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가오카, 그 가을 풍경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8-1

연극제가 끝난 다음 날은
주조의 북쪽에 접해 있는 마을을 돌아보았다.
니시가오카와 아카바네라고 하는 마을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길거리에 동네의 안내판이 서 있곤 했는데
그 안내판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공원이 많았다.
딸이 사는 집을 중심으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대여섯 개의 공원이 있었던 기억이다.
원래는 그 공원들을 순례할 생각이었지만
그냥 다니다 보니
사람사는 주거지 골목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아주 괜찮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오늘 들어선 길에선 축구 조각상이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춰 세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왜 세워놓았는지 아무 설명이 없었다.
항상 야구하는 아이들만 많이 보았기 때문인지
축구 조각상이 생소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세워놓은 것일까.
(인터넷을 검색하다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근처에 니시가오카 축구장이 있다.
이 축구 조각상이 들어서 있는 것은 바로 그 축구장이 이유가 될 듯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 하나 나타났다.
길 옆으로 차들이 늘어서 있긴 했지만 다니는 차들은 별로 없었다.
동네의 이면도로라서 그렇다.
세워놓은 차들은 집에 갈 때쯤이면
단풍의 세례를 톡톡히 받게 될 듯 싶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단풍이 좋은 길에서
도로변 울타리의 초록색과 어울리게
초록색으로 프레임을 치장한 자전거를 만났다.
가을색과 대비가 되면서도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초록과 단풍이 한자리에 있으면
여름과 가을이 서로 스치고 있는 느낌이 난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가로수는 가을이 되면 일단 먼저 잎을 물들이고,
그 다음에는 그 잎을 밑으로 내려 길을 색칠한다.
그렇게 가로수의 색칠하기는 아주 독특하다.
길을 곧장 색으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잎을 색으로 먼저 물들이고,
그렇게 물들인 색으로 길을 덮어 색을 칠한다.
나무가 칠한 색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금방 자리를 옮겨간다.
나무가 칠한 색은 색에 대한 고집이 완고하질 않다.
길은 언제나 진한 잿빛을 고집하며 그 색을 절대로 내놓는 법이 없지만
가을 한철 나무가 내주는 고운 빛엔 저항을 하지 못한다.
그 길로 가끔 자전거가 지나갔다.
자전거는 나무가 칠해놓은 가을색의 길에 훨씬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새들이 전선줄에 앉아 있다.
올려다 보며 한마디 했다.
야, 맨 오른쪽에 있는 새,
너는 왜 그렇게 뚝 떨어져 있냐?
우리 엄마가 그랬어.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뭐?
야, 뭔 소리야. 너는 백로가 아니라 비둘기야.
무슨 얘기야, 엄마가 나보고 매일 백로라고 했는데.
으이구, 좌우지간 비둘기도 가끔 집안 교육이 문제야.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자전거가 지나간다.
단풍든 가로수가 인사한다.
어서오세요.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은 모르는 눈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나무들이 담을 타넘고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가 가랑이 벌려 울타리에 걸치고 반쯤 타넘었다.
가장 멀리 있는 나무는 여전히 집안이다.
탈출해, 나무들아!
그래야 집주인의 두발 단속에서 벗어날 수 있어.
설마 머리 자르겠다고 담타넘어 이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아마도 나란히 길을 내려오다
맨앞에 있는 자전거가 전봇대에 코를 들이박으며 멈추었고,
그 뒷사람들이 줄줄이 그 뒤로 엉겨붙었을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다들 몸만 달랑 빠져나가 어디론가 가벼렸다.
용하다, 사람들.
어떻게 맨아래쪽 자전거를 바깥으로 두고
그렇게 일제히 안쪽으로 들이박으며 멈추어선 것인지.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차에서 내릴 때마다
차를 몰고 온 사람이 나무와 인사를 나누었을까.
안녕, 나무야 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어
차를 세울 때마다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나무가 있는 주차장이라면
꽤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나무는 새들에게만 보금자리를 내주는 것이 아니다.
가지끝을 떠난 나뭇잎이 자리를 잘 찾으면
제 살던 나무가 다시 보금자리가 된다.
길거리로 나앉으면 차들이 뭉개고 지나는 사람들이 밟고 가지만
나무의 보금자리에선 바깥으로 밀려나지만 않으면
몸이 바삭하게 마를 때까지 한동안 잘 지낼 수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누가 밀어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나무이다.
비슷한 모습의 나무를 보았는데도
어느 때는 지나는 자전거를 맞으며
허리를 구부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고,
어느 때는 등을 밀어 길쪽으로 기우뚱하게 밀려난 삶의 비애가 보인다.
반가운 인사를 볼 때는
자전거와 구부러진 허리만이 보였지만
밀려난 삶의 비애가 보일 때는
그에 앞서 나무와 집 사이의 좁은 간격이
답답한 느낌으로 먼저 와 닿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니시가오카에서

