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빌>을 보고나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킬빌>(Kill Bill)이란 영화를 보았다.
제목을 그대로 우리 말로 풀면 <빌 죽이기>가 된다. 말 그대로 한 여자가 빌이란 남자를 죽이기까지의 여정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다행히 1편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2편을 먼저보게 되었다.
2편을 보고 1편을 본다는 것을 은밀한 비밀을 미리 알고 영화를 볼 수 있는 내밀한 기쁨이 나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선 그게 무슨 재미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킬빌>에선 2편을 보지 않고선 1편의 의미를 찾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2편의 비밀을 미리 알고 있어야 1편의 황당함과 그 황당함의 반복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무료함을 즐겁게 견딜 수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 영화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부분이다.
이 영화는 금발의 전사로 나오는 키도(그녀는 이 영화에서 이름이 서너 가지나 된다. 다 기억도 못하겠다. 키도는 그녀의 정체성 가운데서 살인 본능을 대변한다)가 임신을 하는 순간부터 생명을 살해하던 암살 단원에서 생명을 지키는 수호자로 극적 전환을 하면서 내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살인 본능과 생명의 수호 본능이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에게 수호할 생명이 생겼을 때 그녀는 자기 내부에 있던 그 살인 본능과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가장 일상적인 품으로 몸을 숨긴다.
영화는 내게 그것이 가능하다고 속삭인다.
나는 그동안 일상을 구속적 세계로 파악해왔다. 그 일상이 나의 자유 본능을 억압하려 들 때면 나는 신경질적 반응으로 대응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이란 나름대로 소중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영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키도가 살인 본능을 버리고 수호하려 했던 생명에 버금간다. 그 생명의 수호는 아주 무료한 일이긴 하지만 아울러 값어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무료한 일상의 삶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 존중해가는 것이 내가 가져야할 의무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런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힘겹다. 어찌보면 이건 공존이 아니라 나를 버리게 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과연 자유 본능을 버린 내가 살아있는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 본능과 반복적 일상은 지금까지의 내 경험에 의하면 대체로 대치 상태에 있다. 그 대치 상태를 어떻게 해소하여 무료한 일상 속에서 가치를 길어올리는가가 내가 이 영화에서 반드시 배워야할 점이다. 물론 영화는 상반된 두 가치의 공존이나 전환을 예시할 뿐 나에게 구체적 길을 일러주진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숙제가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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