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뭘 봤니? – 성북동 길상사에서 만난 풍경

이 사람이 한번, 저 사람이 한번 얘기하면서 그 이름이 거듭되고
그러다 가보기도 전에 이름으로 먼저 익숙해지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이 여러 곳 있지만 내게는 길상사 또한 그런 곳이다.
몇번 그 근처의 간송미술관을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번번히 바로 곁에 있는 길상사를 지나치고 말았다.
2월 23일 화요일, 이번에도 내가 찾아간 곳은 간송미술관이었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미술관 뜰에 있는 3층 석탑 두 개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버스타고 올라가는 길에 길상사의 표지판이 선명하게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마치 오늘은 잊지 말고 한번 들리라는 듯이.
석탑 촬영을 끝낸 뒤 터덜터덜 미술관을 빠져나온 내 걸음은
예정된 수순처럼 길상사로 향했다.
길상사는 이상한 절이었다.
절을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사진찍을게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 오래 된 절같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절은 의외로 넓었고,
돌아다니고 있는 동안 그곳의 풍경은 계속 내게
“넌 뭘 봤니? 넌 뭘 봤니?”를 물으며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다.
난 그곳에서 한 시간 동안 사진을 찍었다.
절의 일부분을 겨우 돌아본 느낌이었다.
길상사의 공력은 대단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들러봐야 겠다.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낙엽들과 몸을 뒤섞으며 반쯤 썩어버린 물?
아니면 흐린 물빛에도 개의치않고
그 물에 몸을 담근 따뜻한 오후의 햇살?
그것도 아니면 오후의 햇살이 몸을 풀자
따뜻한 온수라도 대접받은 양
물속에서 나른하게 몸을 풀고 있는 낙엽들?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갈라지고 깨지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겨울?
아니면 쇄빙선처럼 얼음을 가르며 우리 곁으로 달려오고 있는 봄?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동그란 모양의 얼음 구멍?
아니면 물러가면서도 봄이 어느 만치 왔나 궁금하여
빼꼼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겨울의 눈?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겨우내 얼음 위를 겉돌다 이제 헤어질 때가 다 되어서야 그 품을 파고든 연대궁?
그런 헤어짐의 아쉬움?
아니면 겨우내 없는 사람들 덜덜 떨게 만들었다고
살이 파이도록 때려준 매서운 회초리?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누가 마시고 버린 빈 종이컵?
아니면 언제는 입을 맞추고 쪽쪽 거리며 좋아하더니
한번 버린 뒤로 뒤도 안돌아보는 무정함에 화가나
아무 말도 하기 싫다며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 삐진 종이컵?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수백 년된 느티나무 밑의 평범한 가로등?
아니면 한쪽 눈이 없어 밤만 되면 저절로
지나는 사람들에게 윙크를 하게 되는 애꾸눈 가로등?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누으면 비바람 막아주는 고마운 지붕?
아니면 우리가 누웠을 때 사실은 우리들을 안은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개편 지붕?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가급적 출입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의 말?
아니면 “스님의 처소이오니 용무 이외의 출입을 삼가 주십시오”라는 그 긴 말을
간단하게 private에 담아버리는 신기하기 이를데 없는 영어?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는 눈?
아니면 봄이 오는 낌새가 보이자 그만 덜컥 겁을 먹고
오줌을 지리면서 도망치고 있는 겨울?

Photo by Kim Dong Won

넌 뭘 봤니?
햇볕만 들이고 바람과 먼지는 내치는 뚜껑이란 이름의 투명 방패?
아니면 그많은 옥상의 단지를 모두 그 안에 품은 풍만한 이미지의 임산부?

4 thoughts on “넌 뭘 봤니? – 성북동 길상사에서 만난 풍경

  1. 정말 동워니님은 진정 시인이셔요.
    카메라가 시고, 그 멈춤이 시고…

    “넌 뭘 봤니?” (요 거 씨리즌가요?)
    마치 과거에 인디언 어른들이 작은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 듯, 다정하고 지혜롭고 명료하게 그 질문 방식을 던지시는 거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청청 하시길 바랄게요. ^^

  2. 넌 뭘 봤니?
    라고 물으시기 전에 봤다면 저는 대부분 정답 1번 쪽만을 인식했을텐데요.

    넌 뭘 봤니?
    라고 물으시는 물음에 정신줄 한 번 가다듬고 마음의 눈에 붙은 눈꼽을 떼려고 자꾸만 부비게 되네요.

    넌 뭘 봤니?
    계속 물으시면서 제가 못 본 걸 자꾸 들이대시니깐 신기하기도 하다가…
    ‘아씨….. 나는 왜 이런 게 한 번에 안 보이는 거야?’ 하면서 제 시력에 대한 불만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다가요.

    넌 뭘 봤니?
    자꾸 듣다보니깐…. 그러고보니, 자꾸 반말로 물으시네넹…
    ‘아, 반말로 대답 한 번 하고 도망갈까?’
    하다가…ㅋㅋㅋㅋ

    넌 뭘 봤니?
    라고 자꾸 내 마음에서 반복해서 물으면 못 보던 것이 보이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 오늘은 ‘왓 디쥬 씨?’를 되뇌면서 지내봐야겠군 하며 갑니다. ㅎㅎㅎ

    1. 반말해서 미안혀유.
      그게 나한테 묻는 거라서…
      내가 나한테 반말도 못쓰남뭐.
      내일부터 계속 넌 뭘 봤니 시리즈 이어지는데, 어째요. ㅋㅋ
      이상한 절이었어요.
      뭐가 그렇게 계속 눈에 들어오는지 말예요.
      그곳에 있다는 법정 스님의 공력인지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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