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섞여 놀다 — 진수미의 신작시 다섯 편

『현대시』 2009년 5월호에 실린
진수미의 사진과 시의 일부

1
나는 시를 마주하면 시를 읽으려 든다. 거의 항상 그렇다. 진수미의 신작시 다섯 편을 건네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려 들었다. 당연한 얘기같지만 읽는다는 행위는 해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부른다. 그건 분석의 힘으로 시의 몸을 더듬어 보려는 행위이며, 혼란스러워보이는 시의 질서를 가지런하게 줄세우고, 시에 어떤 명확하고 분명한 의미를 이식하려는 행위이다.
진수미의 시집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에 실린 시 한편에서 비유를 구해보자면 읽는다는 행위는 항상 의자 하나가 모자라게 되어 있는 ‘의자놀이’를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될 수 있다. 마치 호각소리가 울리면 ‘필사적으로’ 의자를 “하나씩 끼고 앉”아야 하는 의자놀이처럼 우리는 시를 마주하면 그것을 읽고 어떤 의미를 시 속으로 들이밀어 그곳에 앉히려 한다. 비유를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말을 바꾸자면 우리는 어떤 의미가 되어 시 속으로 들어가 앉으려 한다. 그렇게 의자에 앉는 것에 집착했을 때의 폐단은 의자가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꾸만 앉는 것에 집착을 하면 의자는 앉은 우리를 “놓아주질 않”는다. 결국 우리는 의자에 묶이고 만다.

다섯 살 때인가 의자가 나를 삼켰어요.
팔걸이에서 휘휘 넝쿨손이
몸을 감았어요.

아직도 놓아주질 않아요.
—「의자」, 부분

시를 읽으려 드는 행위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와 같은 경우 우리는 시를 마주했을 때 전전긍긍하게 된다. 앉을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시가 난해하거나 어려우면 그러한 조바심은 더욱 커진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시를 함께 하는 방법이 반드시 시를 읽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시를 읽는다는 것이 시와 함께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양보를 해도, 그 읽는 행위 뒤에 해석에 대한 집착을 불러들이지 않고 시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내게 건네진 다섯 편의 시 가운데 한 편의 시 속에서 시인 진수미는, 내가 그의 시를 읽듯이, 그도 자신의 시가 아닌 누군가의 시를 읽고 있었다. 시의 말미에 곁들여 놓은 주석에 의하면 그건 황병승의 시였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시인이 시를 읽으면서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뒤죽박죽”으로 “시집을 넘기”면서 시를 읽다가 시의 제목 하나를 잘못읽는다. 그는 시의 제목을 “고양이(가) 자라는 소년”으로 잘못 읽었으며, 그렇게 잘못 읽자 소년의 안에서 고양이가 자라기 시작한다. 잘못읽은 시의 제목이 촉발시킨 상상은 시를 쓴 황병승을 고양이로 변신시키기에 이른다.

너만의 새로움
병승 괴물은 어디서부터 변신을 시작하나
눈에서 코, 입으로? 그건 재미적고
귀가 진행되다 손가락으로 전이
얼룩덜룩 얼기설기
그래 그렇겠지 노오란 안광을 흘리며
털북숭 네 무릎을 쭈욱 뻗는 너
—「고양이가 자라는 소년—병승에게」, 부분

