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4월 27일 서울 능동의 어린이대공원에서


그녀랑 싸웠다.
다음 날 둘이 얘기를 나눠보니
나는 그녀가 무엇인가를 박박 우긴 것만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는 내가 버럭 화를 낸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우긴 것만 기억하고 있으니
분명한 물증을 들이밀고도 상황을 뒤엎지 못한 것에 대한 분이 풀리질 않고
그녀는 내가 화를 낸 것만 기억하고 있으니
일단 화부터 내고 보는 나의 태도가 자신의 인격에 대한 모독만 같아서
역시 물러서기가 쉽지 않다.
만약 싸우고 나서
내가 화를 낸 것만 기억했다면 그녀에게 많이 미안해졌을 것이고
그녀 또한 자신이 우긴 것만 기억했다면 마찬가지로 미안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싸우고 난 뒤끝에선
내가 화낸 것은 기억이 안나고
그녀도 자신이 우긴 것은 기억이 안난다.
싸움 뒤의 화해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나눈 얘기를 정리해보면
둘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 인 듯 싶다.
하나는 그녀의 경우엔 우기지 않는 것이고,
나의 경우엔 화내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방법이다.
좋긴 할 것 같은데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또다른 하나는 살다보면 우길 때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살다보면 화낼 때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우기고, 나는 화내면서,
그냥 그때마다 한번씩 싸우면서
살다보면 싸울 때도 있지 하고 싸우면서 사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싸우면서 함께 사는 삶은 편치가 않다.
20년이나 함께 살았는데도
남녀가 같이 산다는게 여전히 쉽지가 않다.
결론은 싸우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기지 않고 화내지 않고 참고 살다가
가끔 싸워야 한다는 정도에서 맴돌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딸과 화상 채팅을 하면서 말했었다.
“딸아, 우리 너 유학간 뒤로 아직 한번도 안싸웠다.”
그래 올해 목표는 싸움을 세 번 정도로 줄이는 것이다.
벌써 두 번 정도는 한 것 같으니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초과달성하여 좋을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니 그렇다.
싸움을 해결하는게 해결책이 아니라
줄이는게 해결책이라니
결혼엔 정말 답이 없다.

15 thoughts on “기억

  1. ^^; 그래도 싱긋싱긋 미소가 지어지네요~
    정말 남자랑 여자는 다른가봐요. 20년이나 닮아가면서 지내는데ㅎㅎ

    저도 싸우는 건 정말 싫어서 아예 피하고싶어하는데,
    참…. 어렵습니다~ ^^;

    1. 남녀 사이의 싸움이란게 이상해서
      둘은 싸우고 있는데 그 싸움이 사랑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싸움이 싸움으로 보이면 그때는 정말 심각한 사태죠.
      항상 싸우더라도 남들 눈에는 염장지르는 사랑으로 보이는 싸움을 하시길.

  2. 아직 덜 커서 그렇습니다.
    싸운다는 건 지금도 크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자신이 자라지 않으면 따님이 크고 있을 겁니다.

    덧. 물베는 칼은 이미 20년 전에 실용화 됐답니다.ㅋ

  3. 저희부부도 지난주에 크게 한판 떴답니다.ㅋ
    결혼10년만에 처음있는 일이었죠.
    싸움끝에 나와서 대여섯시간 혼자 돌아다니다가 들어왔더니
    아이들 데리고 저녁을 먹고 들어왔더라구요.
    다음날까지 말한마디 없이 쌩~ 찬기운이 돌았었는데
    저녁에 1박2일이라는 프로를 같이 보다가
    웃는바람에 풀어져버렸지 뭐예요.
    그런데 풀어지자마자 평소 말많은 울신랑
    전날 아이들 데리고 저녁 먹으러가서 우스운 일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바로 꺼내는거예요.
    그거 말하고 싶어서 하루를 어찌 참았을까 싶은게….ㅋㅋ
    뭔일로 싸웠는지 생각도 안나고..
    10년만에 큰건인데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어요.
    역시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가 맞나봐요.^^;;

    1. 보통 그녀는 싸움이 없으면 그걸 사이좋은 사이로 보질 않고 누가 일방적으로 참고 살았다고 보던데… ㅋㅋ
      뭐 칼로 물베기 정도의 싸움이라면 해도 상관없을 듯 싶어요.
      저희는 칼로 물베기가 아니라 칼로 무베기. 가끔은 아주 채를 썰 정도로 간다니까요.

  4. 저 새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군요^^

    동원님이 버럭이라는건 의외네요.
    저희집에도 알아주는 버럭이 계시거든요.
    그게 참 맘에 안들고 좀 제발 고쳤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언젠부턴가 그냥 넘어가자 생각하기로 했어요.
    잠깐 그러는건데 뭐..
    그래도 버럭할 땐 밉상이예요.
    근데 엄마빠가 말이 좀 언쨚게 오고간다 싶은면 울아들이 싫어해요.
    “워워~ 거기까지” 하고 나서거든요. 요즘은 아빠한테 막 뭐라하구요 ㅎㅎ
    울딸은 “엄마아빠 , 뭐하셈?” 하고 한마디 툭 던지고요.
    그래서 크게 싸울 수도 없다네요.

    1. 술취한 사람이 술취했다고 하면 비틀거리면서도 안취했다고 하고… 화내는 사람은 화를 벌컥 내면서도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러냐고 하고… 박박 우기는 사람은 우기는게 아니라 정말 그런거라고 하면서 계속 박박 우기고…
      어제 인간의 착각에 관한 다큐를 세 편 봤는데 싸움이 일어나는게 남들이 나와 똑같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일어나는 거 같아요. 복제 기술을 통해 나랑 똑같은 인간을 하나 복제한 뒤에 같이 살아야 별 문제 없지 않을까 싶었어요.

  5. 20년쯤 함께산 연륜으로 져 주시죠.
    참 쉽죠~잉(봉숭아학당 박지선 버전)

    근데, 버럭동원님과 박박기옥님은
    정말 남 얘기 아닌 것 같아요.
    저희 부부 자화상 보는 줄 알았습니다.

  6. 울 딸이 한 뒷말은 왜 빼슈?
    “기적이야~” ㅋㅋㅋ

    오늘 어버이 날이라고 콩그레츄레이션 해주더이다.
    나는 부부는 싸워야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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