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문열기 — 김주대의 시 「시간의 사건」

Photo and modified by Kim Dong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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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일종의 문이라고 상상해보자. 문은 다 같은 문 같지만 사실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우선 먼저 자동문. 그 문은 문 앞에 서기만 하면 문이 저절로 열린다. 시가 문이라면 시를 읽는 행위는 문을 여는 행위가 될 것이다. 한번 읽어서 곧바로 이해가 되는 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분명 그러한 시를 가리켜 시가 아주 쉽게 쓰여져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문으로 치자면 거의 자동문에 가까워진다. 자동문은 편안하다. 시의 경우엔 그렇게 한번 읽는 것만으로 열리면 그건 쉬운 것이다. 사람들에게 편안한 문이 된다. 그러나 모든 문이 그렇게 쉽게 열리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파트에만 들어가면 그곳의 복잡한 자물쇠를 제대로 다루질 못해 종종 그곳에 갇히곤 했다. 아파트의 문은 내게 있어 열고 닫는 문이 아니라 나를 그곳에 가두는 문이었다. 회전문도 그 문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한번 걸려들면 뱅뱅 돌기만 할 뿐,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쳇바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요즘은 번호를 눌러 여는 문도 있다. 열쇠 구멍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번호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냥 일반적인 문들도 이렇게 다양해서 때로 문을 여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나는 시를 일종의 문이라고 상상해보자고 했다. 즉 시는 시인이 구축한 세계를, 시를 읽는 것만으로 곧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제공할 뿐이다. 때로 그 문은,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 즉 시를 한 번 읽는 것만으로 자동으로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을 읽어도 그 문이 열리지 않을 때가 있다. 즉 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시라는 문앞에서 문을 열 손잡이를 찾지 못하고 망연해진다. 그 순간 시가 안내할 세상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진다.
왜 종종 우리는 시라는 이름의 문에서 손잡이를 찾기 어려운 것일까. 손잡이를 돌리면 문은 열린다. 그러므로 손잡이를 찾아낸다는 것은 시라는 문앞에서 그 문을 열어줄 열쇠를 찾아내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종종 그 열쇠가 손쉽게 우리의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사실 시의 경우에는 그 문을 열려면 우리 스스로 그 열쇠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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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열쇠는 어떻게 만들어내야 하는 것일까.
일단 시를 읽는 것이 첫순서이다. 이번에 내가 고른 시는 김주대 시인의 「시간의 사건」이다. 그 시의 문앞에 서 보자.

우주는 지구를 저질러 놓고
용암 같은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육신을 만난 시간이 뼛속에 나이테를 새겨
뜨겁고 촘촘히 과거를 감아 놓았다
나는 사건이다
깊은 숲 속 시간의 무거운 흐름 위로
어느 날 튀어 오른 물고기처럼
세상에 왔다
어머니의 무당은 육신의 나이테를 벗겨
기록을 읽고 미래를 점쳤지만
시간의 장강 속에 사랑도 아픔도
눈 감고 무념무상 흐를 때까지
생은 시간을 역류하여 솟아오른 사건이다
아들이 나의 해결할 수 없는 벅찬 사건이듯이
모든 생은 스스로를 수습한다
—김주대, 「시간의 사건」 전문

이 시는 시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이에 덧붙여 놓은 말이 추가로 주어져 있다. 대개 시인들은 이렇게 시에 덧붙이는 말을 내켜하지 않으나 시를 읽는 나로서는 이런 덧붙이는 말이 더없이 반갑다. 시의 세계로 걸음할 때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 덧붙여 놓은 말은 다음과 같다.

시간의 흐름을 극복하고 해석할 수 있는 규칙성-인과율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결정론이다. 결정론이 서구 근대를 만들었지만, 생각하기에, 우리는 결정된 적 없는 현재이고 미래이다. 생은 그래서 스스로 수습하고 만들어 가야하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진행형의 사건이다. 우리는 늘 사건을 저질러댄다. 조금은 신나고 조금은 괴로운 일이다. 오늘도…

