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 날,
산길을 오르다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한다.
언젠가 보았던 나무이다.
햇볕이 좋아 집을 나섰던 날이었다.
그때는 옆으로 펼친 나뭇가지에서
팔을 넓게 펼치고 누군가를 맞아주는
나무의 반가운 마음을 보는 듯했다.
오늘은 느낌이 다르다.
가지가 눈에 덮여 윤곽이 강조된 오늘의 나무는
허공에 그려놓은 굵은 선 같은 느낌이다.
나무를 지나쳐 다시 길을 간다.
가다보니 길옆으로 나무의 잔가지들이 빈틈없이 얽혀있다.
아마 보통 때라면 그 뒤엉킴 속에서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느낌이 다르다.
눈이 내린 날,
길옆으로 나뭇가지가 조밀하게 채워진 산길을 가노라면
눈을 받아든 잔가지들에서 가늘게 그어놓은 선의 느낌이 나고
그 때문에 길옆으로 선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눈이 오면 나무는 나무의 느낌을 버리고
허공에 그려놓은 굵거나 가는 선이 된다.
선(line)이란 무엇인가.
선은 알고보면 점(point)의 움직임이다.
점은 한 자리에 붙박힌 위치에 불과하지만
그 점이 움직이면 선을 낳는다.
선은 그래서 방향과 움직임만 가질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
나무도 그랬으리라.
점처럼 한 자리에 붙박힌 씨앗에 불과했지만
그 씨앗이 움직여 마치 선을 그리듯 나무를 키웠으리라.
그리고는 방향과 움직임만 가질 뿐
아무 것도 갖지 않고 평생을 살아간다.
눈은 나무가 그렇게 선의 존재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선이 통채로 좌우로 움직이면 면(surface)이 되고
면이 또 위아래로 움직이면 공간이 된다.
면과 공간은 세상을 소유하고 점유하려 든다.
여기가 내 것이라 구획을 하고
더 많은 면과 공간을 가지려 욕심을 낸다.
선에겐 그 욕심이 없다.
나무도 그렇다.
한해 내내 잎을 키워 면과 공간을 차지하는가 싶지만
가을이 되면 그 잎을 다 털어내고 다시 선으로 돌아간다.
눈이 내린 날,
숲엔 온통 나무들이 한해내내 그려놓은 선들로 가득이었다.
2 thoughts on “나무와 선”
굵은 선과 가는 선으로 겨울을 나는 겨울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오규원의 시를 떠올립니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얻는다
펑펑펑, 분분분, 죄죄죄
조용한 겨울 숲 한가운데로 나지막히 숨죽이며 들려오는 눈 오는 소리 들리는 듯 합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면 사람은 자기 가진 것의 아주 작은 일부도 벗어버리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또 사람들 중에 가진 것을 훌훌 털어내 세상으로 돌려주는 아름다운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면 놀랍기도 하구요. 아마 나무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부산에 그런 분이 한 분 계신데 문득 그 분이 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