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살고 있는 집은 역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역이 주조의 남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딸의 집은 북쪽으로 한참 올라오기 때문이다.
물론 걸어서 다닐만한 거리이다.
항상 어딘가를 갈 때마다 전철역으로 나갔기 때문에
나도 역주변의 지역을 가장 익숙하게 눈에 익혔다.
그러다 와세다에 갔다 오는 날 철로변을 따라
북쪽 지역에서도 동쪽으로 올라가 보았고,
그곳에서 시미즈사카 공원의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시미즈사카 공원을 나온 나는
북쪽 동네의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딸의 집으로 향했다.
화분을 집밖으로 내보내
넘쳐나는 초록과 꽃으로 사람들을 맞는 집은 가끔 보았지만
이렇게 골목 가득히 화분이 넘쳐나는 곳은 처음이다.
이 골목에선 화분의 초록과 꽃들이 흘러
저만치 보이는 커다란 나무의 호수에 이르는 것인가.
아니면 나무의 호수에서 흘러나와 이 많은 화분으로 넘쳐나고 있는 것인가.
양쪽으로 늘어선 화분들로 인하여 멀리 서 있는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초록의 호수가 되었다.
호수에 약간의 가을 기운이 엿보였다.
자동차와 자연, 정치 포스터가 한 자리에 있는 어느 집의 담장 풍경.
하긴 그렇긴 하다.
자연은 이제 현대 문명과 정치의 사이에 있다.
문명은 편리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자연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고
정치는 변화와 현실 유지의 밀고 당기는 싸움에서
종종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끼로 자연 개발을 내세운다.
자연은 자꾸만 자리를 줄여 문명과 정치에 그 자리를 내준다.
하지만 그래도 이 집에선 여전히 자연의 자리가 남아 있다.
비록 화분에 담아 가꾸어 주어야 하는 처지이긴 했지만.
주인이 군인 출신인가벼.
나무들이 다들 차렷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구에겐 잘 가꾸어 놓은 단정한 나무일텐데
나에겐 경직된 자세로 굳어 있는 군대 문화를 연상시킨다.
지긋지긋하던 군사 정권 시절을 겪어야 했던 나의 시대가 한몫하는 것이리라.
이 집의 나무는 정말 유연하게도 몸을 비틀고 있다.
나는 묻는다.
너는 인도 출신이니?
왜 그런 걸 묻냐고?
갑자기 너의 유연한 몸매를 보니
시바의 춤인가 뭔가 하는 춤이 생각났거든.
그런데 다음 순간… 어디선가
이상하게 생겼네 하는 광고성 노래가 흐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삐이~ 삐이~ 꼬였네 들쑥날쑥해~
난 울타리가 바깥은 가로막고 안만 지켜주는 일종의 분리 장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니 그게 아니다.
울타리는 안과 밖이 만나는 만남의 광장이다.
집안의 담쟁이와 나무가 바깥 화분의 덩굴 식물과
울타리에서 만나 해후하고 있다.
사람들은 울타리로 바깥의 걸음을 막으려 들었지만
그 자리를 가운데 두고 자연을 놓아두자
울타리는 이제 기쁜 만남의 자리로 바뀐다.
너는 무슨 나무니?
“나는 4층 초록나무야.
4층 석탑의 나무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거야.
가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를 말할 때도
몇 층짜리 몇 층짜리로 층을 말하긴 하더라만
나는 도저히 아파트의 층은 구분을 할 수가 없어.
층을 구분하려면 층과 층 사이에 바람이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해.
아파트는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맨밑부터 맨꼭대기까지
바람 한 점 들이밀 틈이 없더구만 어디에 층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어.
층은 바람이 나누어주는 거야.
그렇게 층을 나누어 바람을 드나들게 하면
바람이 올 때마다 층층이 사랑이나 희망, 행복, 기쁨을 두고 가지.
나같은 4층 나무를 한 번 키워봐.
최소한 층층마다 하나씩, 바람이 가져다주는 좋은 선물을 받게 될 거야.”
사람이 모두 일색일 수는 없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일본 사람들은 작은 공간도 비워두는 것을 못참는가 보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이 집은 상당히 넓어보이는 집앞의 공터를
그냥 잡초들의 공간으로 내주면서 텅비워 놓고 있다.
잡초들은 이상하다.
분명히 공터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그 존재감으로 공터를 자신들의 차지로 만들지 않는다.
잡초들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공간의 느낌을 비워준다.
나는 공간을 텅빈 자리로 버려둔 이 집이 가장 좋았다.
울타리마저 없는 집이었다.
가을이라 그런지 꽃이 귀했다.
그러다 드디어 꽃을 만났다.
담장 너머로 꽃을 내려 한 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마음에 담아서 받았다.
저녁 반찬 거리 하나 사려고 편의점으로 가다가
성냥갑만한 차를 하나 보았다.
언듯봐선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도 모르겠다.
오른쪽이 앞이다.
작지만 싸 보이지는 않았다.
요즘은 작은 게 더 비싸다.
신호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은 하나,
자전거 타고 기다리는 사람은 다섯.
자전거의 나라 실감난다.
길건너편에서 일본 전통 의상 기모노를 입은
여인네 두 명을 보았다.
우리의 한복은 결혼식 때나 명절날 입는 옷이 되어버렸는데
일본에서 전통의상의 위치는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기모노는 종류가 많은 모양이다.
옷을 잘아는 사람이라면 옷만 보고도 짐작가는 것이 있다는 얘기인데
나는 그저 일본 전통의상을 길거리에서 보았다는 반가움 이외에는
어떤 짐작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