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방울의 언어

Photo by Kim Dong Won


지상에 발을 딛는 빛살의 얘기를 생각한다.
모두가 잠드는 밤 속에서 하얗게 어둠 지켜가며 홀로 외로움 앓을 때 빛의 얘기를 생각한다. 적막한 어둠 속으로 나의 육신이 안식의 수면을 눈감지 못할 때 빛살의 얘기를 더듬는다. 어제의 순간들이 회한의 흔적으로 남아 이리저리 불편한 밤을 뒤척일 때 빛살의 얘기를 꺼내든다. 굳이 한낮의 이글대던 태양빛을 하룻밤 내내 기다리며 그래도 날이 밝으면 분주하게 바쁜 대로 괜찮을 거라는 거짓말 같은 위안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미숙한 손을 뻗어 성냥갑을 찾고 소리가 운치있도록 신경을 쓰면서 살그머니 속갑을 끄집어내면 된다. 그리고 성냥알 하나를 꺼낸다. 작은 유황 덩어리가 묻혀진 성냥개비의 위쪽을 확인하고 깔깔한 성냥갑의 한쪽 표피에 그것을 그어본다. 그리고 빛살이 어떻게 피어나는가를 아주 세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소쿠리만한 밝음으로 일어나며 부채살처럼 퍼지는 빛살의 한가운데 무엇이 있던가. 조그만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 투명으로 빛나는 보석의 결정처럼 작은 불꽃이다. 잘익은 청포도 알갱이를 보는 듯하여 가끔 나의 눈은 그 시린 빛깔에 가늘게 내려 감기기도 하였다. 때로 불꽃의 피어남은 탐스런 꽃봉오리 같았고, 또 어떤 때는 처음 여인의 알몸을 보던 날 안개처럼 흐려지던 나형의 윤곽으로 다가서며 연촛점의 희미한 아름다움을 흩뿌리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 알고보면 자아도취가 만들어낸 감상의 산물들. 불꽃은 청포도를 삼키듯 입속에 녹일 수 없으며 여인을 안듯 나의 작은 손 안에 품을 수 없다. 입도 안돼며 손도 맞잡아 함께하지 못한다. 육신의 어느 곳도 불꽃의 자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들의 몸은 불꽃의 뜨거움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피부가 고통에 얹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결국은 한줌의 재로 날려갈 미래가 그렇게 불꽃 속에서 먹이를 탐내는 파충류의 혀처럼 날름대고 있다. 언제나 우리들이 다가설 때면 그렇듯 파괴의 희열로 들뜨는게 불꽃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것을 가까이 했을 때는 우리들의 천진이 예외없이 배신의 쓴 맛을 경험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벌써 세상엔 빛의 얘기가 지천이었다. 태양으로부터 왔다는 그 빛들도 같은 얘기를 전했다. 어둠 속에서 지켜보았던 성냥의 불꽃은 젊고 푸른 여인의 젖가슴에서 조그맣게 흔들리는 젖꼭지처럼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아침의 빛이 떠났던 수분전의 세계는 그처럼 시선에 여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성냥의 불꽃은 그 속에선 하나의 티끌도 못되는 것. 성냥의 불꽃은 아예 새카맣게 타버릴지도 모른다. 태양은 상상으로도 좀처럼 그리기 힘든 거대한 화염덩어리라는 것이었다. 아침을 여는 빛살의 얘기 속에서 우리는 장미의 붉은 정열을, 진초록빛 들판의 생명감을 시선에 담아 더불어 나누고 있지만 그들이 튀어나온 모태는 우리들 인간과 함께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마치 빛살을 터뜨린 어젯밤 성냥의 불꽃이 우리와 하나될 수 없듯이 태양도 우리와 함께하지 못한다.
밤하늘 속에서 바늘 끝만큼 작게 빛나던 별빛의 얘기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설익은 젊음을 가졌던 옛시절에 우리들의 눈동자 속에 까닭도 없이 눈물을 영글게 했던 그 작은 별빛의 아름다움이 사실은 태양의 화염덩어리를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별들의 화염이 그 자리를 옮겨오면 지구와 태양 사이의 그 아득한 공간을 넘쳐 멀리 화성으로, 목성으로 깃발처럼 나부낄 일이다. 별들은 곧잘 차디찬 느낌으로 우리의 시선 속을 파고 들었지만 실상 그 빛들은 태양을 수십개 합친 거대한 크기의 화염덩어리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십만년을 나르는 기나긴 여행 끝에 닳고 삭제되어 비로소 우리의 시선 속에 함께하며 별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이라고 했다.
