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나무 잎의 등뼈에 대한 진단 소견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5월 19일 우리 집에서
배나무 잎

아, 녜, 드디어 등뼈 촬영 사진이 나왔습니다.
이미 말씀 드렸다시피
저희 병원에선 방사선이 우리 몸에 해롭다는 점을 고려하여
등뼈 촬영 때 엑스레이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순수 천연 태양 광선을 활용하는
친자연적 첨단 기법으로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첨단 촬영 기법은
몸의 두께가 아주 얄팍한 환자분들만 이용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긴 합니다만
다행히 환자분은 몸상태가 아주 얄팍하여
이 첨단 촬영 기술을 100퍼센트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촬영이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그런 일은 전혀 없었을 겁니다.
그동안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버티지 못하고 떨어질까 아주 염려가 많으셨죠.
촬영 사진을 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원래 나뭇가지에 잘 붙어 있으려면
상단부의 등뼈가 튼튼해야 하는데
환자분의 등뼈는 상단부로 가면서 점차 굵어지는
아주 이상적인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완전 직선이 아니라
약간의 굴곡을 갖고 휘어지고 있어
바람을 타고 흔들리기에 딱 좋은 체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혹 완전한 직선형의 꼿꼿한 등뼈를 가진 분들이 있는데
사실 그게 보기에는 좋아보이지만
바람맞으면 곧바로 부러지기 딱좋은 유형입니다.
한가지 주의를 드리자면
꼬리뼈 쪽으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고 있는 뼈의 형태로 보건데
바람이 불 때마다 지나치게 꼬리를 칠 성향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꼬리를 치면
상단부 등뼈가 아무리 강해도
버텨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원래 바람이 지나갈 때 꼬리를 치는 것은
거의 모든 잎들이 갖고 태어난 본능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부디 귀한 목숨을 생각하시어
아무리 바람이 눈길을 잡아끈다고 해도
너무 심하게 꼬리치는 일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음, 메인 등뼈에서 뻗어나간 갈비뼈들도 아주 상태가 좋습니다.
굵기가 적당하고 좌우로 아주 잘 뻗어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이를 잔뼈들이 촘촘하게 메우고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을 타고
가볍게 몸을 공중으로 부양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중력과 바람의 부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몸을 흔들흔들 흔들어주는 자세를 취했을 때
사실 등뼈에 가해지는 하중이 가장 크게 낮아집니다.
그러니까 그게 등뼈에 가장 좋은 자세라고 할 수 있지요.
다만 잔뼈의 경우엔
잔뼈를 너무 키우다 보면
잔뼈가 굵어져서 무게가 너무 나가게 되고,
그러면 그 무게 때문에 낭패를 보게 되는 일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잔뼈가 어떤 경우에 급속도로 빠르게 굵어지는 지에 대해선
아직 뚜렷한 연구 성과가 나와있질 않습니다만
속설에 의하면 잔뼈는 다 누구 밑에서 굵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급적 누구 밑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독립적으로 환자분만의 삶을 살거나 즐기시기 바랍니다.
제 소견은 여기까지 입니다.
부디 등뼈 관리를 잘하셔서
이 여름 무사히 넘기시고 늦가을까지 무병장수하시길 바랍니다.
등뼈가 튼튼한 분들은
다음 해 봄까지 버티면서
몸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살아남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목숨이란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간들 얘기로 비유를 삼자면
벽에 뭐 칠할 때까지 사는 격이라서요.
그저 늦가을, 색깔 예쁘게 물들 때까지만
건강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아, 간호사!
여기 이 환자분 나뭇가지에 잘 붙어있게
붙어있는 나무밑에 물 한 바가지 부어드려요.
역시 등뼈에는 뿌리에서 갓 뽑아올린 물 한잔이 최고지 뭐.

10 thoughts on “배나무 잎의 등뼈에 대한 진단 소견

  1. 등뼈는 뿌리를 닮았습니다.
    다만 뿌리는 너무 바빠서 일촌을 맺지는 못하는데
    등뼈는 일촌을 맺어 서로서로 맺어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라고 하지만 사실은 등뼈 같은 나무랍니다.
    뿌리가 일방적으로 뻗어가는 미디어형이라고 하면
    등뼈는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채팅형이랍니다.

    1. 가끔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한해에 조금씩 날아오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어요. 오대산에 갔을 때였죠.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2. ㅎㅎㅎ
    이런 진단서는 첨이에요. 너무 쉽고 편하게 읽히잖아요. ^^

    예전에 누군가가 그러더라구요.
    ‘의사들이 왜 대단해보이는지 알아?’
    ‘아니~ 왜 대단해보이는데?’
    ‘마지막에 진단서를 니가 모르는 영어로만 휘갈겨써서 그래~’ㅋㅋㅋㅋㅋ

    이스트맨님두 배나무잎에게 한국말로 다 말해놓코 진단서는 권위있게(?) 영어로 써주셨죠? 크크크

  3. 닭살 행각에 눈을 흘기고 지나치려다
    배나무 잎의 등뼈를 보여주심에 감사하며 흔적 남깁니다.
    태평농법을 구사했던 한량 농부 아버지한테도
    좀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배나무 몇 그루가 있었지요.

    1. 자제하려고 했으나 점점 날씨가 더워지는 지라 삼계탕 생각도 나서…
      우리 집 배나무는 올해 처음으로 배가 네 개가 열렸습니다.
      가을까지 지켜보는 재미를 계속 주려나 모르겠습니다.

  4. 당신의 소견으로 보아,
    저 배나무는 이번 가을까지 넉넉히 건강하게 살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리고 내년 봄에도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이오.
    당신은 마음을 찍는 명의가 틀림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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