시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열쇠를 만드는 일도 시에 나타난 언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좀더 뛰어난 열쇠공은 시의 표면적 언어만으로 짐작하기 어려운 다른 요소들, 그러니까 시어들이 타고 가는 운율이나 리듬감으로 그 열쇠를 만들어내기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시에 나타난 말 하나가 열쇠말의 구실을 해줄 듯 싶다.
내가 집어낸 그 열쇠는 ‘저지르다’라는 말이다.
시 속에서는 딱 한 번 쓰였지만 이 말은 덧붙이는 말 속에 다시 한번 등장하고 있다. 반복은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는 현상이다. 나는 그 반복에 주의를 기울여 이 시에서 ‘저지르다’라는 말을 열쇠말로 삼기로 한다.
그 말을 열쇠로 삼아 시인이 만들어놓은 시란 이름의 문에 끼워넣으면 이제 문이 조금 열리기 시작한다.
‘저지르다’는 말은 잘 계획하여 이룩해낸 성과를 가리키지 않는다. “너, 또 무슨 일 저질렀냐”라고 물었을 때, 그건 다른 말로 치환하면 “너 또 사고친 것 아니냐”를 묻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저지르다’는 말은 알고 보면 ‘사고치다’와 동의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시인은 우리가 사는 지구가 어떤 이상적 계획에 의해 생성된 행성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고를 쳐서 생성된 행성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있어 ‘지구’는 ‘우주’가 ‘저질러 놓’은 행성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주는 생성이 될 때 사고를 쳤고 그 사고의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사는 지구이다.
그렇게 우주가 사고쳐서 만들어놓은 지구에 오랫 동안 시간이 흐른다. 시인은 지구에 흐른 그 오랜 시간을 “점액질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끈적끈적한 시간이란 뜻이다. 아니, 시간이 끈적끈적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끈적끈적하면 잘 끊어지질 않는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 달라붙으면 떼어내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점액질의 시간은 잘 끊어지지 않고 앞과 뒤가 들러붙어 흘러가는 시간이다. 시간이 뚝뚝 끊어지면 오늘과 내일이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겠지만 시간이 점액질이어서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흘러가면 어제가 오늘에 영향을 미치며 오늘은 또 내일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해보면 정말 시간은 그런 것 같다. 과거가 현재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보면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오늘이 또 내일을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간이 점액질로 흐른다는 것은 맞는 얘기이다. 아니, 그에서 더 나아가 과거는 우리의 뼛속 깊숙이 나이테처럼 촘촘히 새겨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에서 더 나아가 시간이 새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동시에 우리를 촘촘히 감아놓고 있다고 말한다. “시간이 뼛속에 나이테를 새겨/뜨겁고 촘촘하게 과거를 감아 놓”은 것이 바로 우리의 ‘육신’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즉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이 갖고 있는 태생의 비밀과 그 지구에 흐른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과거를 새기고 감아서 만들어놓은 것이 내 육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다 보면 우리는 그 육신을 거느리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내가 과연 어떤 존재일까를 묻게 되지 않을까. 물론 김주대의 시에서 그런 물음을 없다. 그러나 “나는 사건이다”라는 선언은 바로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들린다. 이때의 그 ‘사건’이란 말은 사실은 ‘놀랍고 경이적인 사건’이란 느낌이 강하다. 그런 느낌은 이 시의 문을 열고 그 속의 풍경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왜 김주대는 자신을 놀라운 사건으로 본 것일까. 그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의 생각 속에선 비록 우주가 저질러 놓은 뒤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낸, 그것도 끈적끈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용암’처럼 뜨겁기도 한 시간을 흘려보낸 지구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과거가 우리의 육신에 새겨지고 감기면서 바로 나라는 존재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깊은 숲’이 바다에 가라앉고, 그 숲의 위로 바다가 채워진 뒤 ‘물고기’가 튀어오른 오랜 시간의 뒤끝에서 마치 그 시간을 모두 내 몸에 축적한 존재처럼 이 ‘세상에’ 온 것이 바로 그이자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그렇게 경이적인 존재로 온다는 사실을 대부분은 모른다. 우리는 우리를 지구에 흐른 오랜 점액질의 시간이 새겨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70억이라는 엄청난 인구를 생각하면 티끌만도 못해지는 그저 하나라는 수치로 취급하곤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딱 한 사람, 경이적인 우리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어머니도 우리의 몸에 새겨진 그 과거의 나이테를 읽지는 못한다. 그렇긴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바로 어머니가 자주 찾아가는 무당이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무당의 신기를 빌어 들여다 보려 한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무당을 찾아가 아이의 “기록을 읽고 미래를 점”치곤 한다. 그건 아이의 과거가 만들어낼 미래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는 행위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그 운명대로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운명이 좋으면 어머니는 안심하고 그 운명이 좋지 않으면 어머니는 불안해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처음에 시인은 “시간이 뼛속에 나이테를 새겨/뜨겁고 촘촘히 과거를 감아 놓”은 것이 우리의 육신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시각 속에선 과거가 현재를 속박한다. 어머니도 그걸 믿는 눈치다. 하지만 나의 생 속에서 ‘사랑’도 겪고 ‘아픔’도 겪으며 나의 시간이 ‘장강’처럼 흘러가고 난 뒤에 보니 내 생은 과거의 시간에 속박되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생은 시간을 역류하여 솟아오른 사건”이었다.
이렇게 읽으면 이 시는 시간이 수렴되는 존재로, 과거에 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지만, 특히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 운명론을 많이 믿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시간의 속박을 뚫고 역류하여 자신만의 생을 일구어내는 벅차고 놀라운 존재가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그 벅찬 존재의 경이를 내심 ‘아들’에 대한 기대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아들 또한 그런 자신의 생을 ‘스스로’ ‘수습’하며 저의 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 시인의 믿음이다.
시를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시인이 어머니의 시간을 극복하여, 아버지의 시간을 세우고, 그 아버지의 시간을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시간과 아버지의 시간을 모두 가질 수 있는 아들은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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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것이 시인이 만든 세계를 돌아보며 살펴보는 행위가 아니라 시인이 만들어놓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어렵게 여는 행위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경우 그 문은 매우 완강하여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질 않는다. 그때면 사람들은 좀 열이 받는다. 시를 좀 쉽게 쓰지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선을 넘어선 불만이다. 어렵다는 불만은 용납되지만 그것을 넘어 시인에게 쉬운 길을 강요하는 것은 시인에 대해선 지나친 태도이다. 나는 시가 어렵다고 말하는 독자의 불만을 불만으로 보지 않고 비명으로 생각한다. 독자에겐 비명을 지를 권리가 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계속 시를 읽어준다면 그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렵다고 비명을 지른다면 시인은 얼마든지 그것을 듣고 감내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계속 시를 들여다보다 보면 그 비명 소리에 놀라 시가 문을 열지도 모른다. 나도 시를 읽을 때 종종 비명을 지른다. 사실 고백하건데 비명만 지르다가 결국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선 경우도 상당히 빈번했다. 하지만 몇 번 비명을 지르다 보면 놀랍게도 시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잠시 문앞을 떠났다가 3개월 뒤에 다시 문앞에서 비명을 질렀더니 문이 열린 경우도 있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우리 모두 시를 사랑해주자.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마음껏 비명을 지르면서. 그러나 시를 쉽게 쓰라고 강요는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개인적 견해를 하나 밝혀두자면 김주대 시인의 경우 나는 어려운 시가 아니라 쉽게 쓰여진 그의 시들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좋을 뿐만 아니라 더 뛰어나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고 시가 어렵다고 비명을 질렀다면 그건 그의 예전 시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사람들은 몰라서가 아니라 종종 더 좋고 뛰어난 시를 놓치고 싶지 않아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2010년 7월 29일)

