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어느 집에서나 아이들이 자라고 성장을 한다.
그러나 쉽고 수월하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종종 부모의 애를 태우기도 하고,
아이 또한 제 스스로 성장의 아픔을 겪는다.
우리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를 보니 성장의 한 고비를 넘긴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잘 자라준 것 같다.

Photo by Kim Dong Won
2001년 5월 29일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발표회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생각해보면 아이는 어릴 때가 참 좋았다.
아마도 어릴 때가 좋았던 것은 그 엉뚱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집 아이들이나 아이들은 모두 엉뚱하다.
우리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을지로의 지하도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지하도에선 재생지로 만든 노트를 공짜로 나누어 주고 있었다.
문제는 노트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건네는 말이었다.
노트를 나누어주던 사람은 노트를 내밀며
“자, 공부 잘하지. 이 노트 가져가거라”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우리 딸은 손을 내밀다 말고 멈칫하더니
“전 공부 못하는데요”라고 말을 하며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에이씨, 몰라. 무조건 가져가.”
그날 우리는 아이 곁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2년 9월 24일
서울 천호동의 현대백화점 피코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6학년 때도 딸은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딸은 특히 스파게티를 좋아했었다.
현대백화점 꼭대기층에 피코라는 스파게티집이 있었는데
거기가서 아이거 하나만 사주고 먹는 걸 흐믓하게 보다가 같이 들어오곤 했다.
식당 주인이 보다가 안돼 보였는지 어느 날은 내 것까지 챙겨준 적도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3년 7월 21일 강원도 속초에서
중학교 1학년 때

중학생이 되면서 슬슬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살아보니 아이가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의 실수는 아이에게 상처가 되곤 했다.
부부 싸움 같은 것도 부모가 아이에게 저지르는 실수가 될 것이다.
우린 아이 앞에선 거의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말실수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딸은 자신에게 상처가 된 아빠의 말을 얘기하며 펑펑 운 적도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4년 8월 15일 강원도 영월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여간해선 어딜 함께 가자고 꼬셔도 따라나서질 않았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여름에
그녀의 친구들 가족과 함께 떠난 영월 여행에는 따라나섰다.
딸아이 또래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딸과의 사이가 예전같지는 않았다.
같이 살면 사는 곳의 공간적 거리는 똑같은데
심적 거리는 벌어졌다 좁아졌다 한다.
딸과의 심적 거리는 중학교 때 좀 많이 벌어지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5년 5월 8일 코스프레 행사장에서
중학교 3학년 때

우리가 자랄 때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것을 하고 다니고 있었다.
코스프레라는 것이었는데
만화의 등장 인물과 비슷하게 꾸미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만화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만화 속의 인물을 세상 속으로 끌어내 잠깐씩 함께 놀려고 했다.
그녀는 아이가 코스프레 나갈 때면 화장을 해주었고,
나는 아이가 보는 일본 만화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보라고
넉넉한 크기의 외장하드를 맞추어 주었다.
공부가 잘 될리가 없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5년 8월 13일 코스프레 행사장에서
중학교 3학년 때

몇번 코스프레 행사에 나가서
우리로선 도저히 수용이 안되는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더니
같은 해 중반쯤 액세서리를 만들어 행사장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거 만들 때 우리도 아이 옆에서 같이 거들어야 했다.
행사장에 가서도 어느 정도 사주어야 했다.
개중에는 부모 몰래 나오거나
성적을 어느 정도까지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오는 아이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요구를 하거나 아이가 하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05년 10월 28일 학교 축제에서
중학교 3학년 때

중학교 3학년 때는 정말 화려하게 보낸 것 같다.
한달 동안 기타를 배운 뒤 학교 축제 때 공연까지 했다.
너무 멋져 보여서
그냥 계속 음악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말해 보았지만
음악은 너무 힘들다고 했다.
기타 코드 잡을 때 손에 힘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꽉잡으면 손가락이 아프다고 했다.
음악은 그렇게 한달 동안 함께 하다가 스쳐지나갔다.

