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시대로 내몰린 시인 — 신용목의 신작시 다섯 편

신용목,
『현대시』 2010년 10월호에 실린 대담 사진을 재촬영

1
신용목은 말했었다. 자신의 첫시집을 여는 시 속에서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갈대 등본」)고. 우리에겐 온몸을 분노로 뭉쳐 세상을 쏘아버리고 싶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 시대는 이제 갔다는 소리이리라.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그는 또 다른 자신의 시 속에선 황태의 이미지를 빌려 “강원도 깊은 덕장에서 하늘의 목 축여주며 입 벌려 마지막 고함을 산천에 뿌리고 싶지 않은 생이 있던가”(「수렵도」)를 묻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의 시 중 많은 시편은 그런 삶들의 의미를 깊이있게 바라보고 위로하는데 받쳐지고 있었다. 그의 시속에서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하늘로 오르려면 뛰어내려야 했다. “옥상에서 창문에서 다리 위에서/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추락했다 몸을 놓고 버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오직 ‘무덤’만이 “지상이 만든 가장 견고한 발사대”(「유쾌한 노선」)일 뿐이었다. 그런 세상은 여전히 우리들을 분노스럽게 만들었고, 시인은 자주 우리들에게 그런 세상을 얘기했다.
지금은 어떨까. 혹 지금은 분노만이 남아 시를 쓰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른 더더욱 어둡고 암울한 시대는 아닐까. 시인이 내게 건넨 다섯 편의 신작시엔 마치 그 대답이 담겨 있는 듯 했다.

2
시인이 내게 속삭였다.

