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진 책과 드러누운 책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8월 9일 서울 천호동의 커핀그루나루 굽은다리역점에서

동네에 커피집이 새로 생겼다.
구경도 하고,
책 한 권씩 들고 가서
조금 읽다가 오자고 했다.
책을 펼치는데
오늘따라 마치 책이 날개를 편다는 느낌이다.
날아가라고 손에서 놓아주었더니
내 책은 날개를 펼친채
탁자 위로 철퍼덕 엎어져 버렸다.
집어들어 날개의 안쪽을 살펴보고
다시 또 놓아주곤 했으나
책은 그때마다 탁자 위로 철퍼덕 엎어지기만 했다.
그녀도 책의 날개를 펴주었으나
그녀의 책은 날개를 펼친채
뒤로 발랑 누워버렸다.
그녀는 날아가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책의 한쪽 날개를 잡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한쪽 날개마저
다른 한 손으로 지긋이 눌러두고 있었다.
날개를 접고 조용히 살았던 책 두 권이
간만에 편 날개짓에 서툴러
한 녀석은 탁자 위로 엎어져 버렸고
한 녀석은 그녀의 손끝에 잡혀
빠져나오질 못했다.
하지만 책이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글자들이 먼지처럼 가볍게 허공을 날아
우리 머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날개가 털어낸 글자들이 날아들자
머리 속이 하늘처럼 넓어지고 깊어져갔다.
우리는 가끔 그 하늘에서 새를 보곤 했다.
물론 그 새의 얘기를 간간히 나누곤 했다.
책은 날개짓에 서툴러
엎어지고 누워있거나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간간히 새를 만났다.
간만의 짧은 외출이 아주 좋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8월 9일 서울 천호동의 커핀그루나루 굽은다리역점에서

17 thoughts on “엎어진 책과 드러누운 책

  1. 보기 참 좋습니다.^^
    더위나는데는 책만큼 좋은 것은 없지요.

    필리핀에서 밤에 책을 읽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환자에 대해 완전 해방이기 때문이지요. 콜도 없고. ㅋㅋ

    1. <대담>은 5년전인가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원님도 함 읽어 보세요. 동물학자와 인문학자의 대화인데, 두 분 다 말빨이 쎄거든요.ㅋ

    2. 지금 읽고 있는 그녀가 인문학자가 오히려 인문적 소양에서 딸린다고 그러던데요.
      일단 테리 이글턴 책을 하나 찍어놓은게 있어서 그거부터 좀 보려구요.
      근데 필리핀 떠나기 직전이실거 같아요.

    3. 털보님 / 아직 책을 다 읽은게 아니어서 판단하기는 좀 이르지만
      인문학자가 인문학적 소양이 딸리는 게 아니고
      인문학적 소양은 차고 넘치는데
      과학적 인식이 아주 조금 부족한게 아닌가 싶어.
      반면에 동물학자에게 인문학적인 소양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동물학자를 만나서 반갑다는 뜻이지.

      아마도 나는 인문학자에게는 많은 기대를 하는 편이고
      과학자들에게는 인문학적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어.
      근데 내가 밑줄 좍좍 그어놔서 읽기 싫어할 것 같은데… ㅋㅋㅋ

      플라치도님 / 지난번 서울행에는 무시무시한 담배연기 땜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답니다.ㅜ.ㅜ
      다음에는 담배연기를 뚫고 나가보겠습니다.
      이번 필리핀 나들이도 평안하게 다녀오셔요~^^

    4. forest님/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인문학자가 과학적 소양이 많이 부족하다는 말.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컴터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거든.

  2. 집에 있기 싫어 마음이 파닥 거릴 때 책 들고 집 앞 커피집에 가지요.
    책을 두손에 꼭 잡아쥐고 집중해 책 읽기가 좋더라구요.
    동네커피집 뚫은 것 축하드릴 일이네요ㅋ

    1. 근데 내 생각엔 좀 비싼 거 같아서… 다시 갈지는 모르겠어요.
      집에서 좀 멀기는 하지만 커피맛이 세 배는 맛있는 곳이 있거든요. 커피값은 절반이구요. 나름 커피맛 따지는 사람이라…
      옛날 도루피 빨랑 다시 보구 싶네요. ^^

  3. 책의 날개라… 아 참 …남자분인데…이렇게 표현을 하면 안될까요?
    참 이쁜 마음, 이쁜 상상이네요
    부인과 함께 나란히 책을 읽는 부부의 모습 참 아름답고 행복해 보입니다….*^_^*

    1. 이쁜 마음이라고 하시니 양심에 좀 찔립니다.
      사실은 옆의 예쁜 여자들을 힐끗거린 거렸는데… 그건 절대로 안 쓰거든요.
      게다가 이쑤시개 하나로 싸웠다가 화해를 한 뒤끝이라…
      어쨌거나 좋게 봐주신 거 고맙습니다. ^^

    1. 뚱뚱한 새는 <대담>이란 책인데 도정일하고 최재천이란 사람이 나눈 대담으로 엮여진 책이라고 하네요. 얇은 새는 이선영 시집이었어요. 서로 읽다가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한 대목씩 읽어주면서 잠시 주절주절 떠들고… 그러면서 시간 보냈는데 재미나더라구요.

    1. 저도 조금 읽기는 했어요. ㅋㅋ
      바로 근처에 커피빈이 있는데 그곳보다 이곳이 더 성황인 것 같아요.
      저기서 무슨 커피 장사가 되려나 했는데 바깥에도 의자 내놓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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