Photo by Kim Dong Won
2006년 5월 7일 동네의 식당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고등학교를 좀 다니더니 학교를 그만두면 안되겠냐고 했다.
그냥 검정고시봐서 대학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무슨 학교가 공부밖에 안해요”라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학교가 무슨 공부만 하는 곳이냐.
공부만 할 것 같으면 그게 학원이지 무슨 학교냐.
아이 얘기는 맞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그렇질 않았다.
그냥 학교를 다니라고 했고 아이는 우리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학교 공부가 잘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학원에 다니지 않는 두서너 명의 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1학년말 겨울 방학 때
일본 정부에서 실시하는 일본어 시험을 봐서 1급에 붙었다.
JLPT라는 시험이었다.
학원 한번 안가고 그냥 집에서 책으로만 공부하여 거둔 성과였다.
일본 만화책이나 만화영화, 드라마 보고 있을 때
저러다 보면 일본어라도 배우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이
당시에는 아주 불안했지만 결국은 아주 잘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때 아주 기뻤던 기억이다.
아이도 그때의 합격으로 자신감을 얻은 듯하다.
그리고 일본 유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2월 29일 동네의 노래방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벌어졌던 아이와의 사이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아이도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후반기부터 학원을 다니며 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수업을 다 받은 다음에
종로에 있는 일본어 학원을 다녀야 했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그녀가 거의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고
나는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때면 지하철에 나가 함께 들어왔다.
들어오며 잠깐 얘기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이 아주 좋았다.
집에 들어오면 밤 12시였다.
일본으로 유학가는데 필요한 시험인 EJU 시험을 처음으로 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6월 15일 서울 여의도 중학교에서 일본어 시험 보고 나올 때
고등학교 3학년 때

고3 시절의 한 해는 시험의 연속이었다.
EJU 시험이 두 번 있었고,
토플과 토익 시험은 거의 한달마다 한번씩 봐야 했다.
시험보려고 하는 대학측에서
일정 수준의 점수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 수준의 점수를 확보하여 응시 자격을 얻어야 했다.
3학년 때의 첫 EJU는 그냥 집에서 공부해서 봤지만
성적이 2학년 때보다 크게 오르질 않아 다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시험장에 데려다 주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2월 8일 인천공항에서
예비대학생

2008년 11월 23일, 와세다 대학의 본고사보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시험보려고 한 대학 중 첫번째 대학이었다.
월요일날 시험보고 수요일에 1차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아이에게서 붙었다고 전화가 왔다.
이때가 가장 기뻤던 것 같다.
그녀와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1차 합격자가 대체로 최종합격자가 되는 것이 통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딸이 귀국했을 때,
혹시 거기 원서만 내면 다 되는 데 아니냐고 농담을 했다.
딸은 킥킥대며 웃었지만 떨어진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잊지 않았다.
사실은 공부하는 건 별로 본 적이 없고,
어쩌다 방문 열어보면 일본 잡지를 들척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곤 했었다.
아니면 인터넷으로 만화를 보며 킥킥대고 있었다.
네이버의 만화를 즐겨보았던 것 같다.
그때마다 묻곤 했었다. 공부는 하고 있는 거냐.
그러면 딸은 말했었다. 꽤 열심히 하고 있거덩.
정말 열심히 했나보다.
전혀 예상도 안하고 있던 게이오의 서류 전형에도 통과되어
다시 해가 바뀐 1월 19일에 급하게 마련한 비행기표를 갖고
일본으로 나가야 했다.
와세다와 게이오에 모두 합격했다.
1월말에는 지난 해에 본 EJU 시험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돈으로 월 48,000엔의 장학금을 1년 동안 받게 된다.
현재의 환율로 대충 계산하면 총 800만원이 넘는다.
딸은 자기가 쓴 학원비는 다 뽑았다고 말했다.
최종적으로 와세다 문화구상학부(School of Culture, Media and Society)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2월 8일 일요일, 다시 일본으로 간다.
마지막 대학 시험이다.
좀 싼 곳으로 갈 수 없냐는 아빠의 말에 시험을 보기로 결심한 곳이다.
물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심적 부담이 많은 것 같다.
부디 잘치고 돌아오길. 크게 걱정하지는 말고.
일단, 와세다는 가게 되었잖아.
그것만해도 얼마나 대단한 일이야.
사실 와세다에 붙고 난 뒤
뒷바라지가 시원찮아 유학 생활이 너무 힘들지 않겠냐며
재수해서 국내의 왠만한 대학에 다니는 게 낫지 않겠냐고 슬쩍 물어봤었다.
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기엔 와세다가 너무 아깝지 않아요?”
내가 유학까지 보내면서 딸아이를 공부시키려는 이유는
어찌보면 딱 하나이다.
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니”라는 말을 믿는다.
아이에게 학벌이 아니라 자유를 주고 싶다.
내게 있어 대학은 자유를 준 곳이었다.
우리 시대는 특히 대학에서만 자유로웠다.
자유는 자유를 맛보면서 얻는다.
부디 많은 자유를 맛보고 오게 되길.

20 thoughts on “성장

  1. 안녕하세요. ‘상일 화원’으로 검색해서 들어왔다가, 블로그 글들 잘 보고 갑니다. 정말 행복한 가족이네요. 저도 미국 유학중인 학생인데, 저희 부모님 생각도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따님의 자유로움과 열정이 한국문화를 더 깊어지게 하는데 보탬이 되리라 믿어요. 건승을 빌어요.

