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래 침대는 그녀의 것이었다. 나의 자리는 침대가 아니라 침대가 높이를 바닥까지 낮추면서 침대의 이름을 버린 자리, 바로 방바닥이었다. 침대가 그녀의 것이었던 연유는 그 침대가 싱글 침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여자였고, 그녀가 결혼하여 같이 살고 있는 남자는 바로 나였지만, 그녀는 침대에선 여전히 독신이었다.
침대의 높이는 그다지 높질 않았다. 내가 손을 한껏 펼치면 세 뼘을 넘지 못했다. 세 뼘째를 펼치면 손가락 끝의 두 마디 정도가 허공으로 들린채 남아 있었다. 침대와 방바닥의 높이는 몸을 일으키면 모두 내 밑이었다. 하지만 높이란 묘한 것이다. 일단 몸을 눕히면 순식간에 사정이 달라졌다. 몸을 눕힌 순간 침대는 항상 내가 손을 뻗어야 닿는 높이에 있었다. 마치 손을 뻗어 내가 갈구하지 않을 수 없는 구원처럼 침대는 내 몸을 낮은 곳으로 방치하면서 저 높은 곳에 있었다.
몸을 방바닥에 눕힌 순간, 때문에, 그녀는 나의 구원이었다. 나는 가끔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은 그녀에게 잘 닿질 않았다. 그녀는 곧잘 내 바로 옆의 침대 위에서 아득하도록 멀리 누워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더블 침대를 들여놓았다. 그 뒤로 나는 그녀의 옆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나는 이제 팔 한쪽이 아니라 아예 몸뚱이 전체로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저 팔 한쪽을 갈증처럼 그녀쪽으로 뻗던 시절은 영영 지나가 버린 것일까.
그동안 내게 방바닥은 방바닥이었고, 침대는 침대였다. 둘은 다 같은 잠자리였지만 우리는 서로의 잠을 따로 눕혀놓고 있었다. 나는 방바닥에서 잤고, 그녀는 침대에서 잤다. 그녀가 침대를 넓혀 내 자리를 만들면서 나는 방바닥을 버리고 드디어 그녀의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한동안 서로의 잠을 따로 눕혔던 두 사람의 잠은 어떻게 되었을까. 두 사람의 잠은 이제 한 침대 위에서 뒤섞여 하나가 되었을까.
침대에서 잠을 잔 뒤로 침대는 내게 도마가 되었다. 나는 마치 내가 도마 위의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모로 누위고, 그 침대 위에서 칼잠을 자곤 했다. 날이 선 내 몸의 칼에 잠들이 뭉텅뭉텅 잘려 토막이 나곤 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도 몸을 모로 세웠다. 우리는 서로 등을 마주하고 날이 선채 잠을 잤다. 하지만 누구도 등을 마주했다는 말을 쓰질 않았다. 등을 마주하면, 그 순간, 사람들은 마주했다는 느낌을 버리게 된다. 등으로 서로를 마주하면 마주한 느낌은 전혀 몸에 감지되질 않는다. 그건 마주한 것이 아니라 등을 돌린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등을 마주하고 있는데, 등을 마주하면, 꼭 등을 돌린 느낌이 둘의 사이를 파고들어 우리들을 갈라놓았다. 기껏 양보해 보았자 등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호의적 느낌은 등을 맞댄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도 마주한다는 말과 비교하면 호의적 느낌에선 크게 함량이 떨어졌다. 우리는 서로 등을 맞댄채 몸을 모로 세우고는 그녀의 침대에서 각자 잠을 잤다. 같은 침대를 쓰고난 뒤에도 우리의 잠은 하나로 뒤섞이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잠은 각자의 것이었다.
그녀가 출근하고 나면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그때부터 침대 위의 나도 혼자였다. 나는 혼자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혼자 누우면 가장 먼저 와닿는 느낌은 침대가 넓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이제 그 넓은 침대는 나의 침대가 된 것일까. 형편은 그렇질 않았다.
그녀의 침대에는 옥돌매트란 것이 깔려있었다. 겨울 한철에만 깔아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 침대로 여름을 맞아보질 못했다. 침대를 산 것이 겨울 한가운데 였기 때문이었다. 그 매트는 안에 옥돌을 박아넣은 전기 장판이었다. 그 매트에는 동글동글한 돌들이 깔려 있었고, 약간씩 양각된 문양처럼 바깥으로 솟아 있었다. 그녀가 출근을 한 뒤 빈 침대에 몸을 누이면 그 돌들이 등을 파고들었다. 분명 납짝하게 침대 위에 깔려 있었지만 마치 아래쪽 어디선가 날아와 등을 때리고 있는 듯했다. 침대는 그녀가 침대를 비운 한낮에도 여전히 그녀의 침대였다. 나는 돌팔매질을 피하듯 그 침대를 내려오곤 했다.
