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를 탄 아이의 이름은 태연이고,
밀고 있는 아이는 용하이다.
용하는 힘이 세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난다 싶으면
태연이 입에서 웃음이 한바구니씩 쏟아졌다.
2004년 7월 23일, 나는 오후 2시를 넘어선 시간에 안면도의 한 해수욕장으로 향하기 위해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안면도의 초입에 있다는 백사장 해수욕장이 내가 가고자 하는 행선지였다.
이 달치의 일이 시작되어 이미 집안에 발목이 묶인 상태였지만 내가 잠시 일을 뒤켠으로 밀어두고 바깥으로 나서게 된 것은 아내의 부탁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곳의 한 모임에 가서 사진을 좀 찍어주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그 모임은 서울의 한영 교회란 곳에서 떠난 여름 성경학교였다. 일이 시작되면 항상 일정내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떠밀리곤 했던 나는, 그러나, 아내의 부탁에 이틀의 일정을 잘라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잘라낸 일정을 순순히 그 모임의 사진 촬영에 할애했다.
내가 바쁜 일정을 그렇게 순순하게 뒤로 물린 것은 그 모임의 성격 때문이었다. 아내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장애인들이 떠난 여름 수련회라는 것이었다. 물론 장애인들의 옆에는 그들을 도와줄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챙기면서 나는 그 현장이 내게 보여줄 무엇인가 특별한 미지의 것에 대한 기대를 함께 챙기고 있었다.
나는 좀더 빨리 그곳으로 내려가기 위해 아내에게 승용차로 남부 터미널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지하철을 이용하여 그곳에 가본 적이 있던 나는 그곳까지 꼬박 한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내의 승용차 덕택에 그 시간을 10분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차는 밀리고, 1시간을 넘기고도 아직 터미널의 턱밑에 코도 들이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승용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도 더디기는 마찬가지였다. 3시경에 집을 나온 나는 5시를 30분 정도 남겨놓은 시각에 겨우 남부 터미널에 들어섰다. 다행히 5시에 떠나는 버스가 있었고 버스표도 무난히 구입했다. 하지만 나의 뒷사람이 같은 곳으로 가는 버스표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나의 그 표가 무난하게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매표 창구의 유리창 안에서 매표원은 5시 버스의 좌석은 모두 매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표를 손에 넣은 것이었다. 아마도 그 표가 아니었다면 나는 6시까지 다시 한 시간을 밀려났을 것이다.
왜 이렇게 자꾸 그곳으로 가는 여정이 쳐지고 있는 것일까.
때로 평범한 세상의 일이 세상을 읽는 텍스트로 전환될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무지개는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한 자연 현상에 불과하지만 그 무지개를 보며 희망을 떠올릴 때 무지개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희망이란 텍스트의 다른 형태로 작용한다. 안면도의 백사장 해수욕장으로 가는 여정이 뒤로 쳐지면서 바로 그렇게 뒤쳐지는 나의 여정은 나에게 우리 사회의 현실과 그 현실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나의 위치를 그대로 비춰주는 텍스트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 여정이 어떻게 계속 뒤로 쳐졌는지 얘기를 덧붙이자면 백사장 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백사장 삼거리에서 나를 내려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기사는 그곳에서 언덕을 하나 넘어간 창기리가 정류장이란 이유로 나를 언덕 너머까지 친절하게도 더 멀리까지 태워주웠다. 급한 마음에 나는 택시를 잡아타려 했으나 차들이 띄엄띄엄 지나가는 그 시골길에서 택시를 잡으려 하다간 자칫 세월을 그대로 허송하게 될지도 모를 일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나는 언덕 너머로 걸음을 옮겼고, 언덕을 올라가서 중간쯤 내려갔을 때 고개를 돌려보니 언덕 위에서 빈택시가 중앙선을 넘어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그냥 기다렸다면 나를 싣고 바람같이 그 해수욕장으로 데려다 주었을 택시는 그렇게 하여 나를 외면한채 언덕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해수욕장 방향으로 들어서니 내가 가려고 하는 웨스턴 레저 타운은 왼쪽으로 내려가라고 되어 있었다. 가다보니 영 휑하여 결국 길가에서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께 다시 길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어둠이 깔리면서 해변쪽의 건물에 불이 들어와 있었고 아주머니는 그 휘황한 불빛의 무리 중 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방향을 안내해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으나 나는 그냥 백사장항으로 곧장 들어갔으면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거의 곧장 그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멀찌감치 휘돌아 그곳으로 향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 자꾸 일정은 뒤로 쳐지고 있었던 것일까. 나에게 그 날의 경험은 일종의 텍스트가 되면서 내게 있어 나를 묻고 있는 이 사회와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경험이 되고 있었다.