삶은 아니지만 죽음은 이해해.
—「하지만 이해해」 부분

라고. 나는 그 글귀의 옆에 이렇게 썼다. 한 남자가 죽었다라고. 그것은 자연스런 죽음이 아니었으며, 시대가 내몬 죽음이었고, 시대에 맞선 죽음이었다. 심지어 나의 머리 속에선 어떤 구체적 이름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기까지 했다. 아니 한 남자가 아니었다. 내게 그 이름은 둘이었다. 그 이름은 셋이나 넷이 될 수도 있으리라. 이 땅에서 시대에 내몰린 죽음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이름들을 적지 않기로 했다. 그냥 시 속에서처럼 그를 ‘한 남자’라는 말에 담아 받아들였으며, 그러자 신용목의 첫 속삭임은 살아있을 때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들이 많았지만 그의 죽음은 이해가 간다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죽음이 이해된다는 말은 어떤 말일까.
첫 속삭임에 이어 신용목은 이번에는 “말할 때,/목소리를 이해해”라고 내게 속삭였다. 누군가 말을 하면 우리는 그가 하는 말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만 시인은 말이 아니라 목소리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말과 목소리를 나누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존재를 가운데 두고 그 둘을 나누어 보자 말은 존재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지만 목소리는 존재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었다. 종종 우리들에게 어떤 사람은 아울러 어떤 이념적 존재이다.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념적 존재로서의 상대와 하나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와 분리되어 정반대의 방향으로 어긋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말이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어떤 존재의 색깔로부터 정반대로 이탈할 때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즉 말이 이념적 존재로서의 상대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 존재로부터 이탈하여 배신감을 안겨주는 경우에 조차도 목소리는 상대의 것이다. 그러므로 목소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념을 떠나 어떤 상대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된다. 그런 경우는 살아있을 때는 맹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거의 일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생긴다. 바로 누군가가 죽었을 때이다. 죽음은 말의 존재가 가져왔던 배신감을 목소리의 존재로 덮어준다. 그리하여 나에게 죽음을 이해한다는 말은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말로 치환이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존재를 받아들인 시인은 혼잣말로 묻는다. “허공은 얼마나 큰 무덤인가?”라고. 이 말의 파장은 이중으로 퍼져나갔다. 우선 나는 시 속의 ‘한 남자’가 높은 곳에서 허공으로 몸을 날려 자살했다고 생각했다. 또 나는 시 속의 ‘한 남자’가 강변에서 몸을 불살라 이 시대에 저항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남자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허공을 무덤으로 삼은 셈이다. 자살한 남자의 마지막 길도 화장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니 그도 또한 연기가 되어 허공을 무덤으로 삼은 셈이다. 어쨌거나 그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아울러 죽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리고 있었다. 이 구절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던져준 것은 신용목의 다른 시였다. 그의 눈에 ‘화분’은 씨앗이 몸을 묻는 ‘무덤’이었다. 때문에 그는 “화원 앞을 지나다 보면 유리창 너머/관짝들이 황홀하게 놓여 있”고 그곳에서 ‘나무’와 ‘꽃들’이 “아름다운 봉분처럼 자라”고 있다고 말한다. 꽃을 피우고, 과실로 영그니 그 “무덤은 향기로울 것이다.” 또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높이에” “영혼을 띄워둘”(「화분」) 수 있는 것이 그 죽음이다. 신용목의 다른 시를 빌려오자 내가 알고 있던 죽음이 갑자기 꽃으로 피어올랐다. 죽음은 소멸로 끝나지 않고 허공의 맑은 높이에 띄우는 영혼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시인은 죽음을 그렇게 살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죽음이 살아나자 그들의 말도 살아났다. 