침대가 싱글에서 더블로 몸을 부풀린 뒤 방바닥의 내 자리는 그 공간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방바닥에 누으면 방바닥에 누워있는 느낌이었으나 크기가 줄어든 뒤로는 방바닥에 누워있으면 방바닥에 끼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내 자리라는 느낌은 여전하여 누워있으면 그 자리의 휴식은 편안했고, 이내 잠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편안하면 잠이 왔고, 또 잠에 들면 편안했다. 그 둘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순환의 고리를 엮으며 달콤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침대는 그녀의 것이었고, 나의 것은 방바닥이었다. 우리는 함께 살면서, 거의 같은 공간을 뒹굴고 있었지만 침대와 방바닥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비워준 그녀 옆의 침대 옆자리를 버리고 종종 며칠씩 좁은 방바닥에 끼어 들어 잠을 자곤 했다.
결혼하여 같이 사는 둘은 서로 각자인 듯 보이지만 각자로선 함께 살기가 어렵다. 둘은 둘이면서 하나이어야 함께 살 수 있다. 마치 낮과 밤이 서로 각각인 듯 보이지만 하루 속에 서로 맞물리며 하나처럼 흘러가듯, 결혼한 둘도 둘이면서 하나이어야 함께 살 수 있다. 때문에 둘이 각자이면 둘 사이는 톱니가 어긋난 톱니 바퀴처럼 서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잘 맞물려 있을 때, 둘은 둘이 잘 맞물려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한 공간을 살아도 잘 맞물려 있지 못하면 둘은 서로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는다. 어긋난 톱니바퀴가 돌아가긴 돌아가면서도 귀를 찢는 소음으로 덜컹 거리며 불안을 안기듯이 둘도 입을 열 때마다 덜컹거리고 입을 닫고 있으면 침묵이 체증처럼 몸속에 쌓여간다. 이제 둘은 둘이 하나가 아니라 같은 공간 속에 각자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같은 공간 속에 각자 선 둘은, 다른 공간 속에 각자 선 둘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서로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살고 있었다. 한 공간에서 각자의 둘로, 불편하고 힘겹게.
그 불편과 힘겨움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둘은 날선 말을 한마디씩 주고 받았다. 도마가 된 침대 위에서 칼잠을 자던 둘이 이제 서로 칼을 세워 서로를 한번씩 찌른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둘은 슬펐다. 왜냐구? 둘은 사랑하던 사이였으니까.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나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둘은 슬펐다. 그러나 둘은 함께 울지 않았다. 슬프게도, 이제 그들의 슬픔마저도 각자였다.
그 슬픔의 뒤끝에서 여자가 말했다. “우리 동해로 바다 보러 가자.” 남자는 주저스러웠다. 바다에 해결을 기대하기엔 너무 어긋나 버렸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자 또한 바다가 보고 싶었다. 둘은 그 길로 동해 바다로 내달렸다.
둘은 동해의 바닷가에 섰다. 속초의 바닷가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양양의 바닷가에서도 머문 시간도 한참이었다. 중간에 외옹치항과 대포항도 잠깐 어슬렁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 날밤, 둘은 한 침대에 들었다. 그리고 하나로 뒤섞였다. 그 날 둘은 하나였다.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닷가에 서자 바다가 나에게로 밀려왔다. 바다는 내 발끝에서 걸음을 멈추었지만 파도 소리는 거침없이 내 속까지 밀려들었다. 파도 소리가 내 속으로 밀려들면서 무엇인가가 밀려났다. 그건 내 속의 나였다. 나는 나로 가득채워져 있었다. 내 속의 나는 또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바다는 그 나를 밀어냈다. 내 속은 이제 파도 소리만이 가득했다. 난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바다로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내 몸 속의 가득찬 나를 바다로 모두 밀어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난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다. 바다가 가슴에 안겨주는 파도 소리 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와 나는 속이 텅비어 있었다. 우리를 밀어내고 우리를 가득채웠던 동해 바다가 우리가 집에 도착할 즈음 우리의 속을 슬그머니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바다가 우리의 속을 물러나자 바다가 채웠던 우리의 속은 아무 것도 없이 텅비어 버렸다.
우리가 우리를 비웠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들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로 뒤섞였다.
2
나는 그녀의 침대에 대해서 한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을 촉발시킨 것은 김행숙의 시 한 편이었다. 시인의 시속에서 침대는 ‘도마’였다. 그 싯구절 하나가 그녀의 침대와 겹쳐졌고, 그 겹침이 생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을 일으킨 그 시는 김행숙의 「침대가 말한다」 였다. 다음과 같다.
나는 침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작은 삐걱거림도 모두 나의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 그러나 도마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파 뿌리처럼 발이 잘렸다고 소리치는 건 나를 떠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진실로 진실로 이 순간만큼은 네가 대파의 아픔에도 공감한다는 것인가.