차의 앞창에 노랗고 붉은 가을이 쌓였다.
그냥 차를 세워놓기만 했도 줄을 잘서면 가을에 젖을 수 있다.
줄을 잘 선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가을엔 차를 세우는 것만으로
차를 가을에 물들일 수 있는 곳을 골라야 한다.
가을에는 그곳이 차를 세우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아카바네에서

아파트의 가을은 아파트의 나무에게만 온다.
아마 봄도 나무에게만 왔을 것이며,
그때쯤 나무는 여린 잎을 갓내밀어 그 봄을 맞았을 것이다.
또 여름도 나무에게만 왔을 것이며,
그때쯤 여름을 맞는 나무의 잎은 진초록으로 한껏 짙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 잎을 다 떨어뜨리고 나면 오게 될 겨울도
나무에게만 와서 앙상한 가지를 붙들고 덜덜 떨며 한 계절을 넘기게 될 것이다.
아파트엔 사실 어떤 계절도 찾아 오지 않는다.
계절은 언제나 아파트의 나무에게만 온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들에게도 계절이 온다고 착각을 하는 것은
이 한그루의 나무가 자신에게 온 계절을
아파트에 사는 사람 모두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에게 온 계절을 나누어받으며 비로소 계절을 챙긴다.
나무의 계절은 때로 단 한 그루만으로도 넘쳐서
아파트의 주민 모두가 나누어 쓸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어디서나 종종 나무에게 온 그 계절을
전혀 챙겨가지 못하는 주민들도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무는 지나다 올려다본 내게도
멀리 한국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것은 하나도 따지지 않고
나무의 가을을 챙겨주었다.
고맙다, 나무야.
네가 챙겨준 일본 도쿄 어느 아파트에서의 노란 가을을 두고두고 기억할께.

4 thoughts on “니시가오카, 그 가을 풍경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8-1

  1. 자동차가 한쪽으로만 늘어선 것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네는 맘대로 양쪽으로 늘어 세워 갓길을 어지럽히는데…

    아파트의 계절은 베란다에 널어 놓은 빨래들과 함께 옵니다.
    봄에는 겨우네 묵은 옷과 이불을 널어 놓는 것으로 시작하고
    여름은 땀에 쩔은 옷들로 날마다 수건과 속옷들로 장식하고
    가을은 …
    겨울은 …

    요즘은 베란다도 없이 확장을 해버려서 계절을 알 수가 없어요.

    1. 빨래도 계절을 알려주는 군요.
      저희는 2층 살 때는 빨래를 베란다에 내 걸었는데
      요즘은 1층에 살아서 마당에 내걸어요.
      겨울에는 거실에서 말리구요.
      빨래로 계절을 구분하시다니 눈이 섬세하시군요.

    1. 담에 부산가면 남부민 동네의 골목길을 돌아다녀 봐야 겠어요.
      관광지보다 동네 풍경이 의외로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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