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걸음은 어디를 가나 정처가 없다.
그러니까 갈 곳을 정해놓는 법이 없다.
아카바네를 돌아볼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눈이 이곳저곳을 짚어 시선이 닿는 한도 내에서 갈 곳을 정하면
일단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그곳까지 가면 또 방향은 네 방향으로 흩어져
내 시선이 여기저기를 짚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리를 정해놓은 모든 것들 사이로
내 걸음은 항상 자리를 정해놓지 않은채 흘러다녔다.
모든 것들이 자리를 정하고 그곳에 눌러앉은 세상에서
내 걸음마저 미리 갈 곳의 자리를 정한다면
나는 걸으면서도 주저앉아 있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난 주저앉아 있는 느낌의 걸음보다 흘러가는 느낌의 걸음이 좋았다.
아카바네 공원을 나오자 눈앞에 절이 하나 있었다.
절의 이름은 한자로는 대송사(大松寺) 였지만
일본식으로는 어떻게 읽는지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아마도 다이쇼-지라고 읽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다.
물론 어렵게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낸 결과이다.
절이 있는 곳도 아카바네라기 보다는 정확히는 니시가오카가 아닐까 싶다.
커다란 소나무에서 절의 이름을 따온 것일까.
좌우지간 가지와 침엽의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있기는 있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선 도로 공사를 하던 인부 중 한 명이
절의 출입구 벽에 몸을 기대고 잠시 졸고 있었다.
어디서나 노동자의 삶은 피곤하구나.
절에 들어가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붉은 냅킨을 목에 두룬 석불상들.
식사 시간인 것인가.
이때의 시간이 12시 30분 경이긴 했다.
가끔 이국의 풍경은 모르고 볼 때가 더 재미날 때도 있다.
이케부쿠로의 절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절도 뒤뜰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묘지였다.
담너머는 곧바로 주택가였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 동네의 한켠도 아니고
그 한가운데서 공존하는 풍경은 내게는 기묘한 것이었다.
그래도 산 자들의 동네는 아무리 한적해도 종종 인적이 있는데
죽은 자들의 동네는 적막이 감돌았다.
잠깐 돌아보는 중에 그 적막이 머리카락을 쭈볏 세웠고,
그래서 그냥 절을 나와 버렸다.
이국의 풍경은 또 그 풍경의 이력을 알고 보면 이해가 될텐데
모르고 보면 이해가 힘들 때도 종종 있다.
회색 도시를 모두 초록으로 물들여 버리자.
어떤 덩굴 식물이 초록의 세상을 꿈꾸며
회색의 담벼락을 타고 와와 물밀듯이 몰려가고 있었다.
정말 키가 고만고만이다.
나무들에게 모두 울타리 위로 고개내밀고
지나는 사람들 구경할 수 있을 만큼의 키만 내주었다.
아무리 봐도 들쑥날쑥 제 멋대로 사는 것보다
서로 키를 맞추어 가지런하게 사는 것을 꿈꾸는 나라같다.
입대를 앞두고 있는 나무인가.
아주 바짝 짧게 머리를 깎고 서 있었다.
장미의 색깔이 독특해서 찍어 두었다.
이런 분홍빛 장미는 처음보는 것 같다.
약간 색이 바랜 느낌도 났다.
요즘은 아파트들도 키를 똑같이 맞대면
스카이라인이 좋지 않다고 키의 변화를 갖추곤 하던데
여기는 아파트가 나란히 키를 맞춘 것은 물론이고
그 앞의 은행나무들도 또 똑같이 키를 맞추었다.
뭐든 나란히 맞추어 놓아야 안심하는 나라같다.
그래도 변화는 필요한 법.
키를 나란히 맞춘 아파트와 은행나무 사이로
작은 화분들이 자리를 잡고
나란히 맞춘 키를 가운데로 뚝 떨어뜨려놓고 있었다.
아파트 옆의 공원에
가을이 내려앉아 잔뜩 고여있었다.
내게는 내리막길이지만
내 방향으로 오고 있는 사람에겐 오르막길이다.
할머니 한 분이 가운데 가드레일을 손으로 잡고 천천히 길을 오르고 있었다.
가운데 가드레일의 용도가 길을 좌우로 가르는 것인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오르막길의 힘겨운 손을 잡아주는 또다른 손이었다.
금속의 가드레일에는 온기가 없지만
이런 걸 생각해낸 사람의 마음은 따뜻했을 것이다.
담장을 기어오르던 담쟁이가
계절이 가을로 들어서면서 아래로 방향을 꺾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치 분수처럼 솟아 오르는 모양이 되었다.
원래의 꿈은 그렇게 솟구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정처를 두지 않고 흐르던 걸음이
어느덧 아카바네역에 이르고 말았다.
주조의 바로 다음 역이 아카바네역이다.
역으로 가던 중에 한국가정요리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하나 보았다.
간판의 일본어는 찾아보니 ‘최고야’라고 적혀있는 듯하다.
일본어로는 최고야가 아니라 ‘체고야’라고 읽힐 것이다.
꽤 여러 곳에 점포를 두고 있는 체인점 같다.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내가 떠듬떠듬 가다가나를 찾아가며 확인한 것이 맞다면
식당 이름이 조금 촌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아카바네역 주변은 내가 가장 빈번하게 이용했던 주조역에 비하면
엄청나게 번화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번화한 거리에도 나무가 있었고,
나무밑에선 예외없이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었다.
아카바네역의 동쪽 출구 바로 앞쪽 풍경이다.
아카바네역에서 전철을 타고 주조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다 사람들 사진을 하나 찍었다.
아마 일본 사람들에겐 전혀 눈길이 가지 않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앉아있어도 참 가지런히도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다섯 명이 마치 키까지 맞추고 앉아 있는 듯한 그 풍경이 재미나
급하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다.
나이대도 비슷하게 맞춘 듯 보인다.
참으로 가지런한 것을 좋아하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