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무지개, 그리고 그의 비평 ─ 정과리의 시 비평

Photo by Kim Dong Won
정과리의 저서들

1 미리 밝혀두는 글의 한계
미리 글의 한계를 밝혀 두어야 할 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해 정과리의 비평을 마주했을 때 가장 놀란 것은 그 양의 방대함이었다. 그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고 고려한다는 것은 내 능력의 바깥이란 판단이 들었다. 나는 원고를 부탁한 『시와 반시』가 시잡지라는 점을 좋은 핑계거리로 내세워 그의 비평 중에서 소설 비평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시에 대한 비평도 그 양적 규모가 만만하질 않아 한번 읽어보는 것만해도 벅찬 분량이었다. 그 막대한 분량에 짓눌린 나는 내가 그의 비평을 짧은 시간에 체계적으로 분석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런 체계적 분석에 수반되는 건조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내 능력 부족과 글의 취향에 대한 내 개인적 기호를 뻔뻔스럽게 앞에 내세워 내가 그의 비평에서 받은 인상으로 비평가 정과리를 정리하는 선에서 만족을 구했다. 바로 그 점이 이 글의 한계임을 앞서 밝혀둔다.

2 손가락의 주변을 맴도는 그의 시선
손가락과 달의 비유를 빌려 얘기를 시작해보면 시인의 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물론 이 비유는 적절치 못하다. 시의 경우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경우처럼 손가락과 달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시에 겹쳐 있기 때문이다. 즉 시의 경우엔 손가락 속에 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런 무리를 염두에 두고 그 비유를 계속 활용한다면 우리는 시를 읽을 때 손가락으로서의 시에 시선을 두기 보다 달로서의 시, 즉 시가 가리키는 지시 대상에 시선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 달은 시의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좀 독특한 비평가가 있다. 왜 독특한가 하면 그가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한 말은 아니다. 그는 달을 보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손가락을 살핀다. 손가락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의 주변, 그리고 뒤까지 살핀다. 그가 바로 정과리이다.
우리는 잘알고 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냐는 힐난이 있고, 사람들이 거의 그것을 타당한 얘기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정과리는 그 힐난을 수용하지 않는다. 아니, 왜? 그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종종 달을 가리킬 수밖에 없도록 하는 어떤 모종의 힘이 가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다. 즉 그는 손가락에서 그 위에 어른거리는 어떤 억압의 그림자를 본다. 그가 손가락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이다.
놀라운 것은, 우리들은 시인이 독자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달을 가리켰다고 생각하고, 시인이 갖는 그 독자적 자율성에 대해 하나의 의심도 없었는데, 그가 시인의 손가락 뒷편으로 돌린 시선을 따라가면 그 손가락 뒤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인이 몸을 묻고 있는 사회와 세계가 버티고 있고 그 그림자가 손가락의 방향에 영향을 줄 정도로 짙게 드리워 있다. 우리는 놀란다. 아니,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 것이 시인 자신이 아니었어? 정과리는 그렇다고 답한다.