사실 황병승에겐 아무 죄가 없다. 문제의 발단은 진수미의 오독(誤讀)이다. 그러나 진수미는 자신의 오독을 그대로 밀고 나가 상상 속에서 그 오독을 키우고, 결국은 그 상상이 황병승을 “노오란 안광을 흘리며/털북숭 네 무릎을 쭈욱 뻗는” 고양이로 변신시키기에 이른다. 변신은 계속되어 황병승은 “내일이나 모래쯤/전화를 넣으면 야아옹”하고 고양이 울음을 발하며 전화를 받아야하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하여 진수미의 상상 속에서 황병승은 이제 “수염을 바르르 떨면서 수미냐옹?”하고 전화를 받고 있으며, “핸드폰 액정을 발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완전히 고양이로 바뀌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물론 시인은 시를 다시 읽었을 때 자신이 제목을 잘못 읽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이 잘못 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다른 페이지를 훑는 사이/‘가’를 밀치고 ‘와’가 돌아”와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이 정도면 그 시의 원래 제목이 무엇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것은 짐작대로 「고양이와 자라는 소년」이다. 문자를 따라가며 시의 해석에 집착할 경우에는 ‘가’와 ‘와’는 큰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 「고양이가 자라는 소년」이라고 하면 소년의 내부에서 고양이가 자란다고 해석될 수 있지만 「고양이와 자라는 소년」이라고 하면 고양이와 함께 자라고 있는 소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멍청한 조사들/와나 가나/그게 그거지”라고 말하며 오히려 제대로 돌아와 자리를 잡은 조사를 비야냥거리며 놀린다. 나는 시인이 시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날개를 펼친 뒤 시속을 날아다니며 시와 함께 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혹 시를 읽으려 들지 말고 시와 함께 노는 것이 시와 함께 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진수미는 “사람이 안 볼 때/움직이고 춤을 추는 인형들이나/등짝에 글자 새기고 돌아앉아 있는/서책계(書冊界)나 매한가지”라고 말한다. 서책계란 말의 자리엔 시집이란 말을 바꿔넣을 수 있을 것이다. 진수미의 눈에 시집은 의미를 간직한채 아름답게 조탁된 시문들을 잘 정리하여 줄세워 놓은 세계가 아니라 글자들이 “흥청망청 섞여 놀”고 있는 세계이며, 그러다 “낙오된 글자들”이 나오기도 하는 세계이다. 시인은 자신이 잘못 읽어놓고는 그것을 낙오된 글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붙박힌 글자에 의미를 구걸하며 집착하느니 낙오된 글자와 노는 것이 오히려 흥겹다. 그러니 시의 세계를 마주했을 때는 읽으려 들지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 시와 함께 놀아야 한다.

2
과연 나도 진수미가 시와 놀았듯이 그의 시를 읽으려 들지 않고 시와 함께 놀 수 있을까. 나는 진수미의 시 「속독가」를 펼쳐든다.
그냥 있는 그대로 제목의 뜻을 풀면 빠르게 읽듯이 부르는 노래나 무엇인가를 빠른 속도로 읽는 사람을 뜻할 것이다. 제목이 풍기는 속도는 빠르지만 시는 “생은 느리구나”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생은 느리구나
광장처럼
멈춰선 비둘기
희미해지는 중앙선 위로
오지 않는 버스
—「속독가」, 부분

“오지 않는 버스”라로 말로 미루어 시인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이며, 시인이 기다리는 버스는 날이 어두워져 중앙선 차로가 희미해져 갈 때까지 오지 않고 있다. 나는 시인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시인의 옆에 자리를 잡고 함께 버스를 기다려본다. 시인이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지만 차들은 끝없이 거리를 지나간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그렇게 그의 옆자리에 앉아 보았더니 오지 않는 버스의 느린 속도와 지나는 차들의 빠른 속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빠른 속도는 오지 않는 버스의 느린 속도를 더욱 뒤로 쳐지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버스는 일률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어떤 버스는 자주오고, 어떤 버스는 아주 띄엄띄엄 온다. 아마도 그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그 노선의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면 자주 올 것이고,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노선의 버스는 아예 없어지는 일도 있다. 버스의 속도를 결정짓는 것은 알고 보면 사람의 수이다. 단 한 명의 승객을 위하여 노선을 고집하는 버스는 없다. 그러나 예술은 가끔 그런 길을 간다. 예술은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하여 공연을 고집할 때가 있다는 전설같은 얘기가 있다. 이용하는 사람들의 많고 적음에 맞추어 빠르게 오거나 늦게 오는 버스의 세상에서 보면, 단 몇 사람이 기다리는 예술의 세계는 와도 아주 느린 속도로 올 것이다. 나는 시인의 옆에 앉아 요즘 세상의 속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그러다 둘러보니 ‘전광판’이 보인다.

