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면
그 사이를 문으로 만드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
어릴 적 우리는 그 나무의 신비를 본따
서로 손을 맞잡고 높이 치켜드는 것만으로
우리 사이를 남대문이나 동대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노래불렀고
우리 사이의 그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놀았다.
나무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 마주서는 것만으로 문을 만드는
신비의 힘을 갖고 있다.
나무가 훤칠한 키를 가지면
문의 높이도 아득해진다.
그 사이로 지나가면 우리는 문을 지나간다.
이상하게 나무의 문으로 지나가면
신이나고 재미난다.
하지만 더 신나는 것은
나무의 사이를 버리고
나무의 옆으로 지나가 보는 것이다.
나무는 둘 사이의 공기를 뚫어 문을 만들고,
옆의 공기는 차곡차곡 쌓아 담을 만든다.
그래서 나무 옆을 지나가면 우리는
문옆의 담을 슈~욱 가볍게 뚫고 지나갈 수 있다.
나무 옆의 담은 절대로 무너지는 법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뚫고 지나가도
흔적없이 투명하게 아물어 버린다.
나무는 둘 사이의 공기는 뚫어 문을 만들고
제 옆의 공기는 차곡차곡 쌓아 담을 만드는 신비의 힘을 가졌다.
4 thoughts on “나무의 문과 담”
가끔 산에서 “와, 이렇게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놨네~” 라는
대사를 내 뱉게 만드는 의도적인지 자연스러운 건지 모를
길 들을 몇 개 봤는데, 이 나무 문도 그 중의 하나군요.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초등(국민학교라고 불린 마지막 해였던가요..)학교 2학년 때
이후로 해 보지 못한 아쉬운 놀이가 참 정겹네요. ㅎㅎ
춘천의 청평사갔을 때도 사실은 절앞에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 나무가 문이 아니라 나무로 보이더니 이번에는 처음만난 산길의 나무가 나무가 아니라 문으로 보였어요. 사람 눈은 참 이상한 듯 싶어요.
손만잡아도 문을 만들 수 있었던 우리의 어린 시절도 참 대단해요.
나무를 진정으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나무가 만들어 놓은 문과 담을 볼 수 있겠지요. 나무 심는 일로 평생을 보냈던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 선생님과 아이들의 마음을 평생 삶 속에서 보여주셨던 권정생 선생님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그들의 순수하고 해맑은 마음이 나무들의 삶과 닿아 있지 않을까싶어요.
이제부터 나무를 보면서 그들 사이에 만들어진 문이며 담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겠어요.
갓떨어진 나뭇잎들이 풍기는 가을냄새가 너무 좋았어요.
해가 다 떨어진 뒤, 어둑어둑해서야 겨우 산을 내려왔죠.
후레쉬 가져가지 않아서 마지막에 고생좀 했어요.
좀더 밝을 때 봤으면 카메라에 담았을 나무들이 많았는데
어두워져서 그러지 못한게 좀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