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길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1월 16일 팔당의 두물머리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길에 서면
길을 간다기 보다 가을의 속, 그 깊은 곳으로 들어선 느낌입니다.
그렇게 가을은 그 계절의 속으로 서 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같은 길을 여름에 걸었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지겠지요.
아마 더위가 밀어올린 짜증이 가장 먼저 우리를 엄습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무성한 잎으로 초록의 만찬을 마련해도
여름엔 은행나무길을 찾는 사람은 없는 듯 싶습니다.
대부분 바다나 계곡으로 눈을 돌립니다.
사람들이 찾아간 바다나 계곡은 여름의 품이라기보다
사실은 우리들이 여름을 피해 도망친 곳입니다.
겨울도 사정이 좋지 않긴 마찬가지입니다.
여름 더위 대신 겨울 추위가 우리들을 바짝 뒤쫓으며
우리들의 종종 걸음을 더욱 급하게 재촉하겠지요.
여름이나 겨울은 그 품으로 들기보다
사람들이 그 품을 피해 도망치고 싶어하는 계절입니다.
또 봄엔 아직 지난 겨울에 잎을 걷어낸 빈가지가 그대로입니다.
걸음은 여유롭지만 은행나무의 빈가지는
봄의 속으로 든 느낌을 주기보다는 겨울의 황량함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봄에도 은행나무길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가을은 좀 다릅니다.
모두가 그 길로 걸음하여 가을의 품, 그 한가운데로 들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길을 가고 있노라면
가을의 품에 들었다는 느낌이 완연해 집니다.
가을의 은행나무길은 그 길을 가노라면
가을의 속, 그 한가운데로 드는 느낌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어합니다.
아마도 가을의 속으로 들면서
누군가의 가슴으로 들어갔을 때의 느낌을
함께 맛보고 싶어하는 것이겠지요.
계절의 속, 그 깊숙한 곳으로 들 수 있는 계절,
가을이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8 thoughts on “은행나무길

  1. 예전, 직장이 있던 광화문 근처의 나무들이 모두 은행나무였던 것 같아요.
    쭉쭉 단단하고 야무진 팔을 대칭으로 벌리며 서 있는 은행나무들,
    나무들 중에 잘생긴 나무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은행나무를 고르곤 합니다. 나무에 대한 기억들 중에 은행나무가 유독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까요.

    가을, 그윽한 품으로 들어가서 푹, 쉬고 싶은 요즘이에요.
    은행나무 품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1. 근처에 은행나무가 좋은 곳이 많아요.
      암사동 선사유적지도 그렇고, 올림픽 공원도 그렇고…
      전 그 노란색이 이상하게 아주 좋더라구요.

  2. 두물머리로 출사를 많이 가시던데, 은행나무길이 정말 아련하네요.
    사진을 참 감칠맛나게 찍으세요.

    창원은 가로수길 하나는 정말 잘되어있는데 말입니다.
    몇 년을 학교를 다녔으면서 신경을 못썼었죠. 그러려니..하고요.

    가고싶은 곳은 점점 많아져 메모는 점점 늘어가는데,
    또 정작 시간이 허락되면 이 충동이 잠잠하겠지요.
    꼭 가봐야할텐데….

    1. 두물머리는 워낙 가까워서요.

      원래 살던 곳이 멀어지면 제대로 보이곤 하지요.
      저도 서울 올라와서야 영월이 좋은 걸 알았으니까요.

  3.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전주역 앞길 가로수가 은행나무더군요.
    늦가을 야밤, 포차에 들려 야식도 먹고 그 길을 밤새 걸어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리곤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을 했습니다.
    은행나무길만 보면 그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4. 정말 가을처럼 계절의 중심부로 뛰어들고 싶은 계절이 없네요.
    은행나무 길이든 단풍 든 남한산성이든 가을이 무르익은 곳은 어디랄 것 없이 가장 무르익은 그 곳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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