봅 윌슨 이야기

봅 윌슨


미국엔 절단 장애인 골프 협회(National Amputee Golf Assoiciation(NAGA): http://www.nagagolf.org)란 것이 있다. 사고로 인하여 사지를 절단해야 했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그 회원을 이루고 있다.
봅 윌슨(Bob Wilson)은 이 협회의 회장이다. 그는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사고는 1974년에 있었다. 당시 그는 해군 소령이었으며, 미국의 항공모함 키티호크호의 비행 갑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훈련 장소는 남중국해였으며, 매일 이륙과 착륙 훈련이 반복되고 있었다. 갑판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그의 책임이었다. 그는 안전을 제일의 기치로 삼고 있었으며, 그에 관해선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을 붙잡아서 방탄복과 헬맷을 착용하라고 명령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함대의 함장 레드 독 데이비스였다. 함대의 최고 사령관을 몰라보고 그에게 안전장비를 착용할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는 안전에 철두철미했다.
그런데 어느 날 훈련의 양상이 특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F-4 전투기가 매 2~3분 간격으로 날아든 것이다. 항공모함의 갑판에선 비행기가 착륙하고 나면 다른 비행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재빨리 비행기를 치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방금 착륙한 한 조종사가 비행기를 돌려서 길을 비키라는 통제관의 신호를 놓치고 있었다. 사태가 위급하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재빨리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그 조종사를 알고 있었고, 아울러 그는 밝은 노랑색의 비행갑판 장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눈이 잘 띌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 조종사는 그를 알아보았고, 두 사람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긴급 신호를 보낼 때는 조종사의 곁을 맴돌면서 게속 조종사와 눈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종사와 눈을 맞추면서 그는 주변의 상황을 살피질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세 걸음 정도를 옮겼을 때 그는 “갑판의 접근금지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페인트칠을 하여 표시를 해놓은 그 선은 거대한 케이블이 놓여있는 지역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항공모함에선 비행기의 꼬리 부분에 있는 고리 장치에 케이블을 걸어서 비행기를 멈춘다. 전투기가 갑판으로 내려앉을 때의 속도는 시속 275km 정도에 이른다. 케이블은 제트기가 착륙하는 순간 꼬리쪽의 고리에 걸리면서 비행기를 멈춘다. 그가 갑판의 접근금지선을 넘어간지 2초만에 전투기 한대가 날아들었으며, 바로 그 순간 그의 다리는 그대로 잘려나갔다. 양쪽 무릎 아래쪽이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그는 5일 뒤, 필리핀의 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미칠 지경이었던 그는 몸에 꽂힌 온갖 튜브를 뽑아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마취제가 투여되었고, 결국 약기운 때문에 잠잠해졌다. 그러나 깨어나면 다시 그 짓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결국은 필라델피아의 해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몸이 절단되었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제 도대체 뭘 할 수 있지?라는 것이었다. 그 질문의 대답은 막막했다. 더구나 그는 해군에 복무 중이던 군인이었다. 일반 사회 경험이 없던 그로서는 더더욱 미래가 막막했다. 아울러 그는 벌써 구식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겐 아내가 있었고, 사고 3주전에 태어난 둘째 아이가 있었다. 그는 평생을 군대에서 보내기로 결심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자리를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고는 그의 앞길을 막막하게 만들어 버렸다.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그에게 빛이 된 것은 다름 아닌 다른 장애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병원에서 <골프 월드> 잡지를 집어들게 된다. 잡지의 표지엔 빅 롱이란 별명을 가진 어떤 사람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그는 파인허스트에서 열린 미국 절단장애인 골프 협회 선수권전에서 우승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는 순간 어떤 희망의 섬광이 번쩍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해 6월 그는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사실 그는 그 전에도 골프를 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고 뒤로 그는 골프를 다시 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하질 못하고 있었다.
첫 라운드에 나섰을 때 그는 9홀, 즉 정규 라운드의 절반에서 플레이를 멈추어야 했다. 완전 탈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은 45타였다. 석고와 금속으로 된 매우 질이 낮은 막대기에 불과했던 인공 보철을 다리로 삼고, 그와 같은 악조건 아래서 그가 기록한 45타의 점수는 그의 생애 최고의 9홀 점수였다. 그는 그날 날아갈듯 기뻤다.
그는 인생에 대한 장애인들의 시각은 다양하다고 말한다. “충격과 분노, 체념의 초기 단계를 지나면 우리들 대부분이 평범하게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쌍한 다른 사람을 껴안으며 연민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해 연민의 태도를 보여주어선 절대로 안된다. 의지가 단호한 사람들은 그러한 연민에 대해 분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체념을 한 사람들은 그런 연민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어느 경우이든 모두가 패자가 된다.”
어느 날 그가 골프장 내에 있는 골프 상점에 앉아있는데 한 회원이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봅,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볼을 칠 수 있는지 좀 가르쳐 줄 수 있나요?”
“기꺼이 해드리지요. 당장 연습 지역으로 갑시다. 그런데 그 전에 내 차가 있는 주차장에 잠시 들러야 해요.”
“아니, 거긴 뭐하러요?”
“내 차의 트렁크에 작은 수술실이 있어요. 나처럼 볼을 치려면 그 전에 먼저 당신의 다리를 잘라내야 하거든요.”
이제 그는 자신의 장애를 웃음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여유를 갖게 되었다.
어느날은 골프장에서 골프화를 닦아주는 보조원에게 그의 신발을 깨끗이 닦아놓았느냐고 물었다.
“근데 어떤게 선생님거죠?” 그가 이렇게 물었다.
“그거야 발냄새가 전혀 안나는게 내꺼지.”
골프장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도 장애로 인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어느날 그는 수퍼마켓에서 줄을 서 있었다. 그의 뒤쪽엔 한 여자가 다섯 살난 아이를 데리고 서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분명했다. 아이의 시선은 그의 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인공보철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는 아이의 시선을 가리거나 쳐다보지 말라고 꾸짖지 않고 그냥 쳐다보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렇게 1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여자가 몸을 숙이더니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릴만한 소리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거, 상당히 시원할 것 같지 않니?” 아이는 좀더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시원할 것 같아, 엄마. 나도 해보고 싶어.” 그는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그 말 한마디로 나는 그 날 최고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은 아마도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에 대한 그 아이의 시각에 평생동안 좋는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두 다리를 잃고 한때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는 한 장애인의 삶을 통하여 빛을 보았고, 이제는 그가 또다른 빛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장애는 절망스러운 것이지만, 그 절망으로부터 일어났을 때, 그 삶은 단순히 그의 삶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의 빛이 된다.

***기사 출처: http://www.golfdigest.com/features/index.ssf?/features/gd200509myshot.html
새로운 주소: http://www.golfdigest.com/magazine/myshot_gd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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