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늪

Photo by Kim Dong Won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영월 문곡의 풍경이다.
속도를 쫓는 이 시대의 변화와는 무관한채 옛모습 그대로 이다.
그 속에 옛날 그대로 고이 간직된 어릴 적 추억은 그곳을 찾을 때마다 내 마음의 위안이 된다.

근래에 두 가지 물건을 새로 장만했다. 새로 장만했다기 보다 전의 것을 처분하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 것이니 처음 구경하는 물건들은 아니다.
그중 하나는 DVD 라이터이다. 파이오니어에서 내놓은 16배속짜리 제품이다. 4.4기가의 DVD를 5분에 구워준다. 아직 16배속짜리 미디어가 없어서 8배속짜리를 쓰고 있으며 이걸 집어넣으면 어찌된 일인지 12배속으로 인식을 한다. 전의 제품도 같은 파이오니어 제품이었다. 그건 4배속짜리였다. 4배속의 DVD 미디어를 집어넣으면 15분 정도가 걸렸다. 새로 구입하면서 시간이 3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하지만 이는 새로 구입한 기기에서 만족을 얻기 위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3분의 1이라고 하면 아주 크게 줄은 것 같지만 절대적 시간을 생각하면 10분에 불과하다. 아무도 10분을 두고 그렇게 긴 시간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무엇을 살 때 아내랑 거의 상의를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그런 얘기를 꺼내보았자 결과는 항상 씁쓸한 충돌로 이어진 기억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구입한 제품이 컴팩트 드라이브 PD7X이다. 이는 전에 갖고 있던 트리퍼를 처분하고 구입했다. 둘 모두 디지털 카메라의 저장 장치인 플래시 카드의 내용물을 옮기는데 사용되는 휴대용 저장 장치이다. 전의 트리퍼는 1기가의 플래시 카드를 옮기는데 10분이 걸렸다. 이번의 PD7X는 5분이 걸린다. 새로운 기기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말의 표현을 달리하자면 절반밖에 안걸리는 셈이다. 하지만 절대적 시간으로 보면 5분이 줄어든 것에 불과하다. 전의 트리퍼에 카드를 꽂고 저장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10분이란 시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새로운 제품이 가져다주는 5분의 만족감을 뿌리치지 못한다.
컴퓨터나 각종 디지털 장비를 사용하면서 종종 마수처럼 뻗쳐오는 유혹을 느낄 때가 많다. 그 유혹은 대부분 속도나 용량과 관련되어 있다. 더 빠른 것, 더 용량이 큰 것을 찾게 된다. 용량이 큰 것을 찾을 때는 대체로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많다. 쌓아둘 내용물이 넘쳐날 때 달리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도는 그것으로 개선되는 실질적인 물리적 시간의 여유분을 생각하면 그 필요성을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빨라질 대로 빨라져 있어 새로운 제품들이 줄여주는 시간의 폭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15분이 걸리는 장비는 10여분을 줄여줄 뿐이며, 10분이 걸리던 장비는 5분여를 줄여줄 뿐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10분이나 5분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3분의 1이나 절반으로 인식이 된다.
아주 오래 전에 장만한 노트북이 하나있다. 파워북 160이란 흑백 기종이다. 가끔 그 파워북을 켠다. 워드 프로세서를 쳐보면 내 손가락의 속도보다 3자 정도 느리게 뒤를 따라온다. 다시 말하여 자판에서 손을 떼고 나서도 화면에선 계속 글자가 찍힌다. 나의 손가락이 컴퓨터를 앞서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 컴퓨터로 워드 프로세서를 만지고 있을 때면 기계를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기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빠른 속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새로운 장비를 사들이게 된다. 그런데 가끔 내가 그런 빠른 속도에 몸을 싣고 앞서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속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아무래도 구석에 쳐박아둔 그 옛날의 LC III를 다시 꺼내어 보아야 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구닥다리 컴퓨터에서 자연을 느끼게 될 줄은.

Photo by Kim Dong Won

고향의 소도 옛모습 그대로이다.
축사에서 사육되는 것이 아니라
다리밑에서 따가운 여름 햇볕을 피하며
한가로이 풀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2 thoughts on “속도의 늪

  1. 저는 어릴 때부터 도시에서 자라서인지 그새 익숙해져 있는 느낌..; ‘시골의 향수’ 대신 ‘제가 살던 옛 아파트촌의 향수’가 자리하고 있군요..(한편으로는 부럽죠) 새록새록 바뀌는 것도 익숙하고.. 안 그래도 어제 컴퓨터 HDD를 업그레이드했는데 마침 이런 글이 보여서 몇자 적었습니다. (속도도 더 빠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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