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말을 탄 아이의 이름은 명원이다.
휠체어의 아이는 성현이다.
봉사자들의 이름은 챙기질 못했다.
2004년 10월 31일, 나는 과천의 서울랜드에 있었다. 그날 나의 카메라는 그곳에서 한영교회 사랑부의 가을 나들이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 가운데서 계속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는 사진이 하나 있다. 그 사진 속엔 사랑부의 교사 중 한 명이 장애인 어린이의 목말을 태운채 걸어오고 있고, 또 다른 세 명이 휠체어 하나를 밀거나 끌면서 오솔길을 빠져나오고 있는 장면이 담겨있다. 그 사진은 이상하게 계속 내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마치 내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러던 어느 날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내 뇌리 속에서 교회를 다니고 안다니고에 관계없이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보았음직한 얘기 하나가 스쳐갔다. 바로 예수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하자 그가 일어나 걸었다고 하는 얘기이다. 기독교라는 울타리의 바깥에 선 나에겐 도저히 믿음을 줄 수 없는 얘기이지만 그 울타리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행한 기적 가운데 하나로 종종 입에 올려지고 있는 얘기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시월의 마지막날 서울랜드에서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던 나의 머리 속에서 혹시 그때 그의 얘기가 “일어나 걸으라”는 말임과 동시에 “일어나 걷게 하라”라는 이중의 함축을 지닌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즉 그의 말이 기적의 명령인 동시에 기적의 실천에 대한 명령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의 말이 기적의 명령일 때 우리는 이제나 저제나 그의 입만 쳐다보게 되겠지만 만약 그것이 기적의 실천에 대한 명령이었다면 우리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의 다리가 되는 실천으로 그의 말이 매일매일 기적을 일으키는 세상에서 그가 일어나 걸으라고 했던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 그렇다면 혹시 앉은뱅이를 일으킨 예수의 기적은 그 기적을 지켜본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그의 말을 기다리란 뜻이 아니라 그 기적은 우리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을 보여주려는데 그 본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들 평범한 인간의 기적은 바로 그의 말이 되어 다리가 불편한 사람의 옆으로 함께 서고, 그리하여 그들의 다리가 되어 주는 것이란 사실을 보여주려 함이 아니었을까.
그날 세 사람이 밀고 끄는 도움의 손길로 험한 오솔길을 건너오던 휠체어와 장애인을 목말 태우고 그 곁을 함께 했던 사랑부 교사의 모습에서 내가 받았던 가슴 속의 뭉클한 느낌은 바로 그 현장이 사랑의 힘으로 불편한 다리를 일으켜 세운 기적의 현장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늘도 생각에 잠겨 그 사진을 바라보는 내 가슴 한편으로 훈훈한 온기가 퍼지고 있는 것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