이제 이쯤에서 비유의 구도를 정과리가 그의 비평 속에서 드러낸 문학적 관점으로 정리를 해보면 그는 문학 속에 있지 않고, 즉 달 속에 있지 않고, 문학과 사회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문학과 사회를 동시에 살피고 있다. 때문에 정과리에게 있어 문학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관심을 첫 평론집의 머리말에 내걸어 그가 걷는 비평의 길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1985, p.iv). 그러다 어느 순간 “너는 항상 현실밖에 볼 줄 모르는 구나”(1988, p.vii)라는 물음으로 그가 걷는 길에 대해 자성적 반문을 던지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 두 해 전에 펴낸 평론집의 머리말에서 “이번 책도,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살피는 데 집중되어 있다”(1986, p.9)며 자신이 걷는 그 길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백학기의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현실 응시는 미래 지향의 디딤판”(1986, p.226)이라는 말을 흘리며 현실 응시를 통하여 미래까지 열려고 했던 그의 입장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정과리가 그가 걷는 비평의 길을 문학과 사회의 사이로 두게 된 연유는 “문학과 사회를 독립된 실체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는 그의 말에서 분명하게 읽힌다. 그는 “문학은 본래 있는 무엇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얘기는 계속된다. “그것은 사회의 당연한 변모에 가담할 때만 의미 있고, 그렇지 않을 때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본래적으로 사회적이다. 사회적이란 것은 문학이 삶 전체의 형성과 변화를 이루는 여러 사회적 활동들의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그의 얘기는 모든 문학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이란 얘기이다. “인간의 활동은 그 사회적 활동의 총체를 인간의 몸속에 새기면서, 그것을, 이른바 인간 시대인 현재까지는, 가장 폭넓고 높은 형태로 재구성한다.” “문학은 그 인간 활동의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사회적 활동의 총체를 특수한 방식과 체계로 제 속에 새기면서 변모해나가고, 또 사회의 끊임없는 변모에, 특수한 방식과 체계로 작용한다”(2005, p.14). 때문에 그의 눈에는 문학의 생산을 순수하게 작가나 시인이라는 한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게 있어 “한 글의 생산자는 개인이라기보다는 그 개인이 정황과 맺는 관계의 복합체계”이다(1988, p.27). 그는 바로 이러한 연유로 문학 속에만 머물지 못하고 문학과 사회의 사이로 자리하게 된다.
문학과 사회의 사이라는 그의 비평적 위치로 인하여 그가 시를 읽어내면 우리는 다른 관점의 안목을 선물받게 된다. 가령 예를 들자면 「절정의 곡예사들」이란 제목아래 80년대 전반기 문학계를 휩쓸고 지나간 “시의 홍수” 시대 뒤끝에서 “화려했던 시의 시대는 지금 자취도 없는 듯이 보인다”는 말로 서두를 뗀 뒤 80년대 한국시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있는 글이 그렇다. 그는 이 시의 전성기에 대해 “숨돌릴 여지를 주지 않는 압제적 현실에 가장 신속한 응전을 할 수 있었”(1999, p.16)던 시의 기민한 형식에서 이유의 일단을 찾아내고 있다. 아울러 1970년대와 80년대에 부흥했던 시의 전성기라는 특징에 대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라는 역사가 시에게 특유의 존재 영역을 제공했던 것이 아닐까”(2005, p.135)를 묻고 그 대답으로 의문을 풀어보려고 한 또다른 글도 마찬가지이다. 또 “10년이 지나도록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1999, p.87)어 전집을 펴내기에 이른 기형도의 시에 대한 대중들의 사랑 앞에서 “기형도의 시를 그 자체로서 음미하기보다 90년대의 사회·문화적 정황 내에서 그것이 함축한 의미를” 캐내고, 기형도의 시에서 “시인의 죽음과 함께 90년대 시의 상징도를”(1999, p.7) 펼쳐놓고 있는 글도 그렇다. 그는 그 글에서 이제는 “우리가 기형도 시를 말할 때, 순전히 그의 시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형도의 시와 그의 신체적 죽음, 그 죽음의 문화적 의미, 그 문화적 의미에 촛불을 켠 평론들 그리고 그곳으로 앞다투어 경배하러 모여든 독자들 전체를 한꺼번에 가리”(1999, p.90)키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오해하여 그의 평론이 시의 뒤만 따라가며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란 관점을 덧붙여 해설의 낱알을 훑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그의 눈에 “시는 사회적 조건 그대로의 모사가 아니라 그 조건을 뛰어넘어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의도적인 특수한 활동”(1986, p.267)이다. 그때의 시는 사회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의 현실에 대항하고 억압을 다양한 방식으로 폭로하며 나아가 사회의 변혁을 모색한다. 