    1. 들러주신 거 고맙습니다.
      저희 딸과 같은 처지군요.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 듯 합니다.
      고생으로 따지면 미국이 훨씬 클 듯.
      상일동 화원은 꽃사진찍고 꽃이름 익히러 자주나가요.
      동네 근처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예요.

  2. 문지와 아빠,엄마 멋진 가족이다^^^추카추카—
    친구로써 엄청 기쁘다 이거^^^
    그리고 문지에게 삶의 자유를 조금씩 조금씩 느끼게 해준 문지 아빠, 엄마에게 —
    쉽지 않은 여기세상에서 — 하옇튼 대단하고 우리 피곤한 일상을 깨우는 일이네–
    내가 기쁜 마음으로 한 턱 쏠테니
    시간내서 시골 내려오게나^^^

    1. 고마워.
      이제 고생이기도 하지뭐.
      타국에 가서 혼자 공부한다는게 어디 쉽기야 하겠어.
      그래도 얻는 건 많지 않을까 싶어.
      시간내서 내려갈께.

  3. 성장만 한 것이 아니라 장성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밑거름은 울나라에서만 유독 특이할 것 같은
    자녀교육을 하신 두 분이시고요.
    ‘많은 자유를 맛보고 오게 되길’ 기다리지 않고
    더 많은 자유를 맛보러 계속 떠나길 기대해 봅니다.

    1. 미국으로 가고 싶어 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거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기회되면 먼세상을 보고왔으면 좋겠습니다.

    1. 잘하고 계시지만 뭐든 기록해두는 버릇을 갖는게 중요하긴 한거 같아요. 암행님은 그리움을 잘 기록해 가는 것 같더군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그때도 아이를 잘 기록해봐요. 기록하면 유심히 관찰하게 되기 때문에 사랑도 더 깊게 보게 되요. 요즘은 블로그에 그때그때 기록할 수 있어서 더 좋은 거 같아요.

  4. 사과나무님이 잘보셨읍니다.

    한국의 여유없이 사는 사회구조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신조로 흔들리지 않게 사시며
    따님을 또한 그리 키우신 두분께 기립박수 드립니다.

    아! 저도 그리 못하였던 아쉬움..
    이제라도 노력해 보겠다는 마음이 가득 합니다.

    따님이 일본에서의 생활을 아주 보람있게 보낼것 같읍니다.
    세 분 모두에게 축하 드립니다.

    1. 고맙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었는데… 붙고나서 그 얘기를 했더니 아는 사람이 붙었으니까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거라고 하긴 했습니다.
      어쨌거나 붙으니까 기분은 좋더군요.

    2. 딸아이 이름이 문진이라고 했지요?
      문진이가 아주 여유가 작작해 보입니다.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하나요?
      혹시 나중에 미국으로 오면 볼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연이란 모르는 법.. 워싱턴 디시에 살고 있읍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싶은 거 모~두 하길..
      예쁜 문진이 보고 싶어서 두 분 어쩐담??

    3. 문진이가 아니고 문지예요.
      글과 앎을 갖추라고 그렇게 지었지요.
      우리말로 하면 그람이가 됩니다.
      미디어와 방송 쪽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군요.
      아무래도 사회학 공부를 많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편지보내면서 보고싶은 마음을 달랠까 생각중입니다.

    4. 죄송해요.
      문지공주 무지 예쁜공주
      성격에 많이 맞을 것 같읍니다.
      여유있고 창의성을 요하고..
      일본어는 많이 하지요?
      다시한번 축하 드립니다.

    5. 좀 놀랍기는 했어요.
      대학 때 학교 방송국에서 일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일은 관둬 버렸지만요.
      가끔 핏줄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5. 동원님과 동원님의 ‘그녀’ 그리고 따님…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한국의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가도록 묵묵히 바라볼 수 있었던 ‘용기’에 박수 드립니다. 딸을 믿어주는 든든한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길이 열리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보는 대학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세 분, 참 잘하셨습니다.

    1. 고맙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우리 딸이 가는 길이 괜찮을 거야라는 그 믿음 하나로 버틴 것 같습니다. 사고가 자유로운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싶습니다. 그런 느낌이 조금씩 나기 시작하긴 합니다.

  6. 사진의 표정들이 몇 줄의 글을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아요.
    참 신기하네요.
    예쁘고, 또 부럽고요.

    마음에 부담이 많이 되겠지만,
    지금까지도 너무 잘했지만
    마지막 시험을 제일 잘 치기를 빌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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