성냥의 불꽃은 빛을 만든다. 하늘의 태양 또한 빛을 만든다. 아득한 세월의 저편에서 별들도 빛을 만든다.
성냥은, 태양은, 또 별은 왜 빛을 만드는가. 빛은 멀고 먼 곳에 유배되어 있는 불꽃의 결정체들이 이 지상의 우리들과 함께 하고자 열망했던 사랑의 마음들. 애타는 대지에의 사랑이 열망으로 쌓일 때 불꽃들은 빛을 만든다. 서로가 유다른 세계를 살아 가진 그대로는 서로를 같이할 수 없기에 머언 먼 세계의 성냥불은, 태양은, 별들은 빛을 만든다.
대지로 스미는 물방울의 얘기를 생각한다.
우리가 숨쉬는 이 대기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작은 미립자의 물알갱이들이 떠있다고 들었다. 분명 수소 두 개에 산소 하나를 합친 H2O성분의 물알갱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물의 표면으로부터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들이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바로 그 미립자의 물알갱이로 변신하기 때문. 새벽의 풀밭으로 나서면 그렇게 떠돌던 미립자 알갱이들이 하나의 방울로 뭉쳐져 맑음을 머금고 잎새에 맺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슬이라 부른다. 때로 그 미립자 알갱이들은 부끄러움이 심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얀 빛깔이 고운 커튼을 한 겹 대지 위로 엷게 깔아 낭만적 배려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 우리들은 안개라 칭하였다. 높디 높은 하늘에서 떠돌던 미립자 알갱이들은 서로를 뭉쳐 하나의 방울을 만들고 도닥이는 소리를 내며 대지로 부딪쳐내린다. 그때 우리들은 대지의 갈증을 풀어내는 빗줄기를 본다.
작은 알갱이가 모여 물방울을 만든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미립자의 알갱이가 우리들의 갈증난 목을 적셔 시원한 한 순간으로 함께 할 수 있으며 대지의 생명체를 보듬고 충만한 삶의 빛깔로 다가서는 녹빛 자연으로 수놓일 수 있다.
보이지도 않는 미립자들이 물방울을 만들었다. 너무도 작고 너무도 가벼운 그들을 수만 합쳐서 물방울을 만들었다. 이슬로, 안개로, 또 빗줄기로 내리는 물방울을 만들었다.
물방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디 작은 미립자의 물알갱이들이 우리들과 함께 하고자 열망했던 사랑의 마음들. 작고 작은 미립자의 물알갱이들이 이 대지와 함께 하려는 사랑의 열정으로 꽁꽁 뭉쳐질 때 그것은 안개가 되고 이슬이 되며 또 빗줄기로 내린다.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우리 앞에 다가선다.
하나의 작은 미립자가 여기저기서 모여 물방울을 만든다.
시인(詩人)의 언어가 바로 그런 것. 불꽃의 언어가 아니라 빛살의 언어이며 또한 그것은 물방울의 언어이다. 시야도 채우지 못하는 미립자의 언어가 아니라 여름날의 무더위를 보듬는 물방울의 시원함을 가지고 있다. 한 줌의 재로 날리는 불꽃의 허무를 만들지 아니한다. 사물의 존재와 빛깔을 보장하는 빛의 언어로 우리와 함께한다. 시인은 그렇게 빛과 물방울의 언어로 자신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시인의 언어는 우리의 가슴에, 육신 속에 함께하는 하나가 된다.
우리들 서로 서로는 그렇게 타인의 존재를 가진 그대로 용납못하는 하나의 불꽃들. 수만으로 분해되어 타인의 눈에 뜨이지도 못하는 미립자의 티끌들. 그러나 우리들은 곁에 있기만 하여도 벌써 가슴으로 하나되어 녹아드는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이 시선에 차면 그 순간 황사 바람이 몰려가던 가슴 대지에 빗줄기가 내린다. 칠흑의 어둠이 물러서고 빛들의 밝음으로 세상이 가득차며 시선의 촉각이 더듬어 가는 곳 어디나 앞이 환히 트인다. 타는 불꽃의 마음이, 보이지 않으나 수만의 미립자 알갱이를 가진, 그러나 외롭던 가슴이 그리하여 지상을 사는 우리의 가슴 속에, 육신 속에 가슴벅차고 영롱한 아름다움으로 날아들어 빛으로, 빗줄기로 함께할 때 우리는 존재로 쓰여진 시인의 언어를 본다.
너의 존재는 나에게 그렇듯 빛으로, 물방울로 다가서는 시인의 언어이다.

2 thoughts on “빛과 물방울의 언어

    1. 요건 글을 먼저 쓰고 나중에 사진을 골랐어요.
      대개 사진을 찍을 때 글을 구상하는데 반대로 글을 먼저 쓴 뒤에 찍어온 사진 중에서 그에 맞는 것을 골라 넣기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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