이제 그들의 말은 ‘그 뜻’이 “남아 삶 속에 있”었다. 또 허공으로 몸을 던지고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진 자들의 ‘발소리’는 “발을 떠난 발자국과/허공을 떠난 고요 사이”로 울리고 있었다. 그 발소리는 영원히 울릴지도 모를 발자국 소리이다. ‘한 남자’가 자살과 분신으로 생을 마감하며 죽음으로 퇴장한 “텅 빈 무대” 앞에선 어둠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그 “어둠의 연기를 보는 머리가 동공처럼 열”리고 있었다. 죽음에서 한 개인의 삶은 닫히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죽음은 삶으로 열리고 있었다. 죽음에서 어둠이 아니라 빛을 보는 듯했다.
두 번째 시의 분위기는 좀 달랐다. 시인은 이번에는 내게 “그가 내 앞에 내민 것은 구름이었다”고 말했다. 시인이 말하는 ‘그’가 죽은 사람은 아닌 듯했으며, 그 구름은 내게는 뜬구름에 가깝게 보였다. 구름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었고, 그 중 네 갈래는 ‘동서남북’으로 걸쳐 있었으며, 나머지 한 갈래는 “위쪽이나 아래쪽”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갈래가 방향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시인이 “그것을 방향이라고 불러도 될까?”를 물으며 그것의 방향을 회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회의가 생긴 것은 구름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고 있었고 “뒤집을 때마다 뒤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구름이 뜬구름같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인의 관찰에 의하면 구름과 달리 강은 흐름을 갖는다. 방향을 갖는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강은 “늘상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향하”는 것 같지만, 즉 위쪽에서 시작되어 아래쪽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시인의 관찰에 의하면 “어쩌면 위쪽으로 채워지는 아래쪽”이 그 강의 진정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위쪽으로 채워지는 아래쪽”이란 말은 이중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위쪽이 아래로 흘러 아래쪽을 채우는 경우이다. 이는 늘상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향하는 강의 흐름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강이 어떤 이념의 강이고 그 이념이 수많은 지지자들로 구체적 힘을 얻는 것이라면 그 강은 아래쪽이 위쪽을 채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암암리에 진정한 강이라면 아래쪽이 위쪽을 채워주면 그때 아래쪽이 일러준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고 묻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그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구름을 내민 ‘그’의 경우엔 종종 “구름이 손바닥을 뒤집”을 때가 있었고 그랬을 때 “강물과 구름은 잘 분간되지 않고” 있었다. 시인은 “손에도 바닥이 있”고 그 바닥을 “쉽게 뒤집을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한다. 손바닥이 뒤집히는 그 혼란 속에 비가 내리고 그 비는 장마로 이어진다. 장마가 시작되면 우리는 지루하게 견뎌야하는 비를 마주하게 된다.
이제 시인은 그가 자신에게 내민 것이 구름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고 수정한다. ‘다섯 갈래’의 방향은 ‘다섯 개’의 수치로 바뀌어 있다. 손을 뒤집으면서 방향을 잃었고, 그러자 남은 것은 그저 수치 뿐이었다. 가야할 곳은 묻는 방향의 시대는 실종되고 얼마나 많이 이루었냐를 묻는 수치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그 현실 속에서 ‘그’와의 사이에는 소통은 없고 게임이 가로 놓인다. 그러나 그와의 게임은 이기고 지는 승패의 게임이 아니라 그냥 ‘순서’의 게임일 뿐이다. 이 게임에선 언제나 시인이 패할 수밖에 없다. 상대가 보밖에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상대는 언제나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래서 가위바위보에서 승패를 정하지 않고 순서를 정한다. “진 쪽의 달력을 한 장씩 찢자”는 것이 시인이 제안이다. 그러면 지는만큼 세월을 빨리 보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의 사람들은 비가 내리면 그냥 비를 피할 뿐이다.