이 경우 평론이 해야할 역할은 그 저항의 양식을 잘 설명해줌과 동시에 문학적 “지형이 잘 짜이도록 부추기는 풀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과리는 그것을 “간단히 말해 역사를 ‘만드는’ 것”(2005, p.194)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평론은 수동적인 시의 해설자라는 위치를 버리고 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판단하면서 시의 행로에 개입하려 든다. 그 한 예를 찾아보자면 정호승의 시에 대한 글을 들 수 있다. 정과리는 정호승의 시가 보여주는 “한국 민중의 한”이 “현실의 위악적 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단단한 지반이며” 이러한 점이 “정직하고 적극적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현실 개혁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의지의 구체적 실천의 모습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그 물음 끝에서 “시란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강렬한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벗어나야 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살아냄의 방법과 실체를 풍요롭게 모색하고 풍성하게 제시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는가”(1985, p.300)에 대해 시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언듯 보기엔 시의 행로에 대한 조언같아 보이지만 내겐 조언의 형식을 빈 개입같아 보인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짚어보면 “맹인 아이의 위탁모가 되는 누님”의 얘기를 그린 정호승의 시 「이 가을 어딘가에」에 대해서 이 시가 “휴머니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긴 하지만 “버려진 채로 자라나는 많은 맹인 아이들의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간과하게”(1985, p.303) 만들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다. 정과리는 말하자면 정호승이 희망의 시를 노래하면 “희망의 부정적 양태인 자기 위안 속으로 빠질 위험”(1985, p.304)을 걱정한다. 내겐 그 위험에 대한 우려가 앞으로 시가 나갈 방향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시의 방향에 대한 개입의 느낌으로 와닿는다. 그 위험에 대한 주의는 시인이 아니라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건네는 것이 평론가의 몫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우려는 독자에게 건네면 읽을 때 감안해야할 주의 사항이 되지만 그 주의 사항을 시인에게 건네면 그것은 주의가 아니라 위험 요소 없이 시를 써내야할 부담으로 작용한다. 즉 시의 행로에 대한 불편한 개입이 된다. 그에겐 조언이었을지도 모를, 그러나 내겐 독자들에게 건네야할 주의를 시인에게 건네는, 그래서 개입의 혐의가 짙은, 시의 한계에 대한 지적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언이든 개입이든, 시에 대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었을 것이란 점은 의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과 사회의 사이에 선 그가 사랑하여 풀무질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시의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평론이 이제는 “작품이라는 완미한 세계의 해설로 전락하거나 역사적 문맥화 속에서 작품을 해석해내는 ‘연구’로 방향 전환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며 “아 옛날이여!”(2005, p.194)를 노래부르고 있었다. 문학과 시가 역사를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자탄의 냄새가 짙다. 그에게 있어 지금은 “먼지의 육체로 민들레의 사랑을 꿈”꾸는 ‘시대 착오’의 시대이며, 이 시대엔 “먼지의 몸에 대한 감각은 있으나, 반성은 없다”(1999, p.131). 그러나 그가 노래부르는 옛날이 반성이 몸의 감각을 삼켜버린 시대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들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오늘을 노래부르고 싶은 나는 선뜻 동의가 되진 않았다.

