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의 쇼핑길은 오후 네 시쯤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두 여자는 엄마와 딸의 사이였다.
예전에 함께 살 때도 둘이 쇼핑을 나간 적은 있었으나
저희 고모까지 합세하여 밤늦은 시간의 동대문 시장을 돌아다닐 때
내가 두 여자랑 함께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여자 중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각각 일주일 여밖에 되질 않아
내 취향을 멀찌감치 벗어난 일이었지만
두 여자의 쇼핑길을 두 여자만의 시간으로 허용하고
나는 집안에서 내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두 여자의 쇼핑길에 함께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직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보겠다는 것이
쇼핑길에 따라나선 나의 단순한 생각이었다.
두 여자는 지하철과 버스 사이에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갈아타지 않고 한번에 간다는 이유로 버스를 골라잡았다.
두 여자는 잠실역에서 내렸으며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잠실역 교보문고 옆에 있는 커피집이었다.
커피집의 이름은 엔제리너스였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엔젤인어스라고 읽었다.
셋은 각자 커피를 시켰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으며,
그녀는 같은 것을 마셨으나 따뜻한 것 대신 찬 것을 선택했다.
잔 얼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딸도 무엇인가를 마셨으나 위를 크림으로 가로막아 속을 보여주지 않은 딸의 것은
그 이름이 너무 복잡하여 나로선 도저히 그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마신 두 여자는 잠시 잠실역 지하 쇼핑센터를 힐끔 거리다가
곧장 롯데백화점 10층에 있는 면세 코너로 향했다.
딸은 그곳에서 장지갑을 하나 구입하고 싶어했다.
코치의 제품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찾아냈으나
엄청난 가격이 튀어나와 두 여자를 그곳에서 밀어내 버렸다.
가격에 밀려나 1층으로 쫓겨 내려온 두 여자는
그때부터 그 복수라도 하듯 9층까지를 모두 섭렵하며
장지갑이 있는 곳을 빠짐없이 훑고 다녔다.
티니위니란 곳에서 드디어 마음에 드는 지갑 하나와 눈을 맞추는데 성공했지만
면세점에서 본 가격의 절반으로 허리를 꺾고 인사를 하는 가격도 만만하질 않아
결국 이번에도 그 몹쓸 가격에 등을 밀리고 말았다.
그 지갑 가게로 가기 전에
아주 헐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손짓하는 옷들에 마음을 넘겨준 두 여자는
딸의 흰색 브라우스를 하나 사기는 했다.
지하로 내려온 두 여자는 만두를 사서 일단 속을 채우기로 했다.
쇼핑길에 나선 두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만두를 고르면서 바로 요런 게 쇼핑길의 재미라고 했다.
다행히 만두는 세 개씩이어서
아무 갈등없이 하나씩 뱃속으로 털어넣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만두말이 새우였다.
다섯 개가 나온 만두말이 새우는 나머지 두 마리를 놓고
딸의 아이팟터치를 꺼내도록 만들었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숫자를 차례로 눌러
가장 빨리 누른 사람이 1위가 되는 게임이 선택되었다.
나는 16초대를 끊고 환호했다.
그녀가 20초대를 넘기면서 나는 또 한번 환호했다.
딸은 9초대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나의 환호를 절망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도 2위를 차지해 새우 한마리를 더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시간이 두 시간여가 지나고 있었다.
만두와 만두로 말아놓은 새우를 먹고 난 뒤
두 여자는 잠실역 지하 쇼핑센터로 이동하여
그때부터 그곳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한 시간 동안 그 곳을 돌아다녔지만
손에 든 것은 딸의 머플러 두 장과 구두 한 켤레, 그리고 머리핀이었다.
물리적 시간은 한 시간이었지만
뒤를 따라다닌 내가 심리적으로 겪은 시간은 서너 시간이 넘었다.
지하라서 그런지 피로도가 더 빨리 몰려드는 것 같았다.
발바닥이 아파 나는 중간에 그 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쉬면서 아이폰과 놀았다.
어른이 되고도 이미 한참 지난 사람이 아이폰이 도대체 뭔가 싶었지만
(어른폰도 아니고…)
그래도 시간을 보내는데 그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몇 개의 트윗을 날렸고 블로그에 댓글도 달았다.
그것으로 두 여자의 쇼핑길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두 여자는 이제 문정동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아이폰으로 어떻게 가는지를 검색했지만
나는 지하철역의 안내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둘다 똑같이 문정역으로 가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1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고 좀더 확실하게 방향을 짚어냈다.
문정역 로데오 거리를 한바퀴 돌고 다시 지하철로 나왔을 때
시간은 다시 두 시간이 더 흘러 이제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둘이 추가로 더 구입한 것은 그녀의 상의 하나였다.
지하철 역 근처의 배스킨라빈스에서 팥빙수를 먹은 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자 이제 시간은 열 시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자그마치 여섯 시간의 쇼핑길이었다.
두 여자가 쇼핑길을 걷는 동안
나는 내내 산을 오르는 나를 상상했다.
두 여자가 가게에 들려 물건을 고를 때면
나는 중간중간 쉬면서 휴식을 취한다고 상상했다.
두 여자가 만두를 먹거나 커피를 마실 때면
나는 등산길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예쁘다고 힐끔거릴 때면
나는 예쁜 꽃들에게 눈길을 준다고 상상했다.
행선지를 아예 다른 곳으로 바꿀 때는
나는 또다른 봉우리로 향한다고 상상했다.
내가 산에 오르면서 즐겁듯이
두 여자는 쇼핑길을 돌면서 즐겁기 이를데 없었다.
등산길이 나의 행복이듯이 쇼핑길은 두 여자의 행복이었다.
10 thoughts on “두 여자의 쇼핑길”
정말 따님의 귀국 소식에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RSS에서 따님에 관한 글 제목만 보면 어라,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합니다.
문지양은 점점 예뻐지는 거 같아요.
이미 돌아간지 한참 되었는 걸요.
내년이면 3학년이예요.
대학 생활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는.
이제는 세월이 좀 무서워요.
남자사람에게 쇼핑 스트레스는 전쟁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동급이라면서요~
여자사람에겐 쇼핑과 수다가 없는 세상은 고무줄없는 빤쮼데 ㅎㅎㅎ
쇼핑과 수다 없는 세상이 고무줄없는 빤쮸라고 하면
그냥 고무줄 찾지 말고 벗고 살라고 해야지. ㅋㅋ
여자들이 많은 집에 살면서 응당 치러야 할 수업료를 너무 늦게 내셨네요.^^
한 세 시간은 예상했는데 그 배를 넘겨서 역시 막강하다고 생각하게 되어습니다. ㅋㅋ
ㅎㅎㅎ 정말…여섯시간이라면… 백두대간은 아니지만…ㅋㅋ
힘들으셨겠어요 그러나 저리도 예쁘고 깜찍한 따님과의 동행이셨으니…
음….참 행복해 보이세요 ~
그래도 딸과 함께 해서 행복행어요.
전 여직 동네 앞산정도만 다녔구나.
(예쁜 딸이 없어서 )
꼭 지리산 종주기 읽는 느낌.
(아이폰 댓글 입니다)
완전히 봉을 몇개나 탄 느낌이었어요. 속초에 와있는데 안개가 엄청 심하네요. 이것도 아이폰으로 다는 댓글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