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억새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일 경기도 하남의 미사리 한강변에서

난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가 끊임없이
그 바람에 흔들리는 줄 알았다.
억새는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데
억새에 대한 내 생각은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전혀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억새 앞을
수도 없이 지나쳤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앞에서 사실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난 왜 그랬던 거지.
그래서 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앞에서
굳어있는 내 생각을 버리고
그냥 억새처럼 생각이 흔들리도록 버려두기로 했다.
그리하여 생각이 바람에 흔들리자
갑자기 놀라운 풍경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제 억새들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손을 벌리고 있었다.
억새가 끊임없이 손을 벌리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건 바람을 잡기 위해서 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바람은 정말 바람같이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그러나 종종 억새는 바람을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바람을 손에 움켜쥔 억새는 하얗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하얀 손의 아래쪽엔 작은 씨앗들이 꿈처럼 들려있었다.
억새는 바람을 손에 잡는 순간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다.
손에 손에 꿈을 들고.
서쪽 하늘을 넘어가는 해가
바람을 움켜쥐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 비상의 순간에
마치 축하의 축포라도 되어 주겠다는 듯이
억새의 섬세한 손길 끝에서 반짝반짝 부서지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허공으로 손을 뻗어
자꾸 바람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억새 밭을 나오는데 자꾸 걸음이 흔들려 몇 번인가 넘어질 뻔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일 경기도 하남의 미사리 한강변에서

8 thoughts on “바람과 억새

  1. 억새가 바람을 잡아 여행을 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그림동화를 만들려고 몇 달동안 억새와 바람 캐릭터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우연히 이미지 검색하다 이 글을 접했습니다. 깜짝 놀랬지요. 제주 용눈이 오름 옆에서 해마다 제게 말을 건네는 억새이야기를 하려해요.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어 포근한 느낌을 가집니다.

  2. 얼마 전 오랜만에 저녁산책 나갔다가 억새밭과 새로 조성된 알굵은 강아지풀무리가
    넘 멋있어 사진 찍어야지 하곤 여태 못찍고 있답니다.
    석양을 품은 억새풍경이 차~암 우아하군요. Gorgeous!

    1. 여기저기 엄청나게 가꾸어 놓았더군요.
      바로 집앞이니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으시잖아요.
      햇볕이 있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오는 거 같아요.
      빛이 부서지는 모습이 예쁘거든요.

  3. 갈대가..그..금은빛이네요
    참 이뻐요 …저도 늘 바람에 억새가 흔들린다고만 생각했는데요
    손을 벌려 바람과 악수하려는 갈대로 상상하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오네요^^ 감사요~

    1. 원래 이곳이 한쪽 귀퉁이에만 자연스럽게 조성된 억새밭이 있었는데 올해는 여기저기 많이도 조성해 놓았더군요. 단풍 찍으러 산에 한번 가고 싶고…
      아, 팜플렛 잘 받았습니다. 고마워요.

  4. 곧 씨앗을 흩어 날릴 찰나, 금빛으로 빛나는 한 때를, 그때가 가장 충만한 시간일거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아름다운 자연! 거기다 더 아름다운 시선을 가진 작가님!

    1. 가끔 고맙게도 자연이 제 눈에 좋은 풍경을 내준다는 느낌이 들어요.
      지지난 해인가도 이곳에 갔었는데 그때는 올해 같은 느낌을 안내주더니 올해는 낯이 익었다고 좋은 느낌을 선물로 눈에 담아주더군요. 어디든 서너 번 가서 낯을 익혀야 선물이 나오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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