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기생 경춘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7월 4일 강원도 영월의 금강정 옆 오솔길에서

원래 그녀의 이름은 고노옥(高魯玉)이었다.
조선 영조 33년(1757년) 영월읍 관풍헌 인근에서 태어났다.
노옥은 8세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 되면 그 전의 이름은 버리는 법.
그녀가 새롭게 갖게 된 이름은 경춘(瓊春)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버릴 수 없어
경자 속에 다시 구슬옥자를 담아두었다.
경춘의 경이 구슬경자이다.
이름만으로 보자면 그녀는 이제 구슬같은 봄이 되었다.
구슬같은 봄이 어떤 봄인지는 잘 짐작이 가지 않으나
구슬이 눈부셨을 터이니 아마도 눈부신 봄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기생 경춘은 뛰어난 미모와 가무로 영월 지역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당시 고을의 사또 이만회의 아들 이수학이 바로 그녀가 사랑한 남자였다.
둘은 영월의 장릉에서 만났다.
장릉은 지금도 영월에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데이트를 시작하고 나중에는 은밀한 곳으로 숨는다.
데이트를 어디에서 했건 그녀에게 이별이 닥친다.
이수학의 아버지가 영전을 하여 한양으로 떠났던 것.
그녀의 남자도 “과거에 급제한 뒤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약속하고는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떠나버렸다.
후임으로 온 영월부사는 신광수(申光秀)란 사람이었다.
신광수는 그녀에게 수청들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그 요구를 거절하고
단종의 시녀들이 투신했던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영월 동강변에도 낙화암이 있다. 낙화암은 부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1773년의 일이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였다.
지금으로 보자면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여자애였다.
금강정 옆 오솔길을 걷다가 뜻하지 않게 그녀를 만났다.
오솔길 옆 낭떠러지 바로 앞에
조선 정조 19년(1795년) 영월부사 한정운이
그녀의 절개를 기려 마련한 비석 속에 그녀의 흔적이 있었다.
비석의 글귀는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라고 말하고 있었다.
“영월 기생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은 곳”이란 뜻이다.
그 비석이 그 자리에 선 것은 그녀가 죽은 지 20년 뒤의 일이다.
그래도 그녀의 사랑은 20년 뒤 다시 살아 그곳에 섰다.
이른 아침 동강변의 길을 걷다 우연치 않게 만난 그녀였다.
절개는 그녀가 지켰는데
비석의 글귀만으로 보자면 그녀의 절개로 영월이 빛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빛나는 절개의 지역에서 여자들과 놀았다.
2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이제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겐 죽음도 불사하고 지키려 했던 것이 사랑이었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은밀하게 맛보는 즐거움이다.
사랑은 이제 어디에도 없거나
아니면 어디에나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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