우리 사회엔 수많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그 선을 발견한다. 그것은 여자와 남자를 가르는 생물학적 구분선을 너머 그 선의 이쪽에서 저쪽을 차별하고 경시하는 불평등의 선이다. 물론 역사가 발전하면서 그 선의 경계가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 선은 여전히 불평등의 경계로 우리 곁에 엄존하고 있으며, 차별 받는 쪽에서 보면 그 선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넘볼 수 없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장애인과 일반인들 사이에도 선이 그어져 있다. 그것 또한 차별의 선이다. 선의 이쪽에 있는 일반인들은 모든 편의를 자신들 일반인에 맞추고 장애인의 불편을 생래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물론 그 불평등의 선도 많이 뭉개져서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그 경계선의 이쪽에 있는 일반인들은 아직도 그 선의 저쪽과 잘 어울리려 들지 않는다. 그들과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경계의 이쪽으로 받아들여 하나 다를 것없는 이웃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 아울러 경계의 저쪽으로 건너가 그들과 어울리는 것도 주저한다.
혹시 나도 그런 것은 아닐까. 경계 이쪽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막연하면서도 분명한 경계 의식이 나로 하여금 안면도로 내려가는 발걸음을 무의식적으로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잠재의식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 바로 그날 그렇게 쳐지던 일정의 의미가 아닐까.
내가 서울에서 안면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은 다섯 시였다. 버스에 올라 거의 뒤쪽에서 차창으로 위치한 나의 좌석을 확인한 뒤 그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은 나는 마음 속으로 멋진 여자가 옆에 앉았으면 좋겠다는, 언젠나 변함없는 그 은근한 기대를, 그 날도 예외없이 품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의 기대를 옆으로 슬쩍 밀어 버리면서 내 앞과 옆의 좌석을 확인한 사람들은 장애인 한명이 끼어있는 어느 가족이었다. 그 가족은 나를 구석으로 놓고 포위하다 시피 내 주변의 좌석에 빙둘러 앉았다.
다시금 그 상황은 텍스트가 된다. 내 눈앞에 사회가 그어놓은 장애인과 일반인 사이의 그 선이 분명한 상황으로 다가선 것이다. 당신은 어쩌겠는가. 그 텍스트는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 이러한 경우, 다행히 나는 나름대로의 임무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임무는 바로 관찰이다. 나는 그 가족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의 옆으로 앉은 것은 그 장애인의 어머니였으나 그 가족의 둘째딸이 어머니 곁에 앉고 싶어한다는 눈치를 재빠르게 간파한 나는 그 딸아이에게 내 자리를 양보하고, 그 가족의 대화로 미루어, 그 딸아이의 언니인 그 장애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 내가 그녀의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씩 웃어보이는 것 뿐이었다. 아마도 경계선을 자주 넘어갔었다면 좀더 자연스러웠겠지만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어디 산간 오지의 외국에 온듯 나는 그렇게 멀뚱히 입을 닫은채 그 옆자리에 앉아 흔들리는 버스의 움직임에 그냥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장애인은 중간에 신발을 벗더니 자신의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그렇게 가면 힘들텐데, 하고 슬쩍 한마디를 건넸다. 그녀는 나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잠시 뒤 그녀는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녀의 신발은 그녀의 발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바꾸어 그녀의 발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세상이 정한 정상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녀는 중간 중간 내가 알아듣기 힘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에겐 그렇게 그녀의 즐거움이 있었다. 우리가 정상의 경계에 갇혀 있는 순간에 그녀는 그 경계를 넘어가 그녀의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결국 정상이란 무엇인가?
