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1월 9일 경기도 팔당의 예봉산에서

우리 딸이 아주 어렸을 적,
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
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해줄까 물은 적이 있었다.
딸은 “눈”이라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철이 없는 아빠는
돈이 안들어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딸이 받고 싶은 그 선물을 말할 수 없이 반겼다.
아빠가 한 일이라곤
내일 아침 일어나 눈이 없으면
분명히 배달시켰는데 배달이 좀 늦나보다고 둘러대야지 하고
얄팍하게 머리를 굴린 뒤 그냥 쿨쿨 잔 것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날 아침 창을 열었을 때 정말 눈이 와 있었다.
그 딸이 이제 훌쩍 커서 고3의 마지막 날들을 지나가고 있다.
대학가기 위한 시험이 계속되는 날들이다.
11월 9일 일요일에도 시험이 있었다.
딸에게 선물하나 해주고 싶었다.
보통은 선물이 시험이 끝난 뒤
그 성적을 살펴가며 그에 맞추어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런 선물해줄테니 이만한 성적 거두라는 그 거래가 싫었다.
중학교 입학했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아이가 핸드폰을 갖고 싶어해서 몇등 안에 들면 해주겠다며
마치 핸드폰을 성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경품마냥 내걸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거래가 싫어
시험을 보름 정도 남겨놓고 아이에게 핸드폰을 미리 장만해주고 말았다.
그 뒤로도 딸은 선물이란 이름의 경품에 홀려 성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번번히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딸은 성적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차곡차곡 챙기고 있었고,
제 갈 길도 알아서 열어가고 있었다.
우린 그냥 그게 좋았다.
그래도 시험은 피할 수가 없어서
올해 들어 거의 줄줄이 시험의 연속이다.
토익에, 토플에, EJU에…
그녀와 함께 아침에 딸을 시험장에 데려다주고 온 뒤에
잠깐 햇볕이 나오길레 사는 곳 근처의 예봉산에 올랐다.
오르는 길에 가는 비가 조금씩 흩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꼭대기까지 올랐다.
산꼭대기에서 조금 뭉그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무지개가 떴다.
시험이 잦은 딸에게
새로나온 맥북하나 선물해주고 싶었지만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더더욱
돈들어가는 선물은 무지 싫어하게 된 아빠는
옳거니 하면서 그 무지개를 뚝따서 딸의 선물로 챙겼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시험보고 온 딸에게 “이거 너 선물이야” 하면서
아이의 앞길에 걸어 그 무지개를 선물로 안겼다.
딸이 어렸을 때는 눈(snow)으로 선물떼우고,
딸이 커서는 무지개(rainbow)로 선물떼운다.
그래도 언젠가 비싼 선물할 기회가 오겠지, 뭐.

22 thoughts on “무지개

  1. 세상에서 눈과 무지개를 선물로 받는 딸은 극히 드물겁니다.
    오늘 따님도 시험을 보시나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쌍무지개를 찾으러 떠나야 하실 것 같습니다.

    1. 가는 길이 좀 달라서 오늘 시험은 안봅니다.
      중요한 시험 하나는 치루었구요,
      또다른 시험이 한 열흘 정도 남았습니다.
      잘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요즘은 무지개 본지 오래에요.
    무지개 참 좋아하는데.

    근데
    생각해보니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사랑해”라는 말도
    돈이 안 드는 것 중에 하나네요. 🙂

  3. 울집 큰딸내미 생일이 12월이랍니다.
    그날 눈 오는게 소원이라는데 날씨가 도와줘야 할텐데요.^^
    전 아직 아이들 영어니 뭐니 시키고 있지 않은데
    알고지내는 사람들이 도리어 걱정을 하네요.
    남들 다 하는데 그렇게 손놓고 있으면 어쩌냐구요.
    나름대로 맘을 굳게 먹고 있기는 한데….
    가끔은 흔들려요..ㅠ.ㅠ

    1. 일단 시켜보고 좋아하면 계속 시키면 될 것 같아요.
      혹시 영어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
      즐겁고 재미나게 영어공부할 수 있는 걸 찾아보는 게 관건일 듯 싶어요.
      안시키겠다, 이것도 안좋은 듯 싶어요.
      싫은 걸 강제로 시키는게 문제지요, 뭐.
      울딸도 미술학원은 아주 싫어했었어요.
      한달 다니다 관둔 듯. 그래도 일단 시켜는 봤답니다.
      뭐든 시켜보고 판단해야 할 듯…

    2. 맞아요. 저도 전혀 시키지 않는건 반대에요.
      그래서 자주 물어보고 있지요.
      또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저녁에 책 읽어줄때 한두권정도는
      짧은 영어동화도 읽어주는걸요.^^;;
      시기를 잘 보다가 놓치지 않는게 중요할것 같아요.^^
      며칠전에 딸내미가 그러더라구요.
      친한 친구중에 한명이 학원을 많이 다니나 봐요.
      피아노 갔다가 영어학원 갔다가 또 뭐라고 하면서 피곤하다고 했다고…ㅠ.ㅠ
      그지경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3. 두 분 참 현명하시네요. ^^

      어렸을 때부터 항상 생각했던건데,
      뭐든지 일단 시켜보고 좋아하면 계속 시키고
      아니면 과감하게 접게해야지. 라구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든 일이긴 하지만,
      아~~ 아빠가 된다는 건 부담스러우면서도
      굉장히 두근두근 한 일이에요.

