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뒤편에서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7-2

일본에 가서 하루에 무려 네 편의 연극 공연을 보았다.
74년째를 맞은 4개 대학 영어연극제에서 였다.
하지만 내 온신경이 몰려가 있는 곳은 무대 위가 아니었다.
나의 관심은 온통 무대 뒤편으로 몰려가 있었다.
와세다팀의 일원으로 이번 연극제에 참가한 딸이
소도구 담당으로 행사에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이 소도구 담당이 된 순간,
내게 연극은 공연 중심이 아니라 소도구 중심으로 재편이 되고 만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딸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녀석의 뒤를 쫓아다녔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딸은 12시쯤 공연장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만
와세다팀의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간간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딸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딸을 찾아낸 것은 이전 팀인 릿교대학의 공연이 끝나고
와세다가 자신들의 공연을 준비할 즈음이었다.
뒤섞여 있는 학생들의 사이에서
드디어 설치할 무대 장치를 잡고 서 있는 딸을 발견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무대 위의 어느 배우도
내 시선을 딸보다 더 많이 앗아가진 못했다.
내 시선은 딸이 눈에 띄기만 하면 딸의 것이었다.
무슨 저렇게 예쁜 소도구 담당이 다 있냐.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팔뚝에 무슨 목록이 잔뜩 붙어있다.
아마도 들여가야할 무대 장치들의 목록인가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이 영어연극제는 물론 연극으로 승부를 가리는 행사이긴 하지만
수상 자격에 관하여 한가지 제한을 두고 있다.
바로 정해진 시간에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네 팀이 공연을 하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게 주어지질 않으며
그 때문에 무대를 설치하고 철거하는 작업이 전쟁이다.
무대의 설치는 공연의 바탕을 이루는 작업이라 사람들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 연극제에선 그렇질 않다.
연극의 중간중간에 이루어지는 무대의 설치와 철거가
연극못지 않은 구경거리이다.
사람들은 연극이 끝나면 공연장 바깥으로 몰려나와
무대를 철거하고 새롭게 설치는 작업을 구경한다.
무대를 설치하고 철거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
이 연극제에선 아예 수상 자격조차 갖지 못하기 때문에
다급한 마음들이 쏟아내는 온갖 고함소리가 난무한다.
딸은 말했다.
아빠가 일본어를 못알아 들어서 그렇지
급한 사람 입에서 욕나오는 것은 다반사라고 했다.
지금은 그 결전의 순간을 앞둔 폭풍 전야의 시간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간간히 결전을 앞두고 구호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에 딸이 웃는다.
난 못알아 들어서 웃을 수가 없는 형편이지만
나도 딸의 웃음에 묻어서 웃곤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드디어 무대 장치들의 반입이 시작되었다.
바깥에 있던 무대들이 안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밑에서는 들어올리고 위에서는 끌어올린다.
그리고는 무대로 향한다.
대형 장치들은 중심이 흩어지면서 휘청거리는 위험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이제 모든 무대 장치들이 다 들어가고
들어가서 설치하고 마무리 손질을 해야할 순간이다.
딸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무대 뒤쪽으로 사라졌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난 공연장의 객석으로 향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이제 연극이 끝나고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철거 작업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고함소리에 실어서 무대 장치를 나르는 느낌마저 난다.
첫번째로 공연했던 히토츠바시와 츠다 대학의 학생들이
무대에서 장치를 들어내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왼쪽의 짙은 고동색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철거가 다 끝나고 나면
진행 요원이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알려준다.
시간내에 잘 끝냈나 보다.
울먹이는 학생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와세다 학생들이 박수를 받으며 회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곧 돌아오겠지 했는데 종적이 묘연했다.
할 수 없이 진행을 맡고 있는 학생 하나에게
와세다팀은 도대체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쪽에 강이 있는데 그 강변으로 가보라고 했다.
한참을 내려갔는데도 강이 보이질 않는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 두 명을 보고 이 근처에 강이 있냐고 했더니
영어에 당황했는지 “Sorry”하고 한 마디 하더니 저희들끼리 와하하 웃는다.
작은 개울을 발견하고
그 물줄기가 흘러가는 곳으로 대충 방향을 짐작하며 가다보니
다리가 하나 나온다.
드디어 찾은 듯 싶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와세다 학생들은 모두 다리 밑에 모여있었다.
많기도 하다.
딸이 어디쯤 있는지 찾기도 어려웠다.
무대 위에서 두 시간 가량 조명을 독차지했던 배우들도
모두 여기서는 연극 서클의 일원으로 뒤섞여서 함께 서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사람들은 모두 무대의 배우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오늘 와세다의 연극 한편을 위하여 이 많은 학생들이 동참했다.
무대의 설치와 철거는 네 번 정도 연습을 했다고 한다.
딸에게서 난생 처음 톱질과 못질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루는 태양이 밝히고 거두지만
한편의 연극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무대 뒤편의 땀으로
그 무대의 공연을 시작하고 마감한다.
그 땀중에는 소도구 담당으로 딸이 흘린 땀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께 연극을 밝히고 마무리했던 학생들이
이제 함께 하며 누렸던 그 기쁨을 한자리에 모여 정리하고 있었다.
함께 모여 정리할 때 기쁨은 공유가 되면서 크게 증폭이 된다.
그 증폭된 기쁨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이런 자리에선 스크럼이 빠질 수 없다.
스크럼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기쁨들을
좀더 진하게 농축해준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와세다의 연극 Lend Me A Tenor에 출연했던 배우들이다.
강변에서 모였다가 올라오는 길에 포즈를 부탁했더니 기꺼이 응해주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연극이 끝나고 난 뒷자리는 즐겁다.
카메라가 다가서자 그 즐거움을 표현하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모두 다함께 다시 시키시민회관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날이 너무 어두워져 플레시를 사용해야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공연을 끝낸 학생들은 한껏 기분이 부풀어 올라있었다.
오전에 보았던 차분했던 모습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보통은 카메라 앞에서 경직되는데
이런 순간에는 오히려 다가오는 카메라를 반긴다.
그러므로 기분이 크게 부풀어 올랐을 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한다.
남학생 둘이 다가선 카메라를 마주하고 V를 합창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다섯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완전히 어둑어둑하다.
이제 딸은 무대 장치들의 마무리 정리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회관의 창쪽에서 가이드를 서고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한 학생은 무대 장치들을 준비해놓고 설치를 기다렸던 곳에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땅에 온몸을 맡겼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은
그냥 엉덩이만 내려놓았을 때와는 완연히 다르다.
오늘은 피곤해서 드러누웠다보다
아마도 온몸으로 체감되는 뿌듯한 기쁨을
땅과도 나누고 싶어서 그리했을 것이다.
사실 이 학생들은 쉬고 있는 중은 아니다.
실제로는 무대 장치들이 남긴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줍고 있는 중이다.
뒷정리 한번 알뜰하게 하기는 한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4일 일본의 시키시민회관에서