3 빛을 쪼개 무지개를 띄우다
빛과 무지개의 비유를 빌려오자면 시는 빛에 가깝다. 시가 인생의 빛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마치 빛이 그 빛 속에 무지개를, 즉 빛의 또다른 형식을 내재된 방식으로 갖고 있듯이 그 안에 내재된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빛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그저 명암의 정도를 구별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 우리의 감각이란 점이다. 그 빛 속에 내재된 빛의 또다른 형식, 바로 무지개는 쉽게 파악되지가 않는다. 하지만 여기 그 빛으로 온 시에서 항상 무지개를 띄우는 비평가가 있다. 바로 정과리이다. 빛에서 무지개를 띄우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빛의 맞은 편으로 물을 뿌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버려 주시라. 빛은 이곳에 있는데 그 반대편에 뜬 무지개를 어찌 이곳의 빛이 띄운 무지개라 할 수 있겠는가. 비밀은 분광기에 있다. 분광기는 빛을 일정한 스펙트럼으로 나누어 무지개를 띄워준다. 분광기의 종류에 따라 틀에 박힌 무지개를 넘어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과 형상으로 짜여진 무지개를 얻을 수 있다. 정과리는 아주 질좋은 분광기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보자. 장경린의 시 「그게 언제였더라」를 읽어가는 정과리의 방법을 들여다보면 그는 “1련과 2련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문이다. 두 연 모두 한 행을 제외한 나머지 행들이 모두 명사로 끝나고, 제외된 한 행(마지막에서 두번째 행)은 동사로 끝나고 있다. 그런데, 1련의 각 명사들은 아주 잡다한 종류의 집합체”인 “반면, 2련의 명사들은 모두 시간을 가리킨다”(1999, p.31) 며 시의 내용이 아니라 시에 내재된 형식을 읽어내고 있다. 이 과정은 아주 길고 오랜 시간 지속된다. 그 자신, 이를 가리켜 “뼈까지 발라냈다고 말할 정도로 자세하게 분석”했다고 말한다(1999, p.39). 그리고 이 분석을 토대로 시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가 매우 성능 좋은 분광기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뼈까지 발라내주는 분광기는 흔치 않다. 같은 맥락의 예를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는 기형도의 시 「안개」의 첫 구절에 대한 분석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이 문장은 문장 구성의 충분 요건을 거의 담고 있다. 때(아침저녁이므로), 장소(샛강에), 주체(안개가), 동작(낀다), 방법(자욱이)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까닭(왜)만이 빠져 있는데, 당연히 독자의 관심은 결여 쪽으로 움직인다”(1999, p.116)고 말하며 얘기를 끌어간 끝에 “기형도 시의 내재 구조가 그의 죽음의 외적 반향에 적절히 상응한다는 가설”(1999, p.123)을 구체적으로 밝혀낸다. 예는 또 있다. 황동규의 시선집 『견딜 수 없는 가벼운 존재들』을 읽을 때 정과리는 그 시집에 나오는 여행이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바람을 동반한 여행”이란 것을 곧바로 알아차린다. 그것은 “거의 모든 시들에서 바람 혹은 ‘눈발’ ‘낙엽’ ‘날린다’ 등 바람과 친화력을 가진 단어들이 출현”(2008, p.25)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는데서 이루어진다. 사실 이 정도의 분광기를 갖는다는 것, 즉 이 정도의 분석력을 갖는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예로 든 이들 세가지 경우는 그 내재적 요소들이 어느 정도 바깥으로 내비치고 있는 경우이지만 실제로는 그 내재적 요소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그가 김갑수의 시집 속에서 어느 한편의 시를 읽고 있을 때 ‘여기’라는 어사가 문면에 거의 드러나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어들 사이에 숨죽이고 있는 ‘여기’라는 지시대명사를 보고야 만다(1999, p.67). 