위쪽이라고 하자 북쪽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아래쪽이라고 하자 남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손바닥으로 비를 가리고 뛰어갔다.
—「가위 또는 보」 부분

원래 구름과 비는 그런 것은 아니다. 구름은 비를 잉태하고, 그 비가 내려 강이 흐르며, 그 강이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의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비를 피해가야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그냥 묵묵히 견뎌갈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인가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내놓은 제안은 “이제 최초의 나를 찾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 얘기는 우리들이 최초의 우리를 잊어 버렸다는 얘기가 된다.
시인은 그 최초의 나를 찾으러 가는 심정을 두 가지의 비유에 빗댄다.

놀이터에 아이가 벗어놓고 간 잠바처럼
그네 위에 앉은 새처럼
—「투명한 순간」 부분

그건 일종의 마음가짐이리라. 가령 그런 경우 어른들은 아이에게 어디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느라 잠바를 잃어버리고 들어왔냐며 아이를 혼내겠지만 아이의 잠바는 아이가 자신의 놀이에 완전히 집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그 순간 아이는 부수적인 것에 신경쓰지 않고 놀이에 완전히 집중을 했고, 그 집중력은 너무도 강력하여 놀이가 끝난 다음에도 놀이에 부수적인 것을 완전히 잊게 만들었다. 그건 무서운 집중력이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몸에 걸치는 옷에 온 신경을 쓰느라 혹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옷을 잃어버릴까봐 놀이터에서 놀지도 못하고 옷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은 아닐까. 그네 위에 앉은 새는 또 어떤가. 새는 그네 위에 앉아 있어도 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혹시 우리는 원래는 마음만 먹으면 날 수 있는 새였는데 어느 날 그네 위에 앉아 발을 굴러 그네를 타본 뒤로 그 재미에 홀려 아예 나는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네는 앉아서 나는 듯한 환상을 심는 놀이기구이다. 우리는 날지도 못하면서 난다는 착각을 누리고 그에 빠져든다. 아니 우리는 날아야 하는데 착각에 빠져 우리들을 그 자리에 묶어놓고 그곳에 머문다. 새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쉬는 법은 있어도 그 착각 속에 안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는 주민등록 등본 속에 잘” 모셔두고, “미래는 보험증권 속에 맡”기고 살아왔지만 그것이 사실은 옷을 잃지 않기 위해 한번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삶일 수 있으며, 그네의 즐거움에 빠져 새의 날개짓을 잃어버린 삶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인은 그것이 “구름이 허공에 떠 있는 첫번째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 조건이 충족되면 이제 더 이상 누구도 구름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최초의 나를 찾으려면 집중해야 하며, 또한 나는 것을 잊을 정도로 현실에 안주해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그럼 그런 마음가짐으로 최초의 나를 찾아 나서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단 세상이 ‘투명’해진다. 지금의 세상에선 나무들이 초록빛 나뭇잎을 빛내며 자라고 있지만 사실 그건 불투명한 세상의 풍경일 뿐이다. 세상이 투명해지면 “나무들이 제 잎의 초록을 산책하고” 나무들의 “뿌리가 허공에 펼쳐놓은 그리움”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 우리는 지금까지 나를 산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의사가 말해주고/생각은 공안(公安)의, 검사가 가늠해주”는 시대를 살았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에게서 “최초의 울음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그 최초의 울음이 사라진 자리로 “최후의 울음을 울러 가”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최후의 울음을 울 때 다시 최초가 시작될 것이다.
시인은 비가 “구름이 허공을 가두는 마지막 조건”처럼 내린다고 말한다.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빗줄기가 창살처럼 보였음이리라. 그러나 투명한 세상으로 가면 비가 허공을 가두지 않고 “제 몸의 투명함을 산책”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이 ‘처음’의 순간일 것이다. 일단 우리에겐 그런 투명한 세상을 열기 위해 마음가짐을 달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잠바와 그네에 묶이지 않고 놀이와 나는 것에 집중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비는 그에게서 삼중의 속성을 갖고 있다. 처음에 그것은 구름이 손바닥을 뒤집을 때 세상에 내리는 것이었다. 그런 비의 세상에서 우리들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 그것을 피해가고자 했다. 그리고 비는 아울러 구름을 가두는 조건처럼 보였다. 내리꽂히는 빗줄기는 철창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는 마지막 순간에 “제 몸의 투명함을 산책하”며 우리들을 세상의 처음으로 데려다주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그런 비의 세상이 오면 이제 “구름이 허공을 가두는 마지막 조건”이던 시대가 “구름이 허공을 가지는 유일한 조건”인 시대로 바뀐다.
그런 삼중의 비를 내게 보여준 시인은 그 뒤끝에서 내게 “다음날 만나자”고 했다. 그건 아마도 마지막 비가 보여준 투명한 순간이 한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한 순간의 열림은 열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확신을 갉아먹으면서 그 열림을 닫아버린다. 즉 어느 한 순간 세상이 열리는 듯 하지만 비가 개인 풍경 속에서 세상은 “같은 시간대에 아파트를 도는 쓰레기차처럼 다음날이 되어도 바뀌지 않는 버스번호처럼/다음날”도 역시 ‘다음날’인 날들이 이어진다. 그건 열린 다음 날이 아니라 여전히 닫혀있는 다음 날이다. 그가 처음에 “다음날 만나자”고 했을 때의 ‘다음날’은 그와 달리 세상이 열리는 다음 날일 것이다.
그런 세상을 위해 시인은 “잠들기 전에/꿈을 꾼다”고 말한다. 신용목이 시의 제목을 「꿈 밖에서 잠들다」로 달아놓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잠 속에서가 아니라, 잠들기 전에 꿈을 꾸어둔다. 그러니 그가 잠들어도 꿈은 그대로 깨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렸거나 비가 갠 날 혹은” 어느 날은 “점 점 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눈의 형태로 내리는 날, 드디어 시인은 그렇게 열리는 다음 날을 보고야 만다.

