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조의 남쪽 동네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8-4

니시가오카와 아카바네를 돌아본 뒤 전철을 타고 주조로 돌아왔지만
시간은 아직 오후 두 시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아다닌 때문일 것이다.
혼자 돌아다닐 때는 먹는 일에 크게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일행이 있을 때는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된다.
난 일행이 있을 때는 많이 걷지 않고 주로 먹고 마신다.
혼자 다닐 때는 정반대이다.
그냥 거의 쉬임없이 걷는다.
아카바네에선 혼자 다닌 덕택에
많은 것을 보고도 시간을 충분히 남길 수가 있었다.
주조역에서 내린 나는 항상 걸음이 향하던 북쪽 출구를 버리고
처음으로 남쪽 출구로 내 걸음을 옮겨놓았다.
남은 오후의 시간을 주조역의 남쪽 동네를 돌아보는데 쓰고 싶었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린 동네 풍경은
이번 도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것들 중 하나였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사람들은 말하지.
담너머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사람 사는 곳은 다 어디나 거기서 거기라고.
그러니 그냥 이곳에서 정붙이고 살라고.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담너머 세상은 그래도 내가 꿈꾸며 가는 세상이고,
담안의 세상은 그 꿈을 접고 살아가는 세상이지.
담을 넘어간다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거지.
담너머 세상이 더 좋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꿈을 안고 담을 넘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
누군가에겐 꿈을 접고 담 안에 안주하기보다
꿈을 안고 담을 넘는 삶이 중요한 법이지.

어느 집 담장 아래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집 담장을 넘은 화초와 눈을 맞추었다.
화초가 도란도란 얘기를 들려주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난 처음에는 바깥으로 추방된 줄 알았어.
담밖으로 내걸렸으니까.
밖이란 내겐 그런 곳이었어.
말하자면 쫓겨난 곳이 바깥이었고, 안은 선택받은 곳이었지.
그런데 바깥으로 내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
안에 있을 때 한 사람의 사랑에 안주해야 했던 내가
바깥으로 내걸리고 나선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알게 되었지.
정말 사랑한다면 자기 곁에 묶어 두지 말고
만인의 사랑 속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안에 있으면 오직 나 하나만이 그의 사랑이 되지만
바깥으로 내보내면 만인의 사랑이 그의 사랑이 되는 것이었지.
그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었지.

내가 말했다.
만인의 사랑이 아니라 10001인의 사랑!
내가 오늘 한 명 더 보탰으니까.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모든 미용실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질해 주는데 그치지만
이 미용실은 어지러운 마음도 차분하게 손질해 줄 것만 같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우리 집 사람들은 사다리 타기를 무척 좋아해.
나는 그냥 덩굴식물이 아냐.
줄기를 정하고 타고 올라가면 때로 행운이
때로는 낙심이 내 줄기 끝에서 기다리고 있지.
너도 하나 골라볼래?

행운의 선물을 몇 개 마련한 뒤, 선물 이름을 종이에 적고,
그 종이를 어지럽게 뒤섞인 위쪽의 잎들 몇 개에 집게로 찝어놓고는
줄기를 타고 올라가 행운을 잡아보고 싶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골목을 지나다 안쪽으로 잡초들을 보았다.
분명 잡초인데 너무 줄지어 가지런히 피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설마 누가 줄지어 심어 놓은 것은 아니겠지?
하도 가지런하게 가꾸어 놓은 것들만 보다보니
어쩌다 잡초를 봐도 이게 가꾼 것인지
자연스럽게 저렇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 헷갈렸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오후 2시를 조금 넘기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쯤 또 절이 하나 나타났다.
절의 이름은 지복사(地福寺).
일본식으로는 치푸쿠라고 읽는 듯한데 자신은 할 수가 없다.
이 절에 들어갔다가 냅킨 두른 석불을 또 만났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에 의하면 6개의 지장보살상이라고 한다.
이곳은 셋이 모자까지 쓰고 있어 더 특이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지복사에서 돌로 된 동물 조각상을 하나 만났다.
다리 사이에 무슨 과일이 하나 놓여있다.
이때다 싶어 냉큼 놀려먹는다.
너, 알깠구나.