분광기의 성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가 갖고 있는 분광기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는 시어들의 색채를 스펙트럼을 통하여 일반적인 우리의 감각에 인식되는 색채와 구별해낸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예는 아주 많다. 이태수의 시집을 읽으며 “말끔히 씻는”이라는 싯구절을 앞에 두자 “표준말 말끔히를 버리고 음가 없는 ㅇ을 쓰고 있”는 그 구절에서 말끔히를 말끔이로 잘못쓴 문법적 오기의 색채가 보는 것이 아니라 “정결성에 대한 경사”(1988, p.98)를 읽어낸다. 보통 되풀이는 ‘정서적 강도의 증가’라는 색채를 지닌다. 그러나 박상배의 시속에 나타난 되풀이가 정과리가 가진 빛의 분광기를 통과하고 나면 그 색채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정과리는 “박상배 시의 뛰어난 대목은 그 되풀이가 정서적 강도의 증가라기보다는 의미의 반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짚어내며, “그러니까, 그의 되풀이는 되풀이하면서 뒤집는다”(1988, p.182)는 결론을 우리 손에 쥐어준다. 그는 이윤학의 시 「버려진 식탁」을 읽을 때도 ‘일일 연속극’이란 말이 나오자 그 말에서 “바깥의 사태를 외면하고 방의 폐쇄성에 탐닉”(1999, p.176)하고 있는 그 말의 내재적 색채를 간파해낸다. 이런 점들은 아주 놀랍기 그지없다. 자꾸만 그만의 비밀스런 분광기가 있을 것이란 의심이 드는 대목들이다.
정과리는 “작품은 작가가 말을 건네고 독자가 되받는 풍요한 해답의 자리”(1985, p.120)라고 말했지만 그의 비평을 읽다 보면 작품은 끊임없은 질문 유발자이며, 그 질문의 끝에서 구한 해답으로 시의 내면으로 들 수 있는 자리이다. 가령 그는 차창룡의 시를 읽는 자리에서 “그러니까, 이런 물음으로 시작하기로 하자. 왜 그의 시는 노래가 아니고 춤인가? 그는 왜 힙합도 아니고, 노들 강변도 아니고 하필이면 무당춤을 추기로 작정한 것일까?”라고 묻는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의혹을 먹고 사는 사람”(1999, p.193)이라고 자백한다. 그는 자신의 질문을 의혹이라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분광기의 성능을 배가 시키는 일종의 주문이다. 그는 그 주문을 통하여 분광기의 성능을 배가시키며 빛속에서 무지개를 뽑아낸다. 그의 분광기도 놀랍지만 그 분광기의 성능을 강력하게 높이는 그 질문이란 주문의 위력도 놀랍다.
놀라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큰 놀라움은 그의 분광기가 빛에서 음보, 즉 어떤 규칙적인 가락을 쪼개 급기야는 소리로 이루어진 무지개를 띄울 때이다. 그 놀라운 분광기를 이용하여 그는 김사인의 시를 읽을 때 시에 나타난 “두 주체의 의미 작용은 김사인의 시들 대부분에서 긴 음보 시행들과 짧은 음보의 시행들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알아내며, 다시 이들에 대해 “전자는 안정감의 기반을 마련하고 후자는 촉발적이다. 전자는 넓게 퍼지고 후자는 솟아오”(1988, p.176)르고 있다는 점을 해석해낸다. 이는 그가 『황동규 시전집』을 읽는 자리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음조의 변이’는 황동규 시의 전역사를 흐르는 특유의 호흡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2008, p.2008). 음조 독법과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경우는 유하의 시 중에서 “별빛과 달, 나의 유일한 재즈 카페”라는 싯구절을 읽을 때이다. 그는 이때 드디어는 싯구절을 비평가의 손으로 재구성하여 2음보로 읽거나, 아니면 원래 시의 형태를 그대로 두고 3음보로 나누어 읽으며, 그렇게 읽을 때 그 중간의 ‘유일한’이 만들어내는 “단절과 낯섬”(1999, p.280)을 드러낸다. 그의 분광기는 빛에서 전혀 양상이 다른 음보까지 꺼내준다.
비평은 대개 분석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통하여 시를 말한다. 그 작업은 빛으로 온 시의 명암을 쫓아가는데 그칠 때가 많다. 표면적으로 확인이 되는 것은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뛰어난 성능의 분광기를 가진 정과리는 그 빛을 쪼개 내면에 용해되어 있는 무지개를 꺼낸다. 때문에 그의 비평이 시를 읽고 지나간 자리에선 종종 무지개가 뜬다.

