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 신부님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월 23일 팔당 두물머리의 생명평화미사에서


1월 23일 일요일엔 엄청난 눈이 내렸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팔당 두물머리의 생명평화미사 장소로 가는 길은
눈덮인 매끄러운 길로 인하여 평소보다 훨씬 걸음이 느렸다.
바로 눈앞은 아니었지만
저만치 눈에 잡히는 거리에서 급브레이크를 잡은 차 한대가
완전히 180도로 빙그르르 도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서너 대가 연쇄적으로 들이박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모두가 충돌을 피해갔다.
순식간에 엉기기는 했지만 그러나 들이박지는 않은 차들이
엉킨 실타래를 풀고 다시 가던 길을 반듯하게 편 뒤에 속도를 되찾았다.
순간적으로 지옥을 넘나든 맨앞의 그 차는
그 뒤로 완전히 엉금엉금 기면서 길을 갔다.
물론 우리는 그 차를 뒤로 밀쳐내고 걸음을 재촉했다.
요즘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은
차를 미사장까지 갖고 들어오질 않고
조금 떨어진 입구쪽에 세워놓고 걸어들어오신다.
그런데 항상 신부님 차가 있던 휑한 공터에 차가 없다.
원래는 비닐하우스의 자리였으나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철거되어
가끔 바람만이 무성하게 우거진 잡초들을 흔들다 가는 자리이다.
신부님도 눈길에 걸음이 막히신 것일까.
그럼 오늘 미사는 없는 것이 아닐까.
미사 시간을 한참 넘겨 우리는 미사 장소에 도착했고,
미사를 올리는 비닐하우스에선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모여 미사를 올리고 있었다.
신부님은 요즘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이 아니시다.
몇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은 윤종일 신부님이다.
이 미사를 가장 먼저 제안하여 시작한 신부님이기도 하다.
미사가 마무리되기 직전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은 오늘 제가 대타 신부입니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오늘 오기로 한 신부님이 오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미사를 준비하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엄청나게 많은 눈이 왔고,
그 눈이 오시기로 한 신부님의 발목을 잡았지만
생명평화미사의 자리에선 대타 신부님이 미사를 이어갔다.
끊어지면 그것으로 끊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타나 끈을 이어가는 대타가 있는 곳이
눈내린 날의 그곳이었다.
그곳의 나도 누군가의 대타같았고
대타로 나와 마치 홈런이라도 한방 터뜨린 것처럼
오늘따라 뿌듯함이 더 컸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에만 이곳을 찾는다는 젊은이를 이곳에서 만난 적이 있다.
금요일에 가장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그 어려운 금요일을 택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비워놓은 자리를 메꾸어주려고 온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생각하니 그는 대타의 즐거움을 아는 청년이었다.
대타 신부님이 오늘
대타는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끊어지는 끈을 이어주는 가장 뿌듯한 자리란 것을 일러주었다.
우리에겐 대타 신부님이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월 23일 팔당 두물머리의 생명평화미사
미사가 끝나고 난 뒤의 뒷풀이 자리에서
윤종일 신부님

6 thoughts on “대타 신부님

  1. 어제 저희도 수원 다녀올 일이 있어 평소 드리던 11시 대신
    2시 예배를 가려고 했는데, 올라오는 길에 눈이 내려 엉금엉금 기어가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올림픽대교 입구에서 유턴해 오면서
    두물머리도 길이 안 좋을 텐데 했는데, 그래도 자리를 지키셨군요.

    윤 신부님은 워낙 거물급 대타신 것 같고,
    두 분도 이제 막 미사계에 데뷔하신 촉망 받는 신예 대타들 같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1. 저희는 어제 여기 가면서
      두 분은 지금쯤 거기 가 계시겠네.. 그러면서 갔어요.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심한 농민은 네 분이라고 하시더군요.
      윤종일 신부님이 고통을 즐겁게 감내하면서 가보자고 하셨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했어요.

  2. 아! 대타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드리셨군요^^
    사진에는 안계신 기옥님을 저는 떠올렸어요
    정말 웃는 모습이 참 보기좋았었던 첫 모습^^ 인사동 전시회도 떠오르구요
    안부 전합니당~~~^^
    두물머리 미사..정말 부끄럽네요^^;; 저는 한 번도 못갔어요…
    핑계라면…엄청 멀다…핑계네요 ^^ㅋ 멀어도 갈 수는 있었는데….퓨….

    1. 저도 자주는 못가구요..
      올해 2월 17일인가가 1년째인데…
      정말 놀라운 사람들은 계속 나와서 봉사하는 사람들인거 같아요.
      어제는 300회 미사 때 서상진 신부님이 한 말씀을 인터넷에서 비디오로 봤는데 여긴 가면 정말 힘을 얻는 듯 싶어요.
      그리고 도토리님이 마음 보태주시잖아요.
      함께 해주는 마음들이 든든한 곳이기도 하죠.

    2. 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방가요~~~
      김동원님은 빨간모자보고 짐작했었는데요^^
      그래서 기옥님이 찍으신 사진이구나 했지요 ㅋㅋㅋ
      넹~ 잘지내요 …좀….일이 많은 시기에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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