때로 우리는 우리들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경계 안쪽의 삶에서 김점용 시인이 “밥숟갈 앞에서 꿀꿀거리는 슬픔”이라고 명명했던 삶을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의 회식 자리에 어울려야 하고, 그 회식 자리에서 “하루를 뒤집듯 고기를 뒤집고 말을 뒤집고 신문과 품의서의 행간을 술잔으로 채우다가 상계동으로 목동으로 일산으로 분당으로 흩어지”며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삶에 갇힌채.
그러나 우리가 장애인이란 구획 속에 몰아넣고 가두려 했던 경계의 저쪽 어디에서 그들이 우리들처럼 그렇게 그들의 삶에 갇혀있다는 말인가.
김점용은 그가 아는 자폐아 우인이의 세계를 이렇게 노래한다.
너를 만나면 이 세계는 모두 헛것
텔레비젼 뉴스는 소음 책은 팔랑이는 악기
신발은 우유를 싣고 달리는 통통구리배
거실은 화장실 피아노는 낙하대
꽃들은 피다 말거나 지다 말며
음악은 죽고 춤은 부러지고 개들은 흘레를 멈추지
달력은 더 이상 넘어가지 않고
신나는 방학도 즐거운 크리스마스도 오지 않아
너를 만나면
옷은 거추장스럽고 모든 약속은 터무니없고
세상의 일이란 돌멩이 하나만도 못하게 되지
-김점용, <자폐아 2> 부분
시인은 우리들의 갇힌 삶을 해방시키는 그 저쪽의 공간을 가리켜, 그리하여 “내 마음의 망명 정부”라고 일컬었다.
나는 드디어 쳐지는 여정의 뒤끝에서 그 경계선을 넘어 그들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정상인들이 장애인들에게 봉사를 하는 한 단체의 모임을 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김점용이 말한 내 마음의 망명 정부를 만났다. 세상의 일들을 돌멩이 하나만도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전복의 자유를 만났다.
그 자유는 도대체 어디서, 무슨 힘으로 솟는 것일까.
나는 그 힘의 원천이 그들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며, 정상과 장애인 사이에서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던 세상의 선을 지워버린 그곳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마음의 다른 이름은 물론 사랑이다. 그 자리는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샘솟는 자리였으며, 그렇게 그 자리에서 솟아나고 있는 사랑은 나까지 적시며 나에게 그들이 누리는 그곳의 자유를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유는 때로 그렇듯 그 현장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일상의 굴레 가까이에, 그렇게 내가 일상의 굴레를 털어버리고 자유를 호흡하려고 했던 망명의 공간이 있었다.
나는 이틀 동안 그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어찌보면 평범한 사진들이다. 사람들이 웃고 있거나 카메라를 향하여 V자를 펴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풍경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눈이 밝은 자들은 볼 수 있으리라. 그곳이 자유를 찾는 자들이 우리를 가둔 경계를 넘어가 사랑과 자유를 맛보는 망명지대란 것을. 마치 일제 강점기 우리 조국의 망명 정부가 그랬듯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의 공간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주며 희망의 빛처럼 환하게 그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한 이틀 동안, 나는 내내 행복했다.
2 thoughts on “사랑이 샘솟는 자리”
짧은 글에 익숙해진 탓인지…..맑고 고운 웃음만 보다가 책장을 넘겨버립니다
맑고 고운 아이들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