전광판 글자들이 달리네
스톱와치를 손바닥에 감춘 트레이너는
저녁의 트랙 그 언저리에 서 있다 어색하게 콜록대며
아무 때나 박수치는 세계로 불시착한 지휘자처럼
—「속독가」, 부분

전광판에선 “글자들이 달리”고 있다. 빠른 속도감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 전광판은 광고판이 아닐까 싶다. 그 광고판엔 “스톱와치를 손바닥에 감춘 트레이너”가 “저녁의 트랙 그 언저리에 서 있다.” 스톱와치라니 웃기지 않는가. 말을 그대로 풀면 시간을 정지시키는 시계인데 우리는 그 스톱와치 앞에서는 시간을 정지시키며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시의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진수미의 시 「거대한 오프너」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언급한 시에서 진수미는 “안락사는 더 좋아/죽음이 안락하다잖아/기막힌 조합이잖아”라고 말한다. 말과 현실은 어긋나는데 우리는 종종 말 속에 안주하며, 시인은 그것을 비아냥거린다. 스톱와치란 말을 마주했을 때, 나도 스톱와치에 대해 그처럼 비아냥거려 보고 싶었다). 스톱와치는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시간보다 더 빨리 달리라고 사람들을 채근한다. 속도를 채근하는 것이 현대 사회이고, 그 속도를 채근하는 사회에선 모든 것이 다 함께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그 빠른 속도의 채근에 쫓길 뿐이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인은 이제 걱정을 하고 있다. 이러다 아침도 “쉬이 오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세상은 속도를 채근하며 빨리 달려가는 것 같지만 그 빠른 속도의 세상이 모든 것을 빠르고 쉽게 읽어내진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발 한쪽을 질질 끌며 겨우겨우 따라가는 ‘난독’의 세상이 요즘이다. 나는 산문의 상상력으로 시인의 옆에 앉아 시 속에서 잠시 놀고 있었다. 시인처럼 시로 놀 수는 없어도 산문으로 이리저리 상상을 풀며 시 속에서 노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듯 보였다.
이제 난 또다른 시 「밤의 아이들」로 넘어간다.
이번에 나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슬쩍 스며든다. 시의 어디에도 놀이터란 말은 없다. 그러나 내가 “아이들이/그네에서 다리를 흔들다/하나둘 사라진다”는 말을 부풀리자 아이들이 있던 그곳이 놀이터가 된다. 저녁이 늦어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시인은 내게 속삭인다. 그것이 ‘흑마술’ 같다고. 그렇게 날은 어두워졌다.

심장은
밤의 펌프질을 시작하고

후두둑
후두둑
물들이 어둠 쪽으로 이동하는 때
—「밤의 아이들」, 부분

갑자기 비가 내린다. 시인은 “물들이 어둠 쪽으로 이동하는 때”라고 말했지만 나는 “후두둑/후두둑” 소리에 기대어 시인이 말한 ‘물’을 비로 환치했다. 그러니까 시인이 내게 속삭인 “물들이 어둠 쪽으로 이동하는 때”는 내게 있어선 비가 내리는 밤이다. 나는 그 정도의 표현은 얼마든지 시인의 권리로 양보할 아량을 갖고 있다. 또 생각해보면 낮이라면 비가 내리는 것이 분명하겠지만 밤엔 소리만 확연하다. 그러니 밤의 비는 실제로 물들이 비를 가장하여 후두둑 후두둑 거리며 어둠 쪽으로 이동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내가 당혹스러워진 것은 다음 순간이다. 그 다음의 이동 공간은 어떤 차 안이었고, 그 차 속엔 “졸다 깬/운전자”가 있었다. 차창에는 빗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인이 내게 속삭인다. 저 운전자의 “두 눈에는” 차창을 흐르는 빗줄기가 “아이들의/뭉개진 검은 이마”로 보일 것이라고.
시에서는 종종 전이가 발생한다. 그러한 전이가 시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도 전이는 발생한다. 가령 사랑이 장미 속으로 옮겨가거나 실연의 슬픔이 빗줄기로 옮겨가는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시에선 그러한 전이가 좀더 창조적이고 새롭게 이루어지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전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가끔 그러한 전이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때도 있다. 아이들이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놀이터나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자 오기 시작한 비까지는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시인은 그 아이들을 차창을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이르기까지 고집스럽게 전이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 동안 붙들고 있는 밤의 아이들에 대해선 시원스럽게 단서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시인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나도 진수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나는 이쯤에서 시를 빠져나온다. 이번에도 나는 시속에서 잠시 머물며 노닥거렸다.
이번에 난 「수로 안내인—첫 번째」를 펼쳐든다.