드디어 영원한 다음날이,
시작되었다.
—「꿈 밖에서 잠들다」 부분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 보이진 않는다. 그것은 꿈의 지형도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 시점에서 나는 시인으로부터 「빨간날의 학교」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것을 주일학교라고 받아적었다. 아마도 어릴 적 기도를 했던 곳이었으리라. 그곳에선 모두가 똑같은 기도를 외우며 믿음을 잉태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곳을 가리켜 주일학교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남아있는 기억이 주일학교라는 명칭의 느낌과는 어긋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자주 사도신경의 마지막 구절을 틀렸다”고 기억하고 있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시인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아예 사도신경을 이탈하고 있다. “죄를 사하여 주신 것과 몸이 다시 사신 것과 영원히 사신 것”을 외우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시인은 습관적으로 기도를 따라가지만 그 기도의 뒤끝에서 그것을 “죄를 앞질러 형벌을 사는 것”이라며 습관적으로 따라가던 기도를 이탈한다. 시인은 “없어도 좋을 기적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믿으면”서 쑥쑥 십자가를 키운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고, 그가 기도를 올린 곳은 주일학교가 아니라 「빨간날의 학교」였다. 그러나 그 빨간 날의 학교에서 그가 올린 기도를 통하여 그는 세상의 어둠을 흔들어보일 힘을 얻으며, 그 어둠은 아마도 우리가 처음에 만났던 한 남자를 자살로 몰아넣었거나 또 다른 한 남자를 강변의 분신으로 몰고갔던 어둠일 것이다. 이제 시인의 앞에는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저녁은 종탑에 올라 한 장 한 장 구름을 찢어 불사른다
종소리가, 검은 재가 되어 떨어진다
—「빨간날의 학교」 부분

아마도 노을을 말하는 것이리라. 종탑의 뒷배경으로 걸린 노을일 것이다. 신용목은 “서해 변산”을 찾았을 때도 ‘해송’의 가지 끝에 걸린 노을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늘의 다비식”이었다. 그때 그는 노래했다. “가지 저 끝에서 타올랐으니 그래서 어두웠으니/휘어진 허리 감고 사리 같은 달과 별 더러 나오리”(「다비식」)라고. 그 노을은 타고 나서 소멸되는 죽음이 아니라 사리 같은 달과 별로 잉태되는 죽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종탑 뒤의 노을이 진 자리에서 저녁이 “구름을 찢어 불사”르고 있으며, 그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검은 재”가 되어 세상으로 날리고 있다. 지금은 노을의 자리에서 달과 별이 뜨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3
나는 다섯 편의 시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했다. 하지만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을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들을 끌고 지금의 현실 한가운데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물론 처음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를 읽다 보니 그의 시는 나를 현실 속으로 이끌었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읽은 신용목의 신작시 다섯 편 속에선 죽음을 꽃으로 일으킨 뒤 허공을 향기로 가득찬 무덤으로 삼고 싶어했던 시인이 종소리가 흩뿌리는 검은 재를 뒤집어 쓴 채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 속에 서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다.
(『현대시』, 2010년 10월호)

**책을 받아보고 난 뒤의 아쉬움에 대하여
보통 시는 일정한 순서를 갖고 건네진다. 그 순서가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임의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순서를 가져도 읽을 때 건네진 순서대로 읽지는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읽으면서 나름대로 시를 말할 순서를 잡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건네준 순서대로 읽고 말았다. 잡지를 받고 보니 가장 먼저 읽은 시가 맨 뒤로 가 있다. 그 순간 내가 심각한 착오를 일으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할 순서를 고려하여 글을 구성했어야 했는데 그 부분에서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은 첫 시는 시인의 꿈이었다. 그 꿈을 앞에 놓는 바람에 그 꿈을 짓누르는 어둠의 현실이 뒤를 이었고, 그 어둠 속에서도 시인이 모색하는 꿈이 있긴 했지만 마무리의 자리에서 암울한 어둠의 현실이 세상을 뒤덮었다.
만약 그 꿈을 맨 뒤로 놓았다면 글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현실의 어둠을 가장 먼저 말했을 것이며, 그 속에서 모색하는 꿈과 기도로 그 현실 속에서 약간의 숨통을 튼 뒤 마지막의 자리에서 그 어둠이 내몬 죽음으로부터 오히려 삶으로 일어서고 있는 꿈을 보았을 것이다. 많이 아쉽다.
편집장이 잡은 순서인지, 시인이 직접 부탁한 순서인지 알 수 없으나 잡지에 실린 시의 순서는 내 글이 빠뜨리고 지나간 순서상의 부족함을 바로잡아 주고 있었다. 아쉬움은 나중에 별도의 글로 그 다섯 편의 시를 다시 한번 돌아보며 달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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