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와세다 캠퍼스를 돌아볼 때는
점심먹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하지만 혼자다니면 먹는 것이 가장 뒷줄로 밀리고 만다.
먹는 것이 뒤로 밀리면 배는 좀 고프지만
많은 것을 돌아보아도 시간은 그리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였는지 와세다 캠퍼스 두 곳을 모두 돌아보았는데도
오후 3시쯤에 벌써 딸의 집이 있는 주조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직 해가 남아있었다.
그 전에 구글 어스를 통해
동네 근처의 공원들을 미리 살펴봐 두었었다.
꽤 여러 개 였다.
시간 남을 때마다 하나씩 섭렵할 생각이었다.
그 중 한 곳의 위치를 막연하게 짐작해가며
역에서 철로변의 길을 따라 주조의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가게의 안내 전단지이다.
돌돌말아 하나씩 들고가기 좋게 해놓았으며,
예쁜 바구니에 담아 눈길도 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전단지 하나에 가게 주인의 마음이 담긴 느낌이 든다.
기찻길 옆의 집들.
시끄러울텐데… 방음벽을 거의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철로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철망으로 된 울타리를 쳐놓는 것은 종종 보았다.
울타리의 높이는 넘기 어려울만큼 높았다.
그런데 여기는 집의 뒤쪽으로 울타리도 없다.
집의 뒤쪽이 철로쪽으로 향하고 있어 그것을 벽으로 삼은 것도 같다.
남의 나라에 오니까 조심스럽다.
풍속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짐작 때문이다.
딸에게 이불을 바깥에 대고 털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다들 그렇게 턴다고 했다.
이 집은 이불인지 요인지를 바깥으로 내 걸었다.
오늘은 그렇게 햇볕이 좋은 날은 아니었다.
그러니 쨍한 햇볕을 빌어 눅눅한 습기를 털어내는 데는 조금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도 바깥 바람은 실컷 품었을 것 같다.
도쿄는 바닷가의 도시라서 그런지 서울보다 공기는 훨씬 좋았다.
그 좋은 공기를 하루 종일 쏘인 이불은 느낌이 괜찮을 듯 싶다.
주조역에서 나오자 마자 만나는 시장은 주조 시장이다.
그 시장은 돔형 지붕을 덮어쓰고 있다.
주조 시장을 빠져나오면 노천 시장을 만난다.
오늘 처음 지나가 본다.
후지미 시장이라고 되어 있었다.
시장의 가로등 모양이 달랐고
가로등에 걸려있는 걸개그림도 달랐다.
딸이 매일 다니는 주조 시장의 골목은
가로등에 하트 문양의 걸개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여기는 걸개 그림 속에 고양이가 있다.
시장 골목마다 걸개 그림으로 나름 특색을 살리는 것 같다.
일본에 와서
자전거의 앞뒤로 아이를 태우고 가는 아주머니를 여러 번 보았다.
거의 예외없이 아이들에게 안전 헬맷을 씌우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점이었다.
몇 번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자전거가 항상 휙하고 빠르게 지나가서 찍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뒷모습만 겨우 남겼다.
우린 하나 낳아서 기르기도 힘든데
여긴 아직 아이 둘은 낳아서 기를 여력이 남아 있는가 보구나.
이 집은 세 집 같은데 마치 한 집처럼 보였다.
문을 각각 따로 둔 것을 보면 세 집이 분명한 것 같은데
세 집이라고 보기에는 한 집의 크기가 너무 작아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 집의 크기를 세 집이 나누어 갖고 있긴 하지만 한 집처럼 보인 것을 보면
이 세 집은 다양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맨 왼쪽의 집은 색채를 내세웠다.
주황과 연두빛이 이 집의 색이다.
가운데 집은 색보다는 투명을 주제로 삼았다.
그렇다고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벽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투명한 유리나 비워놓은 공간의 투명성이 벽을 대신한다.
오른쪽의 집은 두 집의 절충을 모색하고 있다.
아래층은 왼쪽 집과 마찬가지로 벽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 색은 베이지를 선택하여 느낌을 달리했고,
위층은 가운데집과 마찬가지로 집을 뒤로 물려
베란다 공간의 투명함을 가운데 집과 공유했다.
사는 사람들의 성격은 어떨까.
집의 형태로만 보면 왼쪽 집의 사람들이 가장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반면
가운데 집은 가장 개방적이고 이웃과 잘 어울릴 듯 하며,
오른쪽의 집은 두 집의 중간쯤 갈 것 같다.
한 집 같은 세 집이 내 걸음을 붙잡아놓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참, 자전거 자주 만난다.
네 대의 자전거가 나란히 서 있다.
줄을 잘 맞추어 선 그 가지런한 질서가 내 눈을 끌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서가 부럽겠지만
나는 질서에 대한 반역을 더 사랑한다.
어떤 누군가의 자전거 한 대가 가지런히 줄에 서면서
엉덩이를 반대로 집어놓고 머리를 내게로 향하여 섰더라면
훨씬 내 마음에 흡족했을 것이다.
드디어 내가 찾아가보려 했던
시미즈사카 공원에 도착했다.
한자로 된 공원의 이름을 우리 식으로 읽으면 청수판공원(淸水坂公園)이 된다.
한자의 뜻으로 풀어보면 맑은 물이 솟는 언덕이다.
이름만으로 보면 옛날에 이곳에 샘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공원의 한켠에서 트럼펫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는 아이였다.
한국에서도 공원 같은 곳에서 트럼펫을 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지만
대개는 나이든 중년이었다.
아이가 트럼펫을 부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가을 정취와 잘 어울렸다.
일본의 공원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야구였는데
여기는 배드민턴족들이 가장 많다.
아이들이 예의는 바르다.
곁으로 지나가면 잠시 치던 걸 멈추고
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이들 중에 피부가 검은 아이도 보았다.
가무잡잡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프리카계로 보이는 아이였다는 소리이다.
말은 일본어를 쓰고 있었다.
일본도 우리처럼 외국인들의 이주가 많은가보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잘 놀고 있었다.
지그재그로 내려오는,
세상에서 가장 길어 보이는 미끄럼틀도 보았다.
무척 재미날 것 같았는데 미끄럽질 않은지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이
손으로 엉덩이를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힘들게 내려오고 있었다.
끙끙거리며 힘주어 엉덩이를 끌고 내려가야 하는 미끄럼틀이라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나오는 길에 보니 나무밑이
붉은 가을로 화려하다.
여름내 이끼가 점령하고 푸른 색으로 경계를 표시해 두었던 세상을
이제 가을이 점령하더니 가을빛이 완연한 나뭇잎들을 내려보내
붉게 칠해놓고 있었다.
4 thoughts on “주조의 시미즈사카 공원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6-5”
섬세하게 다가가서 기록한 여행기 잘 보고 있습니다.
자전거, 낙엽, 세집한집(?), 따님, 지하철,,…
사실은 돈 아끼느라고… 딸 사는 곳 주변만 돌아본 거라는.. ㅋㅋ
요즘 나오는 여행서들 가운데 기존의 유명 관광지 중심의 묘사보다는
장기간 머물며 한두 테마를 집중해 다루는 책들이 눈에 띄는데,
동원님의 포스팅은 이보다 더 미시적인 여행자의 시선이라
오히려 한 발 앞서 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생활여행이랄까 미니멀리즘 추구랄까, 이런 여행도 해볼 만 하겠단 생각이 드네요.
이게 여행이라고 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그냥 전혀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사는 주택가를 돌아다니다 온 거라서요. 사는 모습이 다르니 어딜가나 구경할 게 눈에 띄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