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들어온다.
나에게는 배의 귀환이다.
앞으로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고 난 뒤쪽으로 하얗게 일어났다 가라앉는
잠깐의 길을 확연하게 남기며 배는 귀환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배에 가득찬 생선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할 것이다.
가득찬 만선의 생선이 가슴 설레게 하고
온신경은 온통 오늘 잡은 생선에 몰려가 있을 것이다.
생활은 시선을 생활 속에 묶어버린다.
생활에 묶이면 시선은 배가 채워갖고 들어오는 생선에 묶인다.
배와 그 배가 만들어내는 물결은
인이 박힐 정도로 눈에 깊숙이 배어
어떤 설레임도 주질 못할 정도로 무료하게 반복되지만
만선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언제나 두근거리는 기쁨을 가져다준다.
생활이 무서운 건, 그것으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생활 속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밧줄을 풀고 생활의 경계, 그 너머로 시선을 뻗기는 어렵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잘아는 나는, 가끔 내 생활로부터 도망을 친다.
어디로?
종종 내가 도망친 곳에 남들의 생활이 있다.
생활로부터 생활로 도망을 친 나는
남들의 생활 속에서 그들의 생활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마저 그들에게서 떼어버린다.
생활에서 도망을 치면
남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도
모든 생활을 우리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다.
생활은 어제가 오늘을 구속하고, 또 오늘이 내일을 구속하지만
도망자에겐 어제도 없고, 또 내일도 없다.
도망자에겐 오직 오늘 뿐이다.
그저 오늘 뿐인 한 도망자의 눈에는
소래포구로 들어오는 배에게선 배의 귀환만이 보일 뿐이다.
앞쪽으로 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뒤쪽으로 잠깐 하얗게 끓어올랐다가 가라앉는 길이 보이고,
그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난 살아갈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끔 내 생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그 도망자의 길에서 남들의 생활도 그들의 생활에서 떼어낼 수 있기에.
그리고 또 혹 모를 일이다.
그렇게 도망을 치다 보면
자기 생활의 한가운데서 생활의 구속을 떼어낸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2 thoughts on “포구로 들어오는 배”
돌아오는 배를 보며 <돌아오지 못한 배>를 생각한다.
아내가 기다리고 딸이 기다리고 아들이 기다리는 집. 무엇보다 주름진 노모가 기다리는 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수부들을 생각한다.
신문에서도 1단 기사로 처리 되고, TV에서도 한 컷 자막 기사에 지나지 않는 뱃사나이들의 해상 사고. 뚝심 좋은 뱃사나이들도 그 순간만은 신께 목숨을 구걸했으리라.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다. 그들은 거센 파도 속에서 <상여 없는> 장례식을 치루었다. 사건 사고 일지 속에 끼여 그들의 죽음은 스쳐가는 풍경처럼 처리됐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태양은 다시 떠오를 테고 바다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잠잠해지리라. 풍경 속 바다는 아름답지만, 삶의 현장인 바다는 이렇듯 냉담하고 잔인하다.
<돌아오는 배>는 ‘돌아오지 못한 배’를 탔던 오빠를 떠올리게 한다.
해상 사고에서의 ‘실종’은 곧 ‘사망’이라는 의미를 처음으로 가르쳐준 그 날!
겨울바다 속으로 사라져 이젠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오빠.
해병대 출신의 자신감과 선장으로서의 책무를 다 하며 끝까지 선원들을 구해주려 애썼다던 오빠.
일곱 살 딸아이가 눈에 밟히고 서른 일곱의 젊은 나이가 아까워 어떻게 떠났을까.
그는 지금쯤 용궁에서 왕노릇 하고 있을까. 어릴 때 우리가 함께 연극놀이 할 때처럼…
오늘은 아주 슬픈 사연이네요.
바다의 푸른 빛이 슬픈 빛이 된 것도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슬픔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