4 개인적인 생각 두 가지
문학과 사회의 사이로 자리를 정하고 시를 들여다보고 있는 정과리의 비평을 읽으면서 시가 “거짓 의식”과 “사물화되어 버린 우리의 삶”(1985, p.318)에 대해 벌이고 있는, 혹은 억압의 현실에 맞서 그 억압을 폭로하고 세계를 변혁하려는 싸움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만나는 그의 비평들에선 그가 그 대결과 싸움의 자리로 시인들을 던져넣고 싶어하는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자꾸 싸움의 자리로 시인들의 등을 밀고 있는 듯한 인상이 짙다는 얘기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 대결의 구도 속에서 평론가가 해야할 몫은 싸움의 현장으로 시인들의 등을 미는 것이 아니라 시를 끌고 그 현장으로 가는 것이다. 시인의 등을 밀 때는 자꾸만 어떤 당위를 강조하게 되고, 그 싸움에서 시의 힘을 약화시킬지도 모를 시의 한계들을 지적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 시를 끌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평론가의 몫이지, 시인들에게 현실속으로 들어가라고 등을 미는 것이 평론가의 몫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이제 문학은 개인적 고뇌라기보다는 집단적 행동의 가능소로, 심정적 이해보다는 현실 개혁의 논리 추구로 변모될 수 있”(1985, p.104)다고 말했지만 그건 시인에게 맡겨둘 것이 아니며, 내가 보기에는 심지어 개인적 고뇌로 뭉친 시까지도 함께 끌고 집단적 행동의 가능소로 변모시키고, 그렇게하여 현실 개혁의 싸움터로 함께 나가는 것이 평론가의 몫이다.
탁월한 분석력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정과리의 비평들을 읽으면서 나는 자꾸만 김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김현처럼 뛰어난 평론가란 아첨이나 찬사가 아니다. 그건 그의 비평이 김현의 비평과 대비되어 시에 대한 느낌을 달리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의 비평을 읽고 있노라면 그 뒤끝에선 시가 더욱 시같이 느껴졌는데 정과리의 예리하고 치밀한 분석의 칼날이 번뜩이는 비평을 읽고 있노라면 시는 시가 아니라 무슨 화학적 물질같이 느껴지곤 했다. 그것이 그의 미덕이자 가치이긴 하지만 느낌이 당혹스러운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을까. 나는 그도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것도 아주 잘. 그러면 그는 알면서도 왜 그런 비평의 길을 걸어간 것일까. 그 의문의 지점에 도달했을 즈음, 나는 이제 김현을 버리고 실패한 중세의 연금술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중세의 연금술사는 세상의 이것저것을 조합하여 금을 만들어내려 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세상의 기본을 이루는 물질, 바로 원소의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냥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원소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현대 과학은 원소를 만들어내려면 막대한 온도, 즉 초고온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서 초고온이란, 금의 경우엔 태양의 열을 훨씬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열을 가리킨다. 태양의 열로는 수소와 수소의 원자핵을 융합시켜 겨우 헬륨이란 원소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태양의 열로는, 금은 어림도 없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그런 열은 얻을 수가 없다. 멀리 우주에서 별들이 폭발할 때나 겨우 그런 열을 얻을 수 있다. 금은 그러니 지구에선 얻을 수가 없다. 금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지구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자기 안의 열정이 행성의 폭발을 넘어설만큼 뜨겁다면, 만약 그 뜨거운 열정을 자기 안에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연금술을 꿈꿀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분석과 해체를 통한 또다른 생성을. 내가 보기엔 바로 그 자가 정과리이다. 그는 자기안의 그 뜨거운 열정으로 김현이 간 비평의 길을 답습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의 길을 간다. 아마도 시를 마주할 때면 그의 내부에선 오늘도 뜨거움이 폭발하고 있을 것이다. 그 뜨거움이 폭발하는 자리에 걸려들면 시는 해체되지만 새로운 원소로 다시 생성된다. 그의 비평을 읽은 뒤끝에서 시가 마치 화학물 같은 느낌으로 와닿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난 그냥 일반적 체온을 가진 사람이다. 대개의 사람들도 그렇다. 시의 따뜻한 체온이 묻어나는 비평이 그립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그의 비평이 가진 고유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가장 충만하게 담긴 것은 그의 개인적 경험이 묻어난 두 편의 글, 바로 정일근(1988, p.163)과 김사인(1988, p.170)에 대한 글이었다. 종종 마음을 채우는 것은, 별들의 대폭발을 통하여 태어나는 새로운 원소가 아니라, 우리들이 살을 부비면서 맛보는 체온의 따뜻함이다. 비평가 정과리에 있어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니 시인들이여, 조심하시라. 어떤 시인들은 그의 비평이 훑고간 자리에서 시의 의미가 새롭게 태어났다며 그것이 시인의 것인양 좋아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 그의 비평이 한번 폭발하면 그 앞에 있던 시의 핵자들은 지구에선 볼 수 없는 융합을 일으켜 완전히 새로운 원소로 생성된다. 그건 내가 보기에 시인의 것이라기 보다 평론가 정과리의 것이었다. 기분 나쁠 것도 없겠지만 그다지 좋아할 일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시와 반시』, 2009년 가을호)