비는 잠시 내리는가 싶더니 곧 그쳤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나무야, 나무야, 너는 그 집에 바짝 붙어 도대체 뭘하는 거니?
쉿, 나는 이 집을 몇 년째 염탐하고 있어.
들키면 안돼.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 줘.
난 발끝을 세우고 살금살금 그 골목을 지나쳤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은 참 좋을 거다.
주인의 마음이 현관에 나와 미리 마중하고 있으니.
그것도 아주 예쁜 마음으로.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그림을 그릴 재주가 없다면 그림을 내게 맡겨봐.
화판도 필요 없어.
그냥 집에서 화판으로 삼을 만한 벽을 잘 찾아내면 돼.
그런 다음 그곳에 화분을 놓은 뒤 나를 심고 가꾸면 돼.
물론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 놔두어야 해.
작품은 전시를 해야 하는 것이니까.
이런 경우는 완전 상설 전시가 되지.
철마다 그림이 달라져서 식상하지도 않아.
그림은 내가 그리지만 그림은 또 네 것이기도 하지.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작은 미니 공원에 들렀다가 김삿갓을 만났다.
아니, 김삿갓 어른, 언제 일본으로 여행을 다 오셨슈.
예? 저 김삿갓 아닌데요.
저는 여기 토박이예요.
그냥 비가 하도 자주와서 아예 우산을 뒤집어 쓰고 살고 있는 것 뿐이예요.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너넨 둘이구나.
난 혼자왔는데.
좋겠다.
빨간 색으로 드레스 코드도 맞추고.

잠시 커플임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꽃앞에서 부러움에 젖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뭔 담쟁이가 위로 올라가질 않고
바닥을 기어가려고 하냐?
흠흠, 갑자기 흙냄새가 그리워졌어.
담쟁이도 흙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어.
도시에선 더 그래.
발밑에서 흙냄새가 솔솔 올라오면
아무 미련없이 하늘로 하늘로 걸음을 뗄 수가 있는데,
도시에선 자꾸 발밑에서 아스팔트의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곤 해.
그럴 때면 한참 위로 위로 길을 가다보면
내가 뿌리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
그때는 갑자기 흙냄새가 그리워져.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인구밀도가 너무 높으면 좋지를 않아.
원래 우리도 한때는 담장 위에서 사는 것이 사는 것처럼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인구밀도가 도를 넘어선 뒤로는
담장 위에 그냥 얹혀 있는 기분이야.
아마 너네도 그럴 걸.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에서 살다보면
그곳에서 삶을 영위한다기 보다 그냥 아무렇게나 뒤섞여 버린 삶을
그곳에 얹혀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 걸.
인생이란 것이 그래.
너무 복잡하다 보면 산다는 느낌보다
그냥 삶은 얹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말지.
도시는 사람사는 곳이 아니라
알고 보면 그냥 삶을 얹어놓고 있는 곳일 뿐이야.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인연이란 그런 것이지.
뒤엉킨 수많은 길 위에서 바로 우리 둘이 만나는 것.
한발만 삐끗했으면 다른 길로 들었을 그 길에서
우리는 만나고야 말았지.
인연이란 바로 그런 것이지.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내가 뭐냐구?
아무도 못들어온다고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구?
아니야.
막힌 골목이라고 알려주는 중이야.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두 여자가 자전거를 끌고 걸어간다.
둘은 속도를 내놓고 대신 둘 사이를 오고가는 얘기들을 얻는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속도는 얻을 수 있지만 둘 사이의 얘기를 잃고 만다.
얘기의 속도는 자전거를 따라가지 못한다.
얘기의 속도는 오직 보폭의 속도만 따라갈 수 있다.
두 여자는 그걸 잘 알고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5일 도쿄의 주조에서

저녁 때 주조역에서 딸을 만나
도쿄에 온 이후 처음으로 바깥에서 함께 외식을 했다.
녀석이 화장을 안했다고 사진을 찍지 못하게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냥 가린 얼굴만 찍어도 좋았다.
생긴 것으로 보면 다 한국인들 같아보이는데
예외없이 일본어를 쓰는 사람들 가운데서
한국말로 얘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연극제에서 본 것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수상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학생들이 약속한 듯 박수를 두 번치고
그러면 그것을 신호로 객석이 조용해졌다.
원래 박수 소리가 하나 둘 서서히 잦아지는 것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그것은 무슨 집체 의식 같아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고 했더니
그냥 그 연극제에서만 내려오는 오랜 전통이고
일본에서도 그런 경우는 없다고 한다.
자신도 그게 마음에 안들어서 그 두 번 박수치기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이 딸과 함께 한 저녁 속에서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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