물들은 엉큼하다
공격에 주의하시라는
말씀

알고 있어요
세상 수로의 모든 물들은 밤새
붇고 넘치고 졸고 밀려오고 밀려나고
—「수로 안내인—첫 번째」, 부분

나는 시인 “엉큼하다”고 말한 ‘물’이 물이 아니라 눈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시인이 “물들”과 함께 엮어놓은 말들 때문이다. 나는 “밤새”라는 말에선 밤새 울다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붇고”라는 말에선 너무 많이 눈물을 흘려 퉁퉁부은 눈을 떠올리고 있었다. “졸고”라는 말에서도 내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졸고 있는 눈이었으며, 그 눈을 울다 졸다하고 있었다. 그럼 왜 시인은 굳이 눈물이라는 말을 버리고 물이라고 말한 것일까. 눈물은 이중적이다. 눈물은 눈물이 쏟아지는 현실의 한편에서 또 그 눈물을 감추고 싶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우는 있다. 눈물이 쏟아지는 한편으로 또 동시에 눈물을 감추고 싶은 경우가. 그 이중의 감정이 눈물이란 말을 밀어 내고 물이라는 말을 불러들인다. 눈물이라고 하면 그것은 나의 것이 되지만 그것을 물이라고 말하는 순간, 눈물은 바깥으로 밀려나가 어느 정도 객관화된다. 시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감추고 싶어한다.
시의 맨 뒤에 나오는 “굳은 눈물”이란 말은 내가 물이란 말의 옆에서 눈물을 상상하는데 더욱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세상의 어떤 노래가 머리채를 잡아채도
들리지 않아요
촛농 대신
굳은 눈물로
봉인된 두 귀는
—「수로 안내인—첫 번째」, 부분

“굳은 눈물”이란 말을 마주했을 때 내가 상상한 것은 두 가지이다. 그 중 하나는 동굴의 천정에 매달린 종유석이었다. 이 경우 종유석은 내겐 너무 오랜 세월 하염없이 흘리다 아예 굳어져버린 눈물이다. 다른 하나는 너무 많은 눈물을 쏟아 뻑뻑할 정도로 굳어진 눈이었다. 어느 것이나 오랫동안 흘린 눈물로 귀결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눈물이 굳어 두 귀가 봉인이 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린 시인을 상상했다. 우리는 보통 슬플 때는 노래로 그 슬픔을 위로하는 경우가 있지만 “세상의 어떤 노래가 머래채를 잡아채” 흔들며 그 노래를 들려주려 해도 슬픔이 딱지가 앉듯 두 귀에 굳어 봉인이 된 시인은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깊고 오래 울고 있었던 시인을 상상했다. 나는 시인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려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눈물의 사연은 시의 중간에서 스친 “그이”라는 말과 “떠나고 있거든요 저는”이란 말에서 짐작이 갔지만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이제 다섯 편의 신작시 가운데 마지막 시이다. 나는 「수로 안내인—두 번째」를 펼쳐들었다.
때로 시는 광풍과도 같다.

노란 浮氣를 혐오하는
쥐들은
새까맣게
꼬리를 꼬리를
물고 늘어뜨리고 물고 드리우고
달로 달로 오르막을 재촉하죠
어금니를 뾰족뾰족 세우고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들은
네모난 상자
이 새벽의 퀴즈—
—「수로 안내인—두 번째」, 부분

어떠신가. 그냥 이 한 구절을 읽는 것만으로 말들이 머리 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여 회오리 바람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가. 나는 처음엔 시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내를 생각했다. 그 사내가 머리 속의 어지러운 바람을 누그려뜨려 주길 바라면서. 그 사내는 바로 어느 마을에 쥐떼가 창궐하자 피리를 불어 그 쥐떼들을 모으고 강으로 데려가 빠뜨려 죽였다는 동화 속의 그 사내이다. 하멜른의 그 사내가 이 싯 구절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면 머리 속의 회오리 바람은 가라앉는다. 그러나 하멜른의 사내를 상상하며 바람을 일정한 방향으로 안정시켜 보려 했던, 그러니까 시를 어떤 일정한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설명해 보려 했던 나의 시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인은 갑자기 “이 새벽의 퀴즈”라며 “어금니를 뾰족뾰족 세”운 그 쥐들이 “무엇을 보았을까요”를 묻더니 “네모난 상자” 하나를 내놓으며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상자를 무엇은 네모다라고 할 때의 그 네모로 생각했다. 그것은 말을 채워넣어야 하는 네모이다. “이 새벽의 퀴즈”라는 말도 그 네모를 그 네모로 상상하는데 한몫했다. 그러나 시인은 내 예상을 보기좋게 배신하고 실제의 상자처럼 그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갑자기 ‘토네이도’가 불어닥쳤다.

