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월요일에 광화문에 나갔습니다.
교보문고에 책을 납품하러 간 길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지하철을 타고 갔습니다.
나간 김에 청계천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몇 장 찍었지만
딱히 카메라를 들이댈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아
다시 종로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인사동으로 건너가는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는 동안
옆구리의 행선지에 상일동을 내건 370번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과 광화문 사이를 매번 땅속으로만 오고간지가 한참 되었습니다.
지하의 길은 지상의 풍경을 버리는 댓가로 속도를 얻은 길입니다.
속도를 얻은 대신 풍경은 잃어 오가는 내내 항상 창에 어둠만 가득합니다.
갑자기 집과 광화문을 오가는 그 사이에
내가 지상에 버려둔 풍경이 궁금해졌습니다.
370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지하의 길은 오직 오가는데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지상의 길은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공간입니다.
울긋불긋한 천을 다 실은 아저씨 한 분이 이제 떠날 차비를 합니다.
버스가 동대문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하의 길을 갈 때는 타는 곳과 내리는 곳의 지상만 친숙하고,
그 사이의 지상은 까맣게 지워집니다.
시작과 끝만 있고 가운데가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 집과 광화문 사이에 동대문이 있다고
오늘 지상의 길이 일러줍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
심지어 옆버스의 사람들과도 만납니다.
잠시 옆버스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같이 가다
사거리에서 방향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가로수를 지나쳤지만
그중 가장 노란색이 완연했던 은행나무입니다.
잎 사이의 성긴 틈을 비집고
오후의 햇볕이 강렬하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어둠을 가득채운 지하철의 창과 달리
지상의 길에선 버스의 창에 바깥 풍경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창 하나씩을 꽤차고 버스를 타고 갑니다.
이제 길은 땅속으로 잠행을 하기도 하고,
예전처럼 지상에 납짝 엎드려 포복을 하는가 하면
또 그 육중한 몸을 들어올려 공중으로 날아가기도 합니다.
길은 더 이상 지상에 붙박힌 신세가 아닙니다.
땅속이나 하늘이나 못가는 곳이 없습니다.
이상한 것은 못가는 곳 없이 길이 나 있는데도
종종 길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버스가 길가를 기웃거리면
가로수가 버스 가까이 다가옵니다.
처음엔 버스를 기다린 눈치였지만
나무는 엉덩이가 아니라 발이 무거워
한번 그 자리에 서면 여간해선 발을 떼지 않습니다.
번번히 버스를 그냥 보내고 있었습니다.
빛이 비처럼 쏟아집니다.
비가 쏟아질 때도 사실은 빛처럼 쏟아지는 걸까요.
요즘 많이 가물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 내리는 단비라면 빛처럼 쏟아질 듯 싶습니다.
군자교입니다.
아직 신호등을 건넌 차들이 미처 다리로 들어서지 못했는지
다리 한쪽이 텅비어 있습니다.
차선들만 깨금발을 띄면서 버스와 함께 가고 있습니다.
워커힐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걷는 언덕인데 차로 가기도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 종종
차창 밖으로 버스의 속도를 구경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버스의 속도가 바깥의 풍경을 빠르게 뭉개고 있습니다.
바깥 풍경은 너무 버스 가까이 붙으면 버스의 속도가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뭉개도 버스가 서는 순간,
곧바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달리는 동안 다른 차들이 기다려줍니다.
용케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길을 건넌 한쪽 차선의 차들이
빠르게 길을 비우며 멀리 달아답니다.
차들을 길을 채웠다 비웠다 하면서 길을 갑니다.
천호대교를 건너는 중입니다.
보통은 지하철도 한강을 건널 때는 잠시 바깥으로 몸을 내미는데
내가 타고 다니는 5호선은 한강도 강밑으로 건넙니다.
이렇게 다리 위로 건너보니 다리 난간에 꽃이 피어 있습니다.
원래는 그냥 창살이 차렷자세로 서 있던 난간이었는데
새로이 단장을 했는가 봅니다.
멀리 올림픽대교가 머리를 길게 빼고
빡빡하게 들어선 아파트 너머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아마 시선이 많이 막히나 봅니다.
이제 천호동.
거의 집에 다 왔습니다.
내가 내리는 곳에서 또 어떤 사람들은
새로이 길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땅속의 길로 다니면서
내가 땅 위로 버려두었던 풍경이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차창에 끊임없이 담기는 길입니다.
8 thoughts on “지상에 버려둔 풍경”
얼마전 홍대입구에 갔다가 광화문까지는 버스로, 그 이후엔 지하철을 탔는데 거리풍경때문에 잠깐 행복했었어요. <370번 상일동행 버스> 꼭 기억했다가 타고와서 천호동에서 갈아타고 집에 와야겠어요. 몇번인가 버스를 타려고 시도했다가 지레 포기했는데… 워커힐 올라가는 풍경부터는 제가 아는 풍경이군요. 정확히 광화문 어디에서 타야 하나요?
사실은 종로에서 탔어요.
영풍문고 있는 쪽으로 버스 정류장이 늘어서 있는데
그 정류장들 가운데서 교보에 가장 가까운,
그러니까 거의 광화문쪽에 가까운 맨아래쪽 정류장에 있더군요.
370번, 300번 두 가지가 모두 천호동으로 와요.
아무거나 타셔도 오는 길은 똑같습니다.
저도 급한일이 아니면, 버스를 타는 게 좋더라구요.
바깥을 보는 일이 무척 재밌어요.
사람구경은 특히 재밌죠.
가을이라 창을 열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아주 좋았어요.
유리창 밖으로 찍으면 좀 어른거리거든요.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 정말 좋더군요.
운전기사 아저씨가 사진을 찍으니까 약간 겁먹은 눈치여서 좀 미안했어요.
버스를 타고 함께 버스 안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착각에 빠집니다.
빛이 쏟아져 내리는 한가한 오후, 천호동행 버스에 앉아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저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고 언덕을 오르고 나무들을 지나 낮익은 풍경속으로 스며들던 기억이 아슴푸레 올라오고 있네요.
그리워서 아득하기만 한 먼 풍경입니다.
저도 항상 땅위에 두었으면서도
오랫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들어오면서 생각해보니 집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도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길도 궁금해 졌습니다.
언제 한번 다시 또 옛날의 길을 나서 봐야 겠습니다.
추억이 있으니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할 듯 합니다.
광각의 느낌이 퐁퐁~ 퍼져나가네요.
개인적인 취향을 잘 찾지 못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왜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걸 금방 깨달았었지요. ^^;
그래도, 익숙한 풍경은 짠 합니다.
저도 왜곡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날은 그냥 카메라를 초점을 맞추지 않고 창문에 걸쳐놓고 셔터를 누르면서 찍었어요. 넓게 찍어서 잘라서 썼지요.
익숙한 풍경은 제게 있으니 이국적 풍경은 암행님이 선물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