***시인 김주대가 펴낸 시집 중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두 권이다.
김주대, 『나쁜, 사랑을 하다』, 답게, 2009
김주대, 『꽃이 너를 지운다』, 천년의시작, 2007

3 thoughts on “시의 문열기 — 김주대의 시 「시간의 사건」

  1. 조심스럽게 몇자 적어 봅니다.
    먼저 시인의 시와 시인의 시라 할 수 없는 작문(습작 수준이하)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인지 제시 할 수 있는지요.
    예를 든다면 위 작품은 진정 시인의 시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일 까요?
    임께서는 위에 운율을 운운 하셨는데 위 작품에 내재 된 운율의 정체를 증명 할 수 있는지요?
    등단을 위해 30년을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떨어지면서도 여전히 습작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경우, 30년을 습작 한 사람의 작품과 등단한 시인의 시와의 변별성은 무엇 일 까요?
    현재 우리나라는 무엇을 근거로 시인의 시와 시인의 시라 할 수 없는 습작 수준의 작품을 규명하는 걸 까요?
    요즘은 등단 경로도 다양해 시인 기만명 시대라는데 그들은 다, 진정 시인의 경지에 도달한 시인의 시로 부족함 없는 작품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이들일 까요?
    임이 거론하신 위 작품은 진정 운율적으로 형상화 된 작품 일 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1. 일단 말씀하신 질문들에 대해선 거의 답하기가 어렵군요. 제 능력 바깥인 듯.
      그런데 저도 궁금한게 있는데 왜 그렇게 객관적인 근거를 찾으시는지… 문학작품을 읽는 일은 일종의 연애와도 같아서 사회에서 널리 용인될만한 어떤 근거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 듯 싶습니다. 한때 이상의 시는 미친 놈의 헛소리로 평가받기도 했으니까요. 그냥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작품을 읽고 그것을 음미하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재미나고 또 황홀한 일이기도 하구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또 깊이있는 사랑은 있는 법이니 작품도 깊이의 차이가 있겠지요.
      위에서 언급한 운율은 위의 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의 열쇠를 찾을 때 시의 운율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에 대한 예를 원하신다면 평론가 정과리가 쓴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내가 사랑한 시인들. 처음”이란 책에서 황동규의 시전집에 대해 쓴 글을 읽어보면 많은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방문 감사드려요.

    2. 요 문제에 대한 좀더 공격적인 대답을 한 발레 동영상을 보다가 그 밑의 댓글에서 발견했어요.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gh_9leIFl7Y
      댓글은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Why are you asking others? Isn’t that like asking someone else if your meal tastes good? Or if the film is good? Trust your own feelings. There is no right or wrong way to view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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