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기린

집의 2층에 여러 개의 화분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매년 빨간 꽃을 피웁니다.
매년 보는 꽃이지만 이름을 몰라서
그냥 볼 때마다 빨간 꽃으로 마주하곤 했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래도 매년 봐서 아는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9월 28일

올해는 유난히 꽃이 많이 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미 며칠 전 나의 눈길을 끌만한 변화가 있었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6일

꽃은 항상 둘씩 붙어있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물론 넷이 모여있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짝을 잘 맞추는 꽃이란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6일

꽃이 하나둘 쳐지고 있을 때도
그냥 꽃이 지고 있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8일

꽃이 너무 작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꽃이 새끼 손톱만 하니까요.
작은 것들은 섬세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변화를 눈치채기가 좀 어렵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꽃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10월 22일 수요일, 비가 내린 오전 시간이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꽃의 이름은 꽃기린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알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린으로 보기엔 목이 너무 짧다고 꽃을 놀린 것이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사실은 가시를 가진 꽃입니다.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가시 때문인지 영어명은 Crown of Thorns,
그러니까 가시 왕관인 셈입니다.
빨간 것을 꽃잎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포(苞)라고 불리는 일종의 소형화된 잎이라고 합니다.
꽃이 형성되는 초기에 꽃을 받쳐주며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는 군요.
그 두 장의 빨간 잎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꽃이라고 합니다.
암술이나 수술이겠거니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꽃인 셈입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그런데 사실 가장 놀랐던 것은
꽃에서 꽃이 피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린처럼 길게 목을 빼면서
꽃 속에서 또 꽃이 솟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쪽의 꽃대에선
꽃 속에서 솟은 꽃에서
다시 또 꽃이 솟고 있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보통은 먼저 핀 꽃이 시들고
나중에 핀 꽃이 더 오래가는 법인데
꽃기린은 꽃 사이에 핀 새로운 꽃이 더 먼저 떨어졌습니다.
떨어진 꽃이 넓은 잎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꽃속에서 피긴 하지만
둘씩 짝을 맞추는 것은 여전합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너무 자리가 비좁아
셋이 자리하긴 어려울 듯 보입니다.
좁은 공간에서 둘이 비비고 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2일

자꾸 들여다보다 보니
우리들이 하나인 듯 해도 둘이지만
둘이 마주보며 엮어나가는 삶이
참 아름답고 좋지 아니한가고 내게 묻는 듯 싶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3일

비가 오자 빗방울이
두 장의 포 사이로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포 사이의 꽃이 졸지에 물속으로 잠겼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3일

꽃의 호흡은 아주 긴가 봅니다.
물에 잠겨서도 저렇듯 여유로운 것을 보니 말입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3일

매년 보면서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름도 올해 겨우 챙겼습니다.
그동안은 그냥 꽃잎을 양쪽으로 납짝하게 벌려
그 사이에 암술과 수술을 담아낸 목이 짧은 꽃이었는데
올해 보니 정밀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꽃속에서 다시 꽃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안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모두가 똑같이 챙기는 이름일 테니까요.
내게 있어 우리 집의 꽃기린은 어느새
몇년 동안 이름도 모르지만 가끔 눈을 맞추고 함께 살았던
빨간 꽃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 빨간 꽃, 올해는 꽃속에서 꽃을 피운 기억을 하나 남기면서
작고 납작한 꽃으로 반복하던 기억에 새로운 기억 하나를 더 얹었습니다.

14 thoughts on “꽃기린

  1. 아랫층에 어머니가 보살피는 화분이 가득한데, 꽃기린도 있거든요. 자세히 살펴본적이 없는데 내려가서 봐야겠어요. 꽃 속에서 또 꽃대가 올라와 꽃 피우는 것을… 수종사 공양간 두물머리 보이는 창가에도 꽃기린이 늘 예쁘게 피는데, 잘 있겠지요?

  2. 예전부터 느낀것이지만 동원님께서는 과학자적 마인드와 시인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예요. 글이과학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느낌이라서 동원님 글을 자꾸 자꾸 읽으면 지성과 감성이 균형이 잡힐 것만 같다는…..ㅎㅎㅎ

  3. 꽃을 기다 린다…라고 해서 꽃기린이라고 할지도… -)(-

    사진처럼 접사하듯이 얼굴을 맞대고
    빤히 쳐다보지 않았지만
    저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1. 꽃 자체는 흔한 것 같습니다.
      원예종이라 가꾸는 집이 많은 듯 싶어요.
      언젠가 이름을 알아놓았는데 자꾸 잊어 먹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꽃 이름 여러 개를 챙기고 있습니다.

  4. 저꽃… 만지면 분홍색즙이 나오는 그 꽃이군요.
    어릴적에 죄없는 꽃을 손가락으로 꾹꾹 짖누르고 다녔는데.

    저번에 부탁드렸던 사진을 동원님께서 찍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전문사진사 불러서 찍은 사진 보니 참…. 돈벌기 쉽구나란 생각을 했네요.

    동원님의 꽃 사진은 예전에 동아대백과사전에 나오는 사진 처럼
    ‘오.. 이게 그거구나..’하게 만드네요.

  5. 꽃 속에 핀 꽃들은 삶의 영광을 노래 하는 듯 하네요
    떨어진 꽃들은 알을 낳고 죽어 가는 연어의 외로운 눈동자 같네요
    꽃기린이 더 목을 길게 빼고서 주인님을 반겨 준다면
    그 이름 불러 주실 건가요?

  6. 하나의 꽃을 알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 아닐까싶어요.
    무심코 지나치는 꽃이지만 그들도 다 자기들만의 ‘속사정’이 있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꽃속에 또 다른 꽃이 피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왔겠지요.

    시들어 떨어진 꽃잎을 보면서 애잔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소중함 또한…

    1. 예전에 예명을 쓰던 한 시인의 본명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안 기분이었어요. 매번 꽃 사진이 똑같았는데 이번에 이렇게 사진을 찍고 보니 무슨 큰 비밀이라도 꽃에게서 얻어들은 기분이었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