*인용 구절은 저서의 발간 년도와 쪽수로 표시했다.
인용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정과리, 『문학, 존재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1985
—정과리, 『존재의 변증법 2』, 청하, 1986
—정과리, 『스밈과 짜임—문학, 존재의 변증법 3』, 문학과지성사, 1988
—정과리, 『무덤 속의 마젤란』, 문학과지성사, 1999
—정과리,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존재의 변증법 4』, 역락, 2005
—정과리,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내가 사랑한 시인들·처음』, 문학과지성사, 2008

8 thoughts on “손가락, 무지개, 그리고 그의 비평 ─ 정과리의 시 비평

  1. 저도 그점이 좀 안타가웠는데…자꾸 보수화되는 거요.
    역시 정확하게 보시네요.
    지금 김동원씨 블로그에서 다른 글 읽고 있어요.

    1. 그게 보수화가 꼭 나쁜 것은 아닌데
      나쁜 쪽으로 보수화가 되어서 좀 안타까워요.
      가령 완전히 문학쪽으로만 회귀를 하면
      차라리 보는 사람 속이라도 편할 텐데
      정치적 편향성이 엿보이기 시작하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더군요.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한번 파고들어 보고 싶기는 해요.

  2. 오랫만에 들어와 잘 읽었습니다.
    대학교 때 저의 교수님이셨습니다.
    그때도 행동주의 작가로 활동 하셨고, 강의도 열성적으로 하고
    학생들과 교감도 매우 좋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켜보면 어떤 문제에 피하지 않고 부딪친다는 것이죠.

    가끔 들어와 보는 블로그에서 교수님에 대한 평을 보니…
    참 감개무량하고, 저 위쪽에 몇권 가기고 있는 책을 보니 반갑네요.
    교수님에게 왜 그렇나고 질문했던 기억도 나고요.

    감사합니다.—항상 말로 감사만 하네요.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시 평론이란 걸 거의 읽을 기회가 없는 터에 올려주신 긴 글을
    그저 훑어 일독했습니다. (종이책과는 달리 웹상에서 이런 길이의 글을
    읽는 작업은 약간 고역이긴 합니다.^^)

    제게 다가온 구절 몇 개를 인용하는 것으로 느낌을 대신합니다:

    “평론가가 해야할 몫은 싸움의 현장으로 시인들의 등을 미는 것이 아니라
    시를 끌고 그 현장으로 가는 것이다.”

    “김현의 비평을 읽고 있노라면 그 뒤끝에선 시가 더욱 시같이 느껴졌는데
    정과리의 예리하고 치밀한 분석의 칼날이 번뜩이는 비평을 읽고 있노라면
    시는 시가 아니라 무슨 화학적 물질같이 느껴지곤 했다.”

    평론가가 시나 시인을 평하는 게 아니라,
    동료(선배) 평론가를 평하는 작업이라
    큰 재미는 없으셨을 것 같네요.^^

    1. 책으로 묶이지 않은 글들까지 고려했다면 거의 기한내에 글쓰기는 불가능했을 듯 싶어요. 워낙 거물이라 부담도 많이 되었구요. 시인은 거물일수록 신나는 법인데 이건 상황이 다르더군요.

      이에 뒤이은 작업은 좋았습니다. 간만에 이 시집 저 시집 읽으며 참 좋은 시들이 많이 나왔는데 내가 게을렀구나 하는 반성도 했구요.

      읽어주신 거 고맙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