쫀쫀하고 벼멸구만도 못한 하나님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8월 10일 우리집 옥상에서

그녀는 교회에 다니고 나는 교회에 다니질 않는다.
물론 가끔 그녀와 함께 교회에 가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 그녀가 다니는 교회의 장애인 봉사부에서 수련회를 떠나거나
또는 무슨 행사를 가질 때 사진 찍어주는 사람으로 함께 한다.
교회의 일반적인 행사 때도 사진을 찍어주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좀 드물다.

그녀가 교회를 다님으로해서 내게 유익한 점은
그녀가 교회 사람들에 대한 일차적 필터가 되어 준다는 점이다.
즉 그녀는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걸러낸다.
그녀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내 까다로운 성미가 자주 불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에는 아슬아슬하고 속좁은 성격의 사람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을 걸러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나보다 더 마음이 넓은 사람들을 찾아내며
그때쯤 나는 그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함께 한다.
그녀의 필터는 아주 성능이 좋은 편이어서
대개의 경우 나는 그렇게 만난 교회 사람들에 대해
그들과의 인연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그들 곁에서 술을 한잔 걸쳐도
내가 마시는 그 술의 취기와 즐거움을 그들의 곁에 용납해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함께 술을 마시면서도
그 술 속에서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하긴 한갖된 내 눈으로 보자면
술 한잔 먹었다고 흔들리는 믿음이라면
그게 무슨 믿음인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세상살이가 항상 그렇게 원활하게 돌아가진 않는다.
가끔 그 분들과 만나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부수적 만남에 부딪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종종 갈등이 싹튼다.
최근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모임에 함께 한 한 분이
아는 사람이 뇌종양이 의심되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아주 힘겨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얘기 중에 마치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
그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기회인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은 그것을 전도의 기회로 보고 있는 듯 했다.
내 심사가 뒤틀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건 너무 한 발상이 아닌가.
사랑으로 충만하셔야할 하나님이 무슨 신도 한 명 더 확보하겠다고
나약한 인간을 코너로 몰아넣고는
너, 나 믿는게 어떻겠니 하고 협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참 쫀쫀하기 이를데 없는 하나님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람을 힘겨운 상황으로 몰아넣고
그걸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일 기회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들이 믿는다면서,
왜 그 깊은 믿음의 하나님을 그렇게 쫀쫀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일까.
자꾸만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우리들만도 못한 쫀쫀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툭툭 입을 튀어나가려 하고 있었다.
말을 가려야 하지 않을까.
또 말이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다면
그 말을 낳고 있는 마음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 머리 속에선 그 사람의 말과 다른 말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뇌종양이 의심되는 힘겨운 상황에 처했어요.
검사를 앞두고 있다고 해요.
이럴 때면 무력해지곤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나도 내 입의 풀칠이 바쁘다 보니
시간내서 힘겨워하는 시간을 함께 해주지도 못해요.
그나마 이럴 때 내가 있는 지금의 자리에서
큰병이 아니길 빌어줄 수 있다는 것이 큰 다행처럼 여겨져요.
그저 속수무책은 아니니까요.
나의 기도가 무슨 힘이 될까도 싶지만
그렇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의 힘에 의탁해 나의 기도를 보태주고 싶어요.
여러분들도 같이 좀 기도해 주세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아닌가.
그 사람도 속마음은 그랬을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그 사람이 뱉아놓은 말과
그 말 속의 쫀쫀한 하나님에 한번 뒤틀린 마음은
모임내내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 불편한 심기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걷히질 않았다.

오래 전에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김종일 목사란 분한테 들은 얘기였다.
교회가 서울 교외에서 농사를 짓는 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교인 중에 농사를 짓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앙이 지나쳐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며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결국 주변의 농약친 논에서 급거 대피를 한 벼멸구들까지
몽땅 다 그 집의 논으로 몰려들었고
그 바람에 그 집 농사는 쫄딱 망했다고 했다.
그 분은 말씀하셨다.
신앙이 길을 잘못 잡으면
하나님을 벼멸구만도 못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그 사람은 아마도 열심히 기도했을 듯 싶다.
기도의 힘으로 벼멸구를 물리치려 하지 않았겠는가.
스스로는 하나님을 벼멸구만도 못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 하나님에게 벼멸구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한 꼴이 되었으니
참 모양새가 우습다.
또 벼멸구만도 못한 그의 하나님이
벼멸구를 물리치지 못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듯 싶다.
아마도 신앙의 길을 제대로 잡았다면
농약을 쓰는 것이 사람들 몸에 해로우니
유기농과 같은 농법을 위해 땀을 흘리는 길을 택하게 되었을 것이란 것이
그 분이 덧붙인 말이었다.
조심해야 할 듯하다.
괜히 감기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가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동네 병원의 의사만도 못한 하나님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괜히 우리 아이 이번에 시험 잘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가는
그 공평하신 하나님을
강남의 쪽집게 과외교사만도 못한 하나님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힘겨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 앞에서 그 사람을 교회 나오게 할 기회로 삼으려는 전도의 생각이 앞서면
그 순간 당신들이 믿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코너로 몰아놓고 교회나오라고 협박하는
쫀쫀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
왜 믿는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쫀쫀한 하나님, 벼멸구만도 못한 하나님으로 만드시는가.
그건 오히려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가 아닌가.
이상한 것은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위를
깊은 신앙의 발로인 것처럼 말한다.
보통 불감증이 아니다.
나는 진정으로 지워야할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불신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그런 불감증이 아닌가 싶다.

나약한 인간이 힘겨운 상황을 눈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께 의탁하여 기도를 올리고 소망을 비는 것은 탓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 기도가 일정선을 넘기면 하나님이 쫀쫀해진다.
조심해야할 일이다.

다행히 그녀가 정말 사람 좋더라며 소개했던 그 모임의 그 분은
마지막 기도 때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 분은 우리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름을 통해 당신께 눈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기도 속에 섞인 그 짧은 한마디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역시 그녀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

믿는 사람들이여,
믿지 않는 내가 당신들의 하나님을 받아들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당신들의 하나님을 존경하며 살게 해달라.
당신들의 하나님이 신도 하나를 더 확보하기 위해
인간을 코너로 모는 패권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가 믿지 않는 사람임에도 그를 위해 믿는 사람들이 모두 기도하게 해주는
사랑의 하나님임을 보여달라.
당신들이 스스로 짓밟아 쫀쫀하게 만들어 버리는 하나님이라면
믿지도 않는 내가 어찌 존경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집의 옥상에 올라가면 한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가끔 장마철에 그 위로 구름이 몰려있다 가곤 한다.
믿는 사람들 눈에는 그 구름 위의 환한 빛만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 밑의 먹구름만 보인다.
더구나 내 눈에 그 먹구름은 믿는 자들이 피워올린 마음의 먹구름이다.
빛은 우리의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것만 쳐다보고
정작 자신들이 지우면 지울 수 있는 그 먹구름은
자신들의 것이 아닌양 한다.
우리들 마음 속의 먹구름을 지우면
자연스럽게 빛은 세상 모두의 것이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이상하게 그 모임이 있던 날,
날씨가 많이 흐려있었다.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날씨가 마음을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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