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보기만 해도 시어!
아직 덜 익어서 그래.
하지만 내가 다 익기 전까지 이렇게 신 것은
내가 엄청 똑똑해서 그런 거야.
생각을 해봐.
내가 익기도 전에 달콤했다면
사람들이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겠어.
아마 알이 잡히기가 무섭게 따먹어 버렸을 거야.
나는 나를 지키는 무기를 찾아야 했지.
그래서 내가 찾아낸 게 바로 시큼하고 텁텁한 맛이었어.
그건 내 생명의 방패나 다름 없었지.
오직 그거 하나로 나는 익기 전까지 어떻게 하든지
버틸 수 있게 되었지.
모두가 나처럼 똑똑한 건 아냐.
세상에는 아주 순진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녀석들이 있지.
봄나물들이 대개가 그래.
냉이나 씀바귀가 바로 그런 녀석들이지.
녀석들은 막 세상에 나왔을 때
가장 상큼한 맛을 자랑하지.
때문에 걔네들은 맛을 갖고 초조하게 봄철을 살아.
그 맛을 다 버릴 때쯤에야 겨우 숨을 돌리지.
맛을 다 버리고 나면 그제서야 인간들이 넘보질 않거든.
맛을 가졌을 때 인간에게 걸리면 그것으로 인생 종치고 말아.
아마 우리도 익기도 전에 달콤한 맛을 가졌다면
초조하게 여름을 넘겨야 했을 거야.
시큼하고 텁텁한 맛은 여름에 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생존 전략이지.
너도 내게서 배워.
넌 너무 성급하게 달콤하게 다 익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마.
네가 달콤한 사람이란 걸 알면
금방 흡혈귀 같은 놈들이 네게 달려들어
네 단물을 쪽쪽 빨아 먹고 말 걸.
그리곤 단물이 다 하면 널 버리고 말거야.
그러니 너는 네 명대로 살고 싶다면
시큼하고 텁텁한 맛을 갖도록 해.
물론 시큼하고 텁텁한 맛만 가져선 곤란해.
그럼 곧바로 버려질 테니까.
너는 시큼하고 텁텁한 맛을 갖는 한 편으로
네가 언젠가 맛있게 익을 거란 기대를 풍겨야해.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시큼한대도 왜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겠어.
바로 내가 달콤하게 익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지.
그게 없다면 나는 벌써 버려졌을 거야.
그러니 너도 시큼하고 텁텁한 맛으로 너를 지키면서
아울러 곧 네가 달콤하게 익을 것이란 기대를 팍팍 풍겨줘야 해.
흡혈귀 같은 세상이 네 단물을 빨려고 들면
너는 그 기대로 유혹을 해 세상의 단물을 빨아 먹어 버려.
난 항상 그 줄타기에 능해.
시큼하고 텁텁한 맛의 오늘과 달콤하게 익은 내일의 맛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살아남고 있는 셈이지.
네가 가을에 드디어 맛보는 달콤한 나의 맛이
사실은 내가 나를 끝까지 지켜낸 뿌듯함에서 우러난 맛이야.
몰랐지?
내가 나를 지키며 가을까지 간다는 것을?
6 thoughts on “어느 날 아직 덜익은 포도에게서 들은 이야기”
덜 익은 청포도를 돌보아주시는 글…
재미있네요
그렇군요 시큼한 방어…음….^^
그냥 청포도에게서 한 수 배웠죠, 뭐. ^^
포도가 사람보다 몇 수 위네요.
요게 두 분하고 필님 실님을 처음 만나 저녁 먹을 때 찍은 거랍니다. 그날 댁에 놀러가서 예쁜 그릇에 담긴 사랑도 보았었죠.
그해 계절이 늦었을 때 다시 들렀는데 다 익은 다음에도 인간에게 단물을 빨리지 않고 아예 말라 비틀어지도록 천수를 누렸더군요. 정말 우리보다 몇 수 위의 포도인 듯 싶었습니다.
이 사진이 그때꺼야?
엄청 오래된 사진이구먼.^^
기억을 더듬다가 그 때 사진을 봤더니 감회가 새롭구만.
현승이 사진도 한장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