너는 왜 모든 문제를 내게 끌고 들어오는가. 오늘 너는 식칼처럼 누워 있다. 침대는 너의 연인을 눕히듯이 너의 어린아이를 눕히듯이 식칼도 눕힐 수 있다. 너는 내 위에서 무엇을 저미고 다지고 마침내 팔을 높이 쳐들고 내리치고 있는가. 언제나 너의 침대는 모든 것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싶다. 나는 너의 팔이 펜과 이어지고 노트와 이어지고 긴 이야기와 끝없이 이어지던 밤을 기억한다. 아침에 스르륵 잠이 들었고 가장 밝은 한낮까지 이어지던 꿈을 나는 이어가고 싶다.
그러나 거울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너는 침대를 독차지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침대의 기억을 무시한다. 내 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너는 상상하지 못한다. 너는 한 장의 시트를 갈면 모든 게 지워지는 줄 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는 순간에 남긴 무의미한 음절을 나는 기억한다.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의 단어인가. 죽음의 입술로부터 가능성을 이어받은 음절과 다음에 올 음절은 빛처럼 갈라져서 먼 곳으로 떠났다. 그것은 무한한 문장이 되고 우주처럼 무한한 편지가 된다. 나는 그의 똥오줌도 기억하고 그의 말년의 사랑도 기억한다. 나는 사랑하는 한 쌍의 몸들을 솜털까지 기억한다. 잠을 청하는 인류는 최종적으로 제 몸을 누일 땅을 파듯이, 오오 죽음을 핥듯이 다른 몸을 탐하고 미워하고 곡해하고 그리고 가장 외로워한다. 잠의 사전에 중단은 없다. 잠은 불꽃과 같아서 너희의 엉덩이는 앗, 뜨거워지는 것이다. 내게 오랫동안 머물렀던 정든 육체가 동굴처럼 깊어지던 순간들을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듯 나는 그릴 수 있다. 작은 몸을 괴롭힌 욕창이 그가 잠든 사이에 더욱 장엄해지듯이 너희는 어디라도 더 빠져들고야 마는 것이다. 왜 너는 외면하는가.
너는 왜 참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이 돌아눕는가. 혼자서 너는 연극을 하는 것 같다. 누가 너의 대사를 썼는가. 나는 무대인가, 어둠 속 팔짱을 낀 관객인가. 그러나 어느 쪽으로 돌아눕든 그것은 오직 너의 문제. 그것이 오늘의 고독이다.
침대는 인간적인 변덕과 무관하다. 나는 언제라도 어디라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연약한 너의 하루도 지치지 않는 날이 없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잠에게 순순히 끌려가는 것. 그곳이 어디라도 눈을 감고 따라가는 것. 잠의 염료통에서 너의 전부를 물들이는 것. 나는 밤새도록 잠들기 위해 애쓰는 너를 돕고 있다. 도마 위에서라도 거울 위에서라도 뾰족한 시곗바늘 위에서라도 너에게로 잠은 꼭 찾아올 것이다.
—김행숙, 「침대가 말한다」 전문
3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개 그것은 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궁금하게 여기며 그 내용을 쫓아가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그러면 종종 시는 난해해진다. 시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시읽기는 진전이 되질 않는다. 시가 시의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발길을 막는다. 그러니 그러지 말자. 그냥 시인이 침대에게 말을 시키고 우리에게 침대가 전하는 얘기를 전해주면 그것을 알아들었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에 상관하지 말고 그것을 우리의 침대를 말하는 기회로 삼아보자. 그것이 시를 읽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시가 우리의 삶 속으로 작은 편린 하나를 내주며 우리의 삶과 공통 분모를 갖고 옆으로 나란히 놓이게 된다. 그럼 내 삶과 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시를 읽을 때, 무슨 얘기인지 너무 궁금해 하지 말고 시가 침대를 말하면 그냥 우리의 침대를 말해보자. 우리의 삶과 시가 한 자리에서 뒤섞이게 될 것이다. 시를 읽는 또다른 방법은 바로 그렇게 시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얘기를 해보는 것이다.
4
살다 보면 또 동해에서 비워온 내 속을 나로 채우게 될 것이다. 그때면 우리는 또 같은 공간에서 각자 서 있을 것이다. 동해로 다녀와야할 시기가 온 것이리라. 가끔 우리는 바다로 떠났다 돌아오며를 반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주기적으로 바다를 간다면 우리의 속을 항상 비우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랫 동안 바다를 잊고 살았다.
**인용한 김행숙의 시는 『문학과사회』, 2010년 봄호에 실린 시임.
2 thoughts on “그녀의 침대와 나의 방바닥 – 김행숙의 시 「침대가 말한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게 맞나 봅니다.
이제는 기억의 저장소나 관찰 카메라 역할까지 하네요.
방바닥 절반과 바꿔 침대 한 귀퉁이에서 서식하는 이는 복 받은 겁니다.
소파랑 격의없이 친하게 지내고 리모콘과 베프를 맺으면 방바닥 구경을 못합니다.
소파를 쫓아낸 뒤로 방바닥과 지내고 있었지요.
방바닥은 고향같고 침대는 자꾸 여관같은 느낌이 들어서
잘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