      물론, 지금 시대에 아빠분들이 이 말 듣는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지도 모르지만요. ^^;;

  4. 사람을 낳아서 사람으로 키우지 않고 점수제조기, 즉 기계로 키워는 게 요즘 세상인 것 같아요. 따님을 기계로 키우지 않으시고 자유를 호흡하는 사람으로 키우신 것 만큼 귀한 선물이 있을까요?
    어려운 길이지만 스스로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고 많은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낸 것 보고 정말 두 분의 자녀교육이 부러웠어요. 눈과 무지개에 담긴 자유, 눈 멀지 않은 사랑…. 아이에게 그렇게 제대로 된 선물하기를 제가 좀 많이 배우려고요.

    1. 다른 건 몰라도 돈이 안든다는 거,
      요것만큼은 큰 장점이라고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점은 하늘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
      눈이나 무지개나 모두 하늘의 소관이라…
      사실 무지개는 상당히 힘들게 얻었어요.
      고거 예봉산, 마지막 부분 상당히 가파르더구만요.

  5. 딸 아이에게 ‘눈’과 ‘무지개’를 선물할 수 있는 아빠가 이 세상에 동원님 말고 누가 있을까요… ㅎㅎ 좋은 아빠를 넘어 ‘귀한 아빠’라면 칭찬이 좀 될까나요… ㅎㅎ
    따님의 얼굴에 ‘좋은 딸’ 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예봉산의 푸른빛에 걸려 있는 무지개가 환상입니다.

    1. 그녀가 곧잘 “아무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듯…

      무슨 산삼이라도 발견한 듯 “무지개다”하고 소리쳤어요.

  6. 비 많이 내리는 영국과 캐나다의 좋은 점은
    무지개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점.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다가
    갑자기 해가 쨍쨍 들때면 하늘을 보면 정말 선명한 ‘쌍’ 무지개가 있을때가 많죠.

    한국에서 산다는 건.. 영어랑 싸워야한다는..
    참 안타까운 현실. 개인적으로 토플과 토익처럼 쓸모 없는 것도 없는데…

    1. 그게 응시 요건에 토익, 토플 몇점 이상이라고 나오니까요.
      그냥 영어 공부를 했으면 좋겠는데
      일단 시험에 붙어야 하니 어쩔 수가 없는 듯 싶어요.
      그걸 아는지 영어는 그저 응시요건을 충족시킬 정도로만 간당간당하게 하고 있는 듯…

    2. media and communications가 신문방송이 맞긴한데,
      사실 딱 들어맞는 건 아니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는
      저널리즘학과인데, 한국에서는 일단 신문방송으로 분리되는 듯 싶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media and comm이라고하면
      보통 이론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백해무익하다는…

      해외에서 저널리즘 학과는 전문 언론인을 키우는 학과이죠.

      그 책은.. 봐도 별 내용도 없고, 영양가도 없다는… (귀뜸)

    3. Media and Comm은 사실..
      철학과 사회학을 미디어에 관한 연구로
      연결하는 학과정도…라고 하면 될 듯 싶네요.

    4. 사회학과 철학을 미디어에 관한 연구로 연결하는 학과…
      햐, 생각만해도 지루하네요;

      미디어에 관련된 학과가 워낙 세분화 된 것 같아서
      요즘엔 어디를 들어가야될지도 결정하기 힘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영어는 참,
      몇 십만원짜리 시험 하나로 영어실력을 결정지어버리는
      그런거 저도 개인적으로 정말 싫습니다; -_ㅠ

    5. 일단 책은 다운을 받았어요.
      400페이지가 넘는 엄청 두꺼운 책이네요.
      한가운데 있는 정희님 이름과 그 이름이 이끌고 있는 글도 확인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진 못했어요.
      영어는 수월하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
      저에게도 큰기쁨이네요.
      내가 아는 사람이란 사실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이런 것인가 봐요.
      학과 설명도 고마워요.

    6. 앗, 암행님과 거의 실시간으로…
      딸에게도 물어봤는데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던 것을
      정님이 간결하게 정리해 주시네요.

      저도 시험치는 값이 그렇게 비싼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 돈으로 영어책 사보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국에 사는 처지에선 어쩔 수가 없는 듯…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