상자가 열리고 토네이도는 불어닥치고
너와집 지붕처럼 활자들이 차례차례
공중으로 솟구치는데
도대체 내게 남은 건 뭐죠?
오크나무 책장을 붙들고 광풍을 거스르는
똑딱똑딱
열 손가락 같은 초침들—
—「수로 안내인—두 번째」, 부분

시 자체가 갖고 있는 상상의 진폭이 너무 넓어 나는 그 상상을 따라잡기 보다 활자들이 불러일으키는 그 광풍을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다 망연해져 버렸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동안 시속에 배를 젖는 안내인을 두고 그 안내인을 따라 시의 수로를 둘러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수미의 시에 있어선 그런 안내인은 과거의 일이다. “뱃길을 젖던 안내인”은 그의 시 속에선 금방 찾아지지 않으며, 찾았는가 싶어도 “곤돌라 안내인”은 “저 혼자/낮으로 낮으로 달아나고 있”다. 시를 밝히려면 스스로 안내인이 되어 곤돌라를 저을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냥 시 속에서 되는대로 놀던가.

3
때로 해석하고 분석하여 시들을 깨끗하게 해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아니 그런 방법으론 다가설 수 없는 시들이 있다. 진수미에게 있어 시란 정련된 언어들이 가지런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글자들이 “흥청망청 섞여 놀”고 있는 세계이다. 그런 세계에서 시와 함께 하려면 시를 기존의 방법과 시각으로 읽으려 드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 같다. 대신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그 세계 속을 날아다녀야 한다. 읽는 행위는 상상하기 보다는 글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의미의 낱알을 줏어먹도록 만든다. 상상은 글자의 행간 사이를 날며 시의 세계에서 노는 또다른 시읽기의 방법이다. 진수미는 자신이 몸소 시범을 보이며 우리에게 말한다. 시를 읽으려 들지 말고 자신의 시 속에 들어와서 놀라고. 나는 그의 제안대로 그의 시 속에 들어가서 놀았다. 그러나 노는게 쉽지는 않았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그건 남다른 즐거움이었다.
(『현대시』, 2009년 5월호)

4 thoughts on “시와 섞여 놀다 — 진수미의 신작시 다섯 편

  1. 누군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화이트 와인 혹은 레드와인으로 마셔야 하는지, 바닥이 넓은 잔에 따라야 하는지, 혀를 굴리며 음미하듯이 마셔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라고요. 그냥 자기 입맛에 맞는 와인을 편한 잔에 따라 평소대로 완샷을 하라더군요. 그게 와인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는 와인에 가까워진다네요.

    저는 시, 그림, 소설 같은 와인을 소주잔에 따라 마시고 있습니다.

  2. 햐~ 아는 걸 안다고 하시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시는 훌륭한 ‘곰돌라 안내인’인 동원님을 따라 둘러보는데도 힘들어요.

    가끔 시를 이해해 보려고 하는데 ‘전이’가 너무 심해서 도통 알 수 없는 광풍에 휘말릴
    때는 저는 ‘무슨 뜻이 있겠지…’ 보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계시네’ 하면서 제껴둘 때가 있거든요.

    동원님은 그런 범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찝어내시는 곤돌라 안내인이시라니까요.
    이런 글 기다렸는데 반갑게 잘 읽었어요. 시인을 만나시거나 통화를 하시고 단서를 찾으시면 제게도 귀뜸 좀 해주세요.^^

    1. 시인들이 자기 시의 비밀을 좀 털어놓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시의 이해에도 도움이 될 듯하구요. 딱 한번 봤어요. 시인이 자기 시의 비밀을 털어놓는 경우를. 108번째 남자라는 시집을 낸 이영주라는 시인이었죠. 시집 가운데 단 한 편의 시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하는 얘기가 뒤쪽에 실려있더라구요. 어릴 적의 개인적 경험이었는데 그걸 보고 나니 그렇게 어려웠던 시에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어요. 이게, 이제는 시평을 쓰려면 시인을 만나 이것저것 좀 물어봐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사실 동시대를 살아도 모르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아홉소씨가 알고보면 I hope so 인 시대이다 보니… 그래도 젊은 시들이 더 재미나요. 만나면 물어보고 애프터 서비스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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