한 시기에 들어선 거지요, 뭐.
      사실은 그 편안한 시기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지지고 볶으면서 둘이 살아간다는 생각도 들어요. 뜨거움도 갈등도 없지만 그러나 평화로운… 그래서 약간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드디어 그 평화의 시대에 도착하셨습니다.

  11. 과거가 쌓이지 않는데~ 현재가 만들어지나요? 좋은 기억들만 남기는 선택적 지우개의 성능에 맡겨야 하나요~ 지금 저의 상태를 해결해줄 수 있는 포스팅이라 생각해서 반갑게 리플달면서 다시 주욱하고 기운이 새나갑니다~ 나도 애들 때문에 산다는 생각을 하게될까? 라고 의심했었는데~ 결국은 그러고 있는 중인 나를 발견하네요~ 전 포기중이거든요~ 그런데 포기도 쉽지가 않네요~ 아니면 성격을 고쳐야하는데~ 그건 더더욱 쉽지가 않구요~~ ^^;

    1. 우선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
      결혼한 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를 알아본 실험이었죠. 결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나와 버렸습니다. 결혼한지 오래된 부부일수록 서로를 더 모르고 있더라는 것. ( http://h21.hani.co.kr/section-021160000/2008/07/021160000200807070718056.html ). 그 글을 읽으며 서로 모르면서 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는 구절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과거가 쌓여야 현재가 있지만 과거 중엔 현재를 갉아먹는 현재가 있어서 쌓이면 쌓일수록 현재가 점점 더 없어진다는 생각입니다. 포기하고는 다른 문제 같아요. 관건은 대화더라구요. 둘이 이 얘기하면서 많이 웃었거든요. 얘기안하고 현재를 갉아먹는 과거를 자꾸 쌓아가는게 문제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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