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토요일,
부산으로 내려갈 때 나는 길을 기록해가고 있었다.
언제나 처음 갈 때는 길을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길을 돌아올 때
그 길은 기록이 아니라 복기의 길이 된다.
그때 나는 길을 기록하지 않고 되짚는다.
부산 송도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그 다음 날인 10월 31일 일요일,
나는 부산 송도에서 시작하여
서울로 가는 길을 복기해 가고 있었다.
내려갈 때의 길은 부산 송도의 등대횟집에서 마무리되었지만
올라올 때의 길은 자갈치 시장이 있는 부산 남항에서 시작되었다.
아침의 부산 남항에선 바람이 항구의 물을 흔들어 물결을 만들고
그러면 아침 햇볕이 그 물결의 굴곡을 따라
갖가지 둥근 문양의 음영을 그리고 있었다.
항구의 물은 마치 수많은 둥근 고리들의 어지러운 군무같았다.
둥근 고리들은 제 몸을 부풀리는가 싶더니
곧장 다른 고리에게 자리를 내주며 끊임없이 함께 일렁거렸다.
우리도 지난 밤 물결처럼 서로 어울려 일렁거렸을지도 모른다.
남항의 아침 물결이 우리들처럼 일렁거렸다.
난 그 문양의 군무를 잠시 즐기다
자갈치 시장에서 어젯밤에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한 아침을 끝으로
부산에서의 이틀을 마무리했다.
아침값는 내가 내고 싶었는데 극구만류한 플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어제 해운대에서 송도로 가는 길은
1001번과 17번의 버스 두 대가 나를 넘겨주고 넘겨받으며 데려다주었는데
올라올 때 송도에서 해운대로 가는 길은 택시가 복기를 맡아주었다.
택시비는 같은 방향의 부산 사람이 절반을 내주었다.
해운대의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10시에 곧바로 버스가 있다고 했다.
해운대에서 동서울까지의 버스 요금은 27,700원.
내려올 때보다 올라갈 때의 요금이 더 싸다.
버스의 출발 시간이 10분여밖에 남아있질 않아
급하게 화장실에 들러야 했으며,
동서울로 간다는 해운대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을,
그것도 버스 속에서 한장 찍는 것으로
부산에서 출발 풍경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버스가 고속도로를 따라
울산까지의 길을 복기해 가는 동안
날을 지샌 지난 밤의 여파로 나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울산의 시외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서 있었다.
버스 정류장 옆의 한 건물에 커다란 대관람차가 우뚝 서 있었다.
내려갈 때도 보긴 봤었다.
버스는 곧 울산을 빠져나갔다.
버스는 길을 잘 안다는 듯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방향을 왼쪽으로 튼다.
방향을 왼쪽으로 틀면 그곳에서
어디론가 가는 길이 버스를 그 품에 안아
버스의 방향을 이끌어준다.
방향을 트는대로 그 방향으로 열리는 길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때로 우리들이 살아가다 방향을 트는 곳엔
종종 길이 막혀있는 경우가 흔하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방향을 구하는 버스 앞에
길이 막혀있는 경우는 없었으며
또 서울로 오는 동안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방향에 따라 열리는 길의 행복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길은 복기의 방향을 놓칠까 싶어
어제 내려온 길의 기억을 바로 옆으로 바짝 붙여둔다.
바로 옆, 어제 내려온 길의 기억을 따라 차들이 끊임없이 내려오며
그 길에서 새로운 기억의 하루를 빠른 속도로 밟아간다.
북쪽은 거의 모든 논을 텅비웠으나
남쪽은 아직 추수가 한창이었다.
종종 가을걷이가 한창인 풍경이 차창을 가득채우곤 했다.
길의 복기는 내가 타고 가는 버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끔 기차가 지척의 철로를 밟고 서울로 가며 길을 복기한다.
어제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강휴게소 부근을 지날 때쯤 올려다 본 산에선
단풍에 든 나뭇잎들이 가을을 노랗고 붉게 복기하고 있었다.
올라오는 길의 하늘에도 구름이 많았다.
내려갈 때의 그 구름은 아니었다.
구름은 피어났다 사라질 뿐 모양과 자리를 다시 복기하는 법이 없다.
보통은 넓은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가는 법이지만
오늘은 구름의 사이를 비집고 하늘이 흘러가고 있었다.
올라오는 길은 내려갈 때의 길을 온전히 복기하지는 않았다.
톨게이트를 지난 버스는 내려갈 때의 길을 힐끗거리지 않고
한남대교로 곧장 달리더니 다리를 건넜다.
내려갈 때의 다리는 잠실대교였다.
버스는 서울에서 제일 넓은 다리를 건너고 있었으며,
내려간 길의 복기는 아니었으나
사는 곳이라 그런지 풍경은 익숙했다.
버스는 한남대교의 북단에서 강변북로로 들어선다.
강변북로에서 버스를 맞아준 것은 도로를 가득매운 수많은 차들이었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뒤끝에서
내가 탄 버스도 어느 차인가를 꼬리를 물고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체증은 이내 풀렸고 나는 곧 동서울 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렸다.
부산으로의 여행이 시작된 곳이었다.
그녀가 마중나와 나를 차에 싣고 집으로 데려갔다.
눈을 붙이지 않고 보낸 부산 여행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밤을 새며 술을 마실 때 뉴욕에서 온 청년은 그랬었다.
꿈만 같아.
우리는 온전히 눈뜨고 그 꿈을 지키고 싶어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날을 밝힌 것인지도 모른다.
꿈같은 이틀의 부산 일정이었다.
4 thoughts on “길의 복기 – 부산의 송도와 해운대에서 서울까지”
아… 울산을 지나서 가셨네요^^
롯데백화점에 있는 관람차가 보이네요
길의 복기…. 좋은데요.
그게 롯데백화점 건물이군요.
내려갈 때 한번보고… 올라올 때 한번 보고.
길을 복기하려고 똑같은 버스를 타고 올라왔지요. ^^
언제 날잡아 뉴욕에서 벙개하시죠.
갈 차비만 있으면 올 차비는 뉴욕 청년이 주겠죠 뭐.
오고가는 차비는 각자 부담이고…
대신 먹고 자는 것은 쏴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