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논둑길, 자전거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1월 3일 서울 암사동에서


한 아저씨가 자전거를 끌고 논둑길을 걸어 마을로 간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든다.
너무 오랫동안 그런 말로 아저씨와 논둑길, 자전거를 묶어놓았다.
이제는 아저씨와 논둑길, 자전거를
그런 반복된 일상적인 말의 굴레에서 풀어놓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난 오규원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일단 난 오규원이 즐겨쓰는 시어를 그대로 빌려와
아저씨를 사내로 바꾸기로 한다.
그러자

한 사내가 자전거를 끌고 논둑길로 들어선다.
그가 들어서자 논둑길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다 안다는 듯이
그의 앞으로 익숙하게 길을 펼쳐든다.
길은 저만치 앞장을 서고,
먼저 마을 어귀에 다다른 길은 힐끗 한번 뒤를 돌아보더니
잠시 그곳에서 숨을 고르며 사내를 기다린다.

사내는 논둑길로 들어서기 전,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에 대한 속도의 채근을 버린다.
자전거는 그랬다.
그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종종 속도를 채근하게 되곤 했다.
하지만 사내는 마을이 보이는 논둑길에 들어서면
그 속도의 채근을 버리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때부터 자전거는 사내의 동행이 되었다.
사내는 더 이상 발을 구르지 않았다.
사내는 천천히 발을 옮겨 걸음을 떼었고,
자전거는 사내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바퀴를 굴렸다.
둘은 나란히 함께 논둑길을 간다.
아스팔트길은, 사내가 자전거 위에 앉아 편안하게 속도를 채근하고
자전거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급하게 바퀴를 굴려야 하는 길이었지만
논둑길은 둘이 천천히 보행의 속도를 맞추며 함께 가는 길이다.
여름내 한창 웃자란 풀들이 사내의 발목을 툭툭치고,
그것으론 부족했는지 자전거의 바퀴살도 함께 툭툭치며 지분거린다.
둘은 풀들의 지분거림도 함께 즐기며 길을 간다.
좁은 논둑길은 둘의 걸음을 이끌고 먼저 마을 입구에 가 있다.

한 사내가 자전거와 나란히 논둑길에 들어선다.
그들이 들어서자 논둑길은
둘이 걷기에 좋을만큼만 길의 폭을 펼치더니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다 안다는 듯이
그들의 앞으로 익숙하게 길을 펼쳐든다.
길은 저만치 앞장을 서고,
먼저 마을 어귀에 다다른 길은 힐끗 한번 뒤를 돌아보더니
잠시 그곳에서 숨을 고르며 둘을 기다린다.

4 thoughts on “아저씨, 논둑길, 자전거

  1. 이 사진 참 맘에 드네요.
    자연조명이 따뜻해요.
    구도까지 예술적이었음 하지만.
    꼭 그럴필요는 없겠지용.

    저 순간에 있고 싶어용. 🙂

    1. 아저씨는 갑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구도구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저희 집에서 아파트를 지나 10분 정도 걸어가면 이런 곳이 나와요. 다음에 저희 집에 오시면 같이 가봐요.

  2. 아저씨라고 하면 누군가 기다리는 이가 있을 것 같은데
    사내라고 하니까 혼자 뚝 떨어져 나와 외로운 느낌이 듭니다.
    길과 자전거마저 사내를 외면했으면 억장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때때로 사내가 되고 싶어집니다.

    1. 아저씨라는 말은 생활에 닳고 닳아 남자가 거세된 듯한 느낌이 들어요. 사내는 아직 남자가 거세되기 전의 느낌이랄까요. 남자들은 모두 아저씨보다 사내로 남고 싶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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