자식을 키우면서 갖게 되는 좋은 덕목 중의 하나는
자식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마음 속에서 서열을 키울 때가 많다.
가령 연극 공연이라면
연출이나 무대 위로 직접 얼굴을 내미는 배우를 그 서열의 앞에 세우고
보이지 않는 뒤편의 사람들을 그 서열의 아랫 자리로 내린다.
보통 우리는 자식이 그 서열의 앞으로 서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두가 그 서열의 앞에 설 수 없음은 물론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서열의 뒷자리에 선 자식이
항상 그 서열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자식은 세상의 모든 서열을 뒤흔들어
세상이 서열없이 동등하게 서 있어야 한다고 부모에게 속삭인다.
그 순간 회관 입구에서 찾아온 관람객을 맞아주며 길을 안내하는 학생이
소중하기 이를데 없어진다.
무대 위에서 빛나고 있는 배우와 함께
그 뒤편에서 무대를 위해 땀을 흘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가 된다.
자식이란 뛰어나고 잘되었기 때문에 자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자리에 있어도 소중하기 이를데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며
세상의 모든 존재를 줄세우는 서열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더없이 귀하다.
자식은 그렇게 세상의 서열을 뒤흔들어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운다.
연극이 끝나고 심사위원 중의 한 명이었던
엘리자베스 맥그로가 말했었다.
연극은 곧 인간이며, 인간은 곧 과정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참여는 결과에 관계없이 참여하는 시간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다면 모든 연극은 성공인 것이라고.
그녀는 이 연극제에 참여하며 기쁘고 즐거운 순간들을 함께 했다면
수상과 관계없이 모두가 승자라고 아주 값진 말을 선물했다.
우리는 종종 결과만을 보며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놓친다.
자식을 갖고 있고, 그 자식이 과정 중의 한 사람으로 함께하고 있으면,
그 과정을 놓치지 않는, 그러니까 인간을 놓치지 않는 행운을 갖게될 때가 있다.
밤이 늦어가는 공연장의 바깥에 딸이 서 있었다.
소도구 담당으로 오늘 와세다의 연극과 함께 한 내 딸이었다.

8 thoughts on “무대의 뒤편에서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7-2

  1. 짠~하네요.
    와세다대 후드티 와인색이 참 이쁘군요.
    연극반규모가 대단하네요, 단과대 모임쯤 되보여요.
    평생을 두고두고 꺼내볼 만한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있으니
    이만하면 매우 성공적인 대학생활인 듯 하옵니다.
    아! 또 보고 싶으시겠군요..

    1. 연극반이 아니구요, 영어 말하기회 정도 되는데…
      거기서 하는 행사 중의 하나가 영어연극이라고 보면 될 듯 싶어요.
      주로 어떤 주제를 내걸고 그것을 영어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걸 하더라구요.
      규모는 200명 정도 된다고 하는 거 같아요.
      힘든 대학생활인 것 같은데 즐겁게 하는 것 같아 그게 제일 보기 좋았어요.

  2. 문지 양의 표정 하나하나가 여느 배우 못지 않습니다.
    와세다의 연극이 어느 정도로 잘된 작품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무대 담당들의 또 다른 열연이 좋은 연극을 만든 게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가히 무대 뒤의 영웅(히로인)이라 불러주고 싶군요.

    1. 들고 뛰며 나르는 것을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원래 공주였는데 신분도 버리고 땀흘리는 거 보니 세상을 많이 배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ㅋ

  3. 자식이 서는 그 곳이 어디든 주인공이 되고 마는 것..
    저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반짝이는 딸..
    자식을 둔 부